그늘(arbor)
성서는 상반된 의미를 가진 ‘그늘’에 대한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늘은 ‘하느님의 보호 아래 있다’를 뜻한다.
반면 즈카르야 노래에서 보듯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 1,79)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있다’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보편적’, ‘공번된’이라는 뜻을 갖는 그리스어 katholikos, 곧 ‘천주교’라는 뜻의 catholic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안티오키아 이냐시오 주교(?-107)는 로마 트라이아노 황제 박해 때 맹수의 밥이 되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안티오키아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보호나 도움으로 현세적인 안정인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아니 그는 일시적인 안정을 누리는 현세적 ‘그늘’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그늘’에 대하여 성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늘집’(arbor)은 단지 빛을 피하기 위해만 만들어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오히려 빛을 통해 표현되는 사물을 더 잘 바라보고 대화하기 위해 그늘을 일부러 만든다.
로마 신자들은 안티오키아 이냐시오 주교가 일부러 죽음의 그늘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응달, 곧 그늘은 빛으로 만들어지며, 그 빛을 향한다는 것을 성찰하였다.
삶은 그늘 속에서 사물을 선명하게 신비롭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같은 그늘에서의 바라봄과 느낌은 사물에서 사물의 내면으로, 그리고 사람의 내면으로 시선을 뻗어나가게 한다.
하여 정원에서 나무그늘을 만들거나 그 그늘에 앉는 것은 사물에 비치는 자신과 그 너머를 보게 한다.
안티오키아 이냐시오는 자신의 시련과 역경이라는 ‘그늘에서 차안에서 피안으로, 현세에서 영원으로 뻗어가는 시선을 갖졌던 것 같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현세에서 자녀들을 결혼 시키면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가정을 꾸려야 되는데, 그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부모님께 계속의지하는 나약한 가장들이 많은 것같아요.
이냐시오성인의 하느님의 보호나 도움으로 현세적인 안정인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고 하신 말씀에 마음이 와 닿습니다. 차안에서 피안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며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