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살 생각
봉혜선
새해 볕이 쨍하니 거실에 가득 들어와 있다. ‘나는 60살이 되었다.’ 정녕코 상상도 해보지 않은 나이대(代)로 나는야 미끄러져 들어간다. 두려운, 막연한, 꿈꾸어보지 않은, 현실이 되리라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나이다. 빈 것을 따라다닌 건 아니라고 해도 공허와 허무가 지금의 나에게 꽉 차 있다.
여기서, 2500년 전 이순의 나이와 지금은 얼마나 다른가에 초점을 맞추어본다. 멀리 공자의 말씀까지 갈 것도 없다. 신체 나이로도 7살 정도 어리게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평균 수명으로 따져도 지금과 예전이 다르다. 지금은 남녀 수명이 80세가 역대 최고급 장수 시대이다. 예전과는 다른 세상에서 이순이니 불혹이니 하는 기준에 부합되는지 반성하고자 하는 건 맞지 않는다.
요즘 말로 '어쩌다 이순'이 되었는데 이 관점에서 보자면 어쩌다 보니 이순인 거냐, 우물쭈물하다가 이순에 이른 것이냐. 아니면 이순을 어쩔 거냐고 새삼 느껴보는 것이어야 하느냐. 그래도 우리가 치는 대로 환갑(還甲)이면 다시 갑자(甲子)가 돌아왔다는 의미이니 이 시기에 나를 돌아본다는 건 의미가 있다.
20대의 다리는 출렁다리였다. 지금 내 눈에는 자칫 위태해 보이는 내 아이들처럼 그 나이에는 나도 역동적이었으리라. 놀이동산 다람쥐 통에 들어가 구르며 어지럼증을 즐기기도 했고 영원히 돌 수 있을 거란 허상에도 나를 맡겼다. 위험이 위험인 줄 몰랐고 어른들의 걱정스러운 염려는 모른 체 했다. 20대에 결혼했으니 그 연령대 할 일로는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현모양처’의 시대였다.
나이 차가 나는 막내를 낳은 30대에는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를 잊어야 했다. 아무 일이 없기만을 바랐고 앞에 놓인 암담한 현실이 없는 일이 될 듯해 빨리 나이 들기를 소원했다. 서른아홉에 청바지에 구멍을 39군데나 찢어 입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암담하고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30대의 허울을 헤쳐 나가기는 어려웠다.‘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 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서른 즈음에」, 김광석)
40대에는 욕망을 향해 몸부림쳤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걸 모르고 마구 덤비기도 했다. 「마흔이라는 깊은 나이」를 ‘어느날/말로만/글로만/입으로만/사랑하고, 이해하고, 아름답다고/소리치는 나를 아프게/발견한다/이제는 좀 행동해보지/타일러 본다//여전히 부족하지만/나는 나의 열정을/쓰다듬어준다.’고 시인 노희경은 읊었다.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길바닥에 뻗대고 울어도 사십대는 길었다. 어린 시절에 ‘죽으리라’ 결심한 나이다. 고정희 시인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사십대」) 라고 사색했다.
안정을 찾아 몸부림치느라 정신 못 차리게 바쁘다 소리치며 젊음의 마지막 시기인 50의 다리를 건넜다. 우리나라는 50대가 느끼는 행복지수가 가장 크다는 통계를 긍정하려 노력했다. 건강도 경제력도 주변 여건도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라는 뜻이리라. 50부터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주장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60살이 되면 겉으로도 속으로도 꼼짝없이 나이에 붙잡혀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내 50대는 하루하루가 숨 가빴다. 금방 죽을 것처럼 마음이 급했다. UN이 발표한 ‘청년’이라는 나이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음이 지나간다.
60대를 어떻게 꾸려가야 할까. 가족들을 챙기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가는 나를 실감하고 있다. 집에는 갓 결혼했던 20대처럼 다시 둘이 남을 테다. 아들 둘은 결혼할 것이고 새 식구로 며느리라는 작은 여자, 자식 같은, 자식뻘 ‘딸’이 있는 풍경에 처하리라. MZ 세대니 하며 시대가 변하고 있어 재수가 좋다면 손주들도 생길 것이다. 남편이 퇴직할 시기이기도 하다. 이미 예상할 수 있으니 덜 혼란스러우리라. 가벼워진 우리가 여행을 떠날 수도 있을 때다. 또 누구나 그래야 하듯 원래대로 혼자가 될 수도 있으리라. 태어났으니 살아내는 것, 살아나가는 것, 견디는 것, 버티는 것에만 매달려 ‘웰빙well-being’에만 방점을 찍어 왔다. 미처 삶의 의미를 찾아 고심하지 못했다. 과거에 해결했거나 미결인 채로 남은 것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는 철학의 시기. 사계절 중 가을의 시기. 생에서 물러나 관조할 수 있는 시기다.
그동안 나는 ‘나’ 없이. 별일 없이 그럭저럭 흘러왔다. 새삼 나를 찾거나 돌아보거나 챙기는 것이 과연 꼭 필요한 과정이나 작업이 되어야 할까. 어디서부터 나의 모습을 잃었을까. 어디까지가 나인가. 어느 시기보다 더 역동적이거나 변화무쌍한 시기가 되리라 예상한다. 그래도, 아니 그러나 생각만큼 쉽게 기울지 않을지 모른다. 더 늦기 전에 가지 않은 길로 가보려고 한다. 사회가, 부모가 원하는 길이 아닌, 생활의 방편이 아닌 일. 어쩔 수 없이 취미 거리뿐이었던, 밥 먹고 나면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나의 길로 나서보고 싶은 열망 앞에 나는 무너진다. 아니 이제야 똑바로 서고자 한다. 그간 막연한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왔다면 이제는 순간의 요구나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고 지금의 부름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혹 늦지는 않았을까. 전혀 해보지 않은 것들을 해보리라는 기대도 하고 기대만큼 두려움도 있다.
더 이상 미루고 있을 수는 없다. 이제는 내가 꾸리는 생이 되어야 한다. 지금에야 비로소. 그래, 인생은 알 수 없다. 숨어있는 나를 꺼내 보자. 전혀 다른 나를 발견하는 재미에 빠져 있다. 글쓰기, 차를 5잔쯤 마시며 하루를 지내기, 운동 종목 늘리기... 이런 전혀 다른 나를 겁내지 말기다. 이것도 삶이다. 어쩌면 이런 데로 쏠리는 내가 진짜 나일 수도 있다. 뭐든 실행하자. 이루자. 너무나 없던 ‘나’를 만나는 지금이 좋다. 미루고 있을 시간은 지났다. 겁을 집어먹고 있을 때는 아직 아니다. 매일 행복하기. 즐겁기. 가볍기. 며칠 전 한 머리 스타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거울을 볼 때마다 머리를 쥐어박거나 잡아 뜯고도 싶은데 거울 앞에서가 아니라면 나를 사랑하기로 한다. 사랑도 뭣도 다 건너가 버리고만 때여도 사랑을 이성에게 만으로 한정하지 말고 나에게로 대지로 하늘로 구름으로 펴 본다면 세상은 사랑으로 충만할 것이다.
두려움은 여전하다. 무사히 지낼 수 있겠지. 60살이라 생각하니 건강에 경고등이 하나씩 켜지고도 있다. 몸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겠다. 그간 생각만으로도 몸을 움직였다. 마음이나 생각이나 정신의 흐름에 비해 몸을 소홀히 여겨왔다. 때로 욕심을 채우려고 무리가 되는 막노동에 나를 부린 적도 있다. 60대를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이 가장 많이 즐기던 취미가 등산이었다가 나이가 드니 등산 대신 걷기를 택하자 올레길, 둘레길이 조성되는 사회 현상을 보자. 소비가 생산을 자극하는 요소는 또 있다. 요즘 맞벌이 하는 자녀 대신 손주를 보는 ‘할파파, 할마마’의 지갑을 공략해 재미를 보고 있다고 한다. 60대의 위상이 대저 이렇다.
간간이 만나는 70대도 노인이라 부르면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나 청춘이라는 걸까. ‘내로남불’처럼.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는 노래를 부르면 어느 나이라도 사랑할 수 있는 나이가 되듯 청년의 시기에나 가능하리라 여긴 가능하겠다고 여긴 일들이 본인의 나이에 따라 당연한 일이 되기도 한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해 기대하기보다는 ‘지금처럼’ ‘여기’에 주목해 보자. 지금이, 여기가 가장 좋다는 의미가 아닌가. 지나간 후에 ‘그때가 좋았다’라고 후회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런가. “카르페 디엠.”그 렇다면 ‘그때’를 지금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현명하고 잘 사는 방법이리라. 체육센터에서 나이 들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에 맞아 맞아 맞장구치고 있는데 그 말을 들은 나이 많은 ‘왕’언니가 콕 쥐어박고 간다. “내가 너 만할 때는 날아다녔어. 뭐가 나이가 많아, 한창 청춘이지. 나도 너만 하면 좋겠다.” 내가 얼마 전에 12살 아래 갑장에게 한 소리다.
나는 또한 ‘원하는 대로’라고 썼다. 허겁지겁’을 버리기로 한다. ‘안달복달, 애면글면, 노심초사’도 내 단어가 아니다. 퇴직한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찾아 전혀 다른 생의 모습을 하며 ‘제대로 사는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곤 한다. 그리고 앞으로 10년을, 무사히 원하는 대로 잘 꾸려가길 바라며 드디어 이룬 ‘작가’라는 이름을 지니고 눈앞에 있는 글자마다에 안녕을 말한다. ‘글자 안녕’ 작별 인사도 되고 새 인사도 된다. 그렇지, 인사란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일을 잘하고 살면 이순(耳順)에 맞을 수도 있겠다.
퇴직을 준비하는 남편이 어디로 옮겨 살까 의논해온다. 나는 갑작스레 놀라 “아니 아직 안 돼요.” 나는 지금을 흩트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연히 자리 잡았으나 바로 곁에 있는 도서관과 체육센터 덕에 이 동네에 정붙이고 살았다. 퇴직 후의 부모님을 가까이 오시라 해 정을 나누며 사는 동네다.
왜 안정감은 다 지나간 후에나 찾아드는가. ‘오늘을 잘 살고 잘 산 오늘을 토대로 내일을, 한 달을, 1년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남은 날들을 화양연화로 여길 수 있으리라’ 이 말이 결론이다. 과거에 매달릴 나이도 아니고 미래에 저당 잡혀 있을 때도 아니다. 계절 나이 시기 체력 가벼움. 언제나 가능한 때가 아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다. 안방과 거실에 가득 들어찬 겨울의 햇볕이 들어앉아 생각만 하는 나의 이 게으름을 엿보고 있다. 한껏 게을러 보기도 하자. 나이가 가진 특권이다. ‘살아 가’기 딱 좋은 날이다.
『한국산문』 1월 특집. 토끼해에 바라는 희망
서울 출생
한국산문 2019.12 <투명함을 그리다> 로 등단
한국 문인 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