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산(儒達山)
▣탐방일자 : 2014년 5월 24일(토)
▣소 재 지 : 전남 목포시 죽교동 27-1
높이 228m. 산정이 가파르고 기암절벽이 첩첩이 쌓여 있어 호남의 개골산(皆骨山)으로도 불린다. 산의 동쪽과 남쪽의 완경사 산록은 이미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산정에서는 목포시와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과거 외적을 경계하던 봉수대가 2개 남아 있다. 약 100m 내려오면 정오를 알리던 오포대와 노적봉이 있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가장해 적을 속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기슭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조각공원이 있으며, 그 옆쪽으로는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난(蘭)공원이 있어 유달산의 운치를 더해준다.
그밖에 대학루·관운각·소요정·유선각·달성각과 유달사·수도사·관음사 등의 사찰이 있다. 유선각(儒仙閣)은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해 건립했으며, 처음에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콘크리트로 개축했다. 또한 이충무공 동상, 어린이 헌장탑과 놀이터, 4·19기념탑, 충혼탑,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바다에 임해 있는 서쪽 산록에 유달 해수욕장이 있다.
유달산(儒達山)은 영혼이 거쳐 가는 곳이라 하여 영달산(靈達山) 이라고 불렸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그 햇빛을 받아 봉오리가 마치 쇠가 녹아내리는 듯한 산으로 변한다 하여 유달산(鍮達山)이라 하였고, 구한말 대학자인 무정 정만조가 유배되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유달산에서 시회(詩會)를 열자 자극을 받은 지방 선비들이 유달정(儒達亭) 건립을 논의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산 이름도 유달산(儒達山)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무정 정만조(1858∼1936)선생은 동래인으로 1858년(철종때) 정기우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32세때 문과 급제, 35세때 갑오경장 무렵 내무참의, 36세때 김홍집내각 궁내부대신 관방비서관겸 참사관, 이후 국조보감 편찬위원, 종묘전사 경학원, 성균관 대제학, 명륜학원 설립 초대총재를 역임한 한말 3대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1896년 경복궁 화재사건 및 민비 시해 사건에 관련 이완용 등 권신들의 모함으로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당시에 의제 허백련 화백 등 여러 문하생을 길렀으며[의재]란 호도 무정이 지어준 것이다. 그후 남농 허건 화백도 그 영향을 받았으며 [남농]이란 호 또한 무정이 지어주었다.
12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목포에 들렀는데 조선조 시절 제주도나 완도로 유배되어가는 사람들은 목포에서 배를 타야했고 요행히 죄를 벗고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는 사람들이 상륙하는 곳도 역시 목포였다.
더욱이 조선조 중기 명종 선조때부터 한말까지의 유배지는 진도로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진도로 가려면 반드시 목포에서 배를 타야 했다.
그 후 1920년 4월 29일에는 일본에 빼앗긴 조국의 운명과 세태를 한탄하면서 쇠퇴한 유교를 진작시키는 뜻으로 광주 박윤동씨외 104인이 목포 유달산에 모여 유산정을 건립했다.
1932년 10월에는 당시 돈 510원을 모아 중건하고 무정이 상량문을 썼다. 그 건물이 바로 유달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목포시사(木浦詩社 지방 문화재 21호 기념물 및 사적지)이다.
유달산 표지석

노적봉(露積峯)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이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용하였다. 이순신은 이 노적봉을 짚과 섶으로 둘러 군량미가 산더미같이 쌓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하고서 적을 공략하였다고 한다.



대학루와 이순신장군 동상

그런데 장군의 칼이 좀 이상하다.
칼자루가 전체 칼 길에 비해 너무 길다.
왠지 불균형적이다.

동상의 뒷에서 본 노적봉

오포대(午砲臺)
오포대는 유달산 입구 이충무공 동산 남쪽에 있다.
오포대의 설치는 1909년4월이며 시민들에게 정오를 알리기 위한 포대였다. 조선식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다. 높이5자, 구경3치5푼, 선단경7치5푼, 기부8치, 중량733근이며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요되었다한다.
조선식 선입포로 현종 10년(1669)에 제작되었다. 높이5자, 구경3치5푼, 선단경7치5푼, 기부8치, 중량733근이며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요되었다한다.
대학루 옆 암반 위에 놓여 있는 오포대(지방문화재 제138호)는 정오를 알릴 때 발포하여 일종의 신호로 사용되었다.
삼사십년 전에 만 해도 목포 부청에 오포대를 관리하는 직원이 있었는데, 정오가 되면 오포대에 올라가서 포구에 화약과 신문지, 휴지 등을 넣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대학루(待鶴樓)
유달산(儒達山) 여러 개의 누각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아래에 위치한 이 누각의 이름은 학(鶴)을 기다린다 하여 대학루(待鶴樓)라 했다 한다. 1984년에 시민의 휴식처로 세워졌는데 대학루는 유달산의 누정(樓亭)중 삼학도(三鶴島)를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은 육지가 되어버린 세 개의 섬 삼학도와 관련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가 이곳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옛날 유달산에는 무예를 익이던 한 장사가 있었다. 근처에는 세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장사의 늠름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를 눈치 챈 장사는 세 처녀를 불러 무예 정진에 방해가 되므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멀리 떨어진 섬에서 기다려 줄 것을 요청했다.
세 처녀는 장사의 말대로 멀리 떨어져 기다리기로 하고 돛단배에 몸을 실었으나 장사는 차마 이들을 떠나보낼 수 없어 이들이 탄 배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이윽고 배는 두 동강이 나 가라앉고 그 자리에서 세 마리의 학이 솟아오르더니 구슬픈 울음을 남기면서 다시 가라 앉아, 그 자리에서 세 개의 섬이 솟아올랐다.」
이 세 개의 섬이 삼학도다.

돌아보니 노적봉이 눈 아래다.

달선각과 이난영 노래비


해설사의 설명을 집중력있게 듣고 있는 회원님들


노적봉과 대학루

이난영 노래비와 노적봉과 대학루



달선각(達仙閣)
어린이 헌장탑과 이난영 노래비 윗쪽에 자리한 달선각은 1959년 8월 15일 시민의 휴식처로 건립되었다.
당시 유달산 입구에서 유선각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중간에 누각을 세울 것을 결의하였고, 준공일이 8월 15일 즈음이라 해방 14주년(광복절) 행사와 함께 기념식을 가졌다. 누각 이름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고, 면적 42㎡, 육각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천자총통(天字銃筒)

[출처 : 내용 검색인용 및 일부 추가 편집. 사진 - 서태일]
첫댓글 서태일 선생님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자주 올려 주십시오
멋지게 꾸며 놓으셧서 잘 읽고 갑니다
하나의 자료가 될것같으네요
보기 좋습니다.
작품 제 문학방으로 좀 스크랩 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