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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얼굴이 보여주는 근원적 윤리- 조정인 작품론/권영옥 문학평론가
타자얼굴이 보여주는 근원적 윤리
-조정인 작품론
권영옥 문학평론가
1. 신적 계시성과 타자윤리의 탐색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나와 다른 얼굴을 가진 타자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죽어가는 타자, 병든 타자, 기아에 허덕이는 타자가 있다. 우리에겐 정상적인 타자보다 결여를 가진 타자를 더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런 윤리적 호소를 보내는 타자들은 신이 우리에게 준 욕망이며, 인간 영혼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지향적 본질이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대면하는 순간,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는 게 아닌, 나를 개방해서 그들을 안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다르게 말한다. 속도전을 방불케 하는 과학, 문명 시대에 내 몸과 다른 낯선 타자의 고통까지 어떻게 헤아리느냐고, 그들을 위해 어떻게 지고의 선을 행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여기에 대한 답을 조정인 시인의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인은 시에서 가족, 이웃뿐만 아니라, 다수 타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인다. 타자들은 시인에게 배고픔과 불구의 몸을 통해 윤리적 책임을 느끼도록 요청하고 동시에 병고의 시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절규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자신의 위치에서 그 어떤 호소라도 스스로 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인에게서 이 같은 책임은 가톨릭교의 사회적 원칙인 인간 구제의 구체화이다. 환언하면 무한 책임의식은 타자 얼굴에 대한 자신의 개방이고, 신의 영혼을 가진 종교인으로서의 윤리적 성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통스러운 얼굴의 호소는 높이의 차원에서 오는 타자의 결핍인 것이다.
조정인 시인의 윤리적 선성은 이번 시집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첫 시집『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 (천년의 시작 2004)에서는 타자의 고통이 곧 자신의 타자윤리 책임의 연원이라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시림(詩林)의 깊은 탐색과정을 거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적 윤리가 이번 『사과 얼마예요』(민음사 2019)에서 탐색의 진폭이 심화, 확대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사과 얼마예요』에 나타나는 타자윤리시학은 자신의 끝없는 탐색과정의 결실이고, 한국 시단의 한 위치를 점하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조정인 시에서의 타자윤리 책임은 바로 타자의 고통이 자신의 연원이라는 데서 문제적이다. 다른 시인들이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시를 쓰거나, 인간 내면의 무의식적인 분열 양상에 관한 시를 쓸 때 시인은 불의와 병고에 시달리는 타자에 대해 공감을 표시하고, 또한 타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열망한다. 이 뿐만 아니다. 시인은 타자들의 죽어가는 얼굴이 자신을 인질로 잡고 박해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윤리적 책임까지 느낀다. 그의 이러한 선적 덕목은 사랑의 가족공동체가 결국에는 가까움의 보편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에서 타자윤리 개념을 들인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권리를 해체한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타자에게 자신의 권리가 이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사과 얼마예요』에 나타나는 타자윤리의 개념은 신적 계시성에 의한 공감과 근접성, 사랑과 박애 그리고 대속이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2. 고통스러운 타자 얼굴을 향한 근접성과 공감
기본적으로 조정인 시에서 타자를 향한 근접성은, 시인이 불안과 어둠에 휩싸인 타자 얼굴의 계시성을 보고 열망하고 지향하는 데서 나타난다. 얼굴의 계시성은 인간의 얼굴에 강림하는 절대자다. 또한 타자를 향해 나를 개방시키는 존재의 근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어둠과 불안에 놓여 있는 타자 얼굴의 계시가 시인에게 윤리적 책임을 지워 자신을 공감하게 하고 환대케 하는 것이다. 만약 타자 얼굴에 계시성이 없다면 시인은 타자를 근접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타자에게 공감하고 싶은 욕망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파토스적인 타자 얼굴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반항이나 저항 한번 없이 타자에게 근접하고 공감한다. 공감은 시인의 선지주의적인 무한 책임이다. 이처럼 공감이란 어둠과 불안한 타자 얼굴의 계시성 때문에 시인이 수동적으로 타자를 지향하는 영감이다. 시인이 타자를 공감하는 것에는 스스로가 종교적 영혼을 가졌다는 동력에 있고, 이는 동시에 본인의 고통과 관계없이 자기희생으로 타자를 수동성으로 껴안아야 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먼저, ‘근접성’과 ‘공감’에 앞서 조정인 시인은 『사과 얼마예요』에서 타자윤리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 교리의 신(「기념하는 사람들」, 「입들」)을 언급한다. 「입들」에서 신은 “일만 페이지의 구약에서 신약을 곧장 먹어 치운 사과의 소화기관은 얼마나 유구한가/ 그중에 하느님의 물병이 흘린 새벽이슬을 선호한 사과의 취향을 나는 경배한다” 시에서 보듯이 하느님(가톨릭 절대자의 호칭이다), 즉 신은 구약과 신약의 중심에 서 있으며 물병으로 새벽이슬을 흘리는 초월자다. 또한, 신은 “죽은 지 사흘 만에 홀연히 무덤을 빠져나”와 노아의 방주를 타는 존재다. 시인은 이런 신을 선호하고 경배한다. 이 시에서 ‘사과’란 구약에서 선악과의 상징이자, ‘여성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여성성이 곧 시인 자신을 의미한다. 이 시행에서 ‘아버지’는 시인의 종교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 신이다. 그런 신적인 영혼을 가진 타자를 열망하면서 ‘근접’하는 것은 시인의 윤리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흉곽 안쪽 달그락거리는 눈물을 수습해서 잠든 날은 잠의 맨바닥에
동전 한 움큼을 품고 웅크린 걸인 여자가 보였다
새벽엔 비가 와서 추웠고 어깨까지 모포를 끌어 올렸다 맑은 멸치 국물에 만
국수 그릇을 앞에 놓고 성근 스웨터 같은 사람하고 마주 앉고 싶었다 맑다는 건
허기의 다른 기분 허기를 뒤집으면 위기가 튀어 나오므로 패를 눌러두는데
목적을 밀고 울음의 구근이 아프게 불거졌다.
(…)
숲이 돌발적으로 빛났다 석양에 물드는 붉은 금빛을 띤 갈잎들이 들불처럼
번져 있다 영문 모를 금화 한 닢이 놓인 걸인의 접시 처럼 휘둥그렇게 사방을 둘러보는 여자
숲속 빈 벤치엔 누군가 방금 일어선 자리 같은 환한 온기
숲 안쪽이 가만히 밝았다 몸속을 일렁이던 울음의 그림자가 데려온
서쪽이 셔츠에 번져 있다
-「서쪽」 일부분
이 시에서 나타나는 시인의 타자윤리의 촉발점은 꿈속이다. 꿈에서 시인은 ‘걸인 여자’를 본다. 바쁜 현대인의 라이프 사이클로 봤을 때, 일반인이라면 “동전 한 움큼을 품고 웅크”리고 있는 여자에게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인 시인은 시인됨의 표상이자, 우주 만물의 제1 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회두(回頭)하는 가톨릭 신자다. 그 때문에 새벽 비에 “모포를 끌어올리는 걸인 여자”의 고통을 보고 거기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리고는 “맑은 멸치 국물에 만 국수 그릇을 앞에 놓고,” 그녀와 마주 앉고 싶다는 욕망을 내비친다. “마주 앉고 싶었다”는 것은 곧 걸인 타자에게 근접하고 싶다는 시인의 열망이다. ‘걸인 여자’처럼 시인이 근접할 수 있는 타자는 사회 중심부에 놓인 존재가 아닌, 맹인, 앉은뱅이, 과부, 걸인, 죄수, 미혼모, 환자 등 결여가 있는 이미지 군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람들을 환대하는 데 이는 그들이 사회 주변부라는 환유적 기표이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꿈은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에 ‘걸인 여자’는 허기를 느낀다. ‘허기’는 곧 ‘위기’의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패’로 그녀의 위기를 누른다. 시인은 꿈속에서라도 ‘걸인 여자’가 허기를 면할 수 있게 음식을 주면 좋은데, 그렇지 못해서 ‘울음의 촛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꿈은 또 비현실적이어서 풍경을 발생하기도 한다. 꿈에서 시인은 “숲이 돌발적으로 빛”나는 풍경과 대면한다. ‘숲’은 어둠, 죽음, 고통을 상징한다. 만약 어둠을 제거하면 ‘빛나’는 풍경은 마침내 “촛대 끝 펄럭이는 꽃숭어리”처럼 ‘촛불’이 된다. 또한 ‘붉은 금빛’이 된다. 따라서 ‘촛불’과 ‘금화’는 서로 연관성이 없지만 자유 연상을 통해 번쩍이는 ‘빛’과 연결된다. 이처럼 ‘숲’은 몇 개의 이미지 전이를 통해 치환 은유의 옷을 입게 된다.
만약 시인이 ‘걸인 여자’이고, 무의식의 또 다른 자신인 ‘사방을 둘러보는 여자’가 아니라면 꿈속에서도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 방금 일어선 자리 같은 환한 온기”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거지 여자’에 대한 시인의 근접성은 ‘촛불’, ‘금화’와 같은 환한 온기와 연결되면서, 결국 시인은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기에 이른다.
그날 내가 받아 온 건 한 덩이 불안 해수면에 반짝이던 물거울 한 조각
얼굴 없는 불안에 팔베개를 베어 주고 자장가를 불러줬지 젖을
물렸지 한 덩이 불안에 습기가 돌고 온기가 돌았지 피가 돌았지
어지러워, 어지러워, 흙에 스며든 초원의 빛 한 덩이 흙에도 봄은 왔지
(…)
한 덩이 불안이 응아, 팔다리를 휘저으며 울음을 터뜨렸지
불안도 오래 어루만지면 혼이 깃들지 눈을 맞추고 웃기도 하지
미소가 얼마나 먼 데서 온 별빛인지 그대가 알까
발가숭이 불안을 물가로 데려가 세례식을 치렀지 ‘안들로메다의 봄‘이라
이름을 주었지 그때, 시야 가득 연푸른 노트 낱장들이 펄럭펄럭 날아들었지
-「새가 태어나는 장소」 일부분
어둠은 그러므로 우리의 종교 자장자장 나의 아씨 지금은 커튼을 내리고
너와 나, 친밀 의식을 나누는 때 밤의 진흙을 통과하는 검은 혼례를 치르고 나면
잠의 베일을 걷어 올린 바로 그 지점 펼쳐진 빛의 벌판에 맑게 서 있을
너
-「습(習)」일부분
조정인 시에서 시인은 타자를 열망하고 근접할 뿐 아직 공감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지는 않는다. 대신, 시인은 ‘언어 담론’에 의해 타자를 공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타자 얼굴에는 신적 계시가 담겨 있어, 얼굴 그 자체가 담론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안’이 울음을 통해 계시되는 그 자체가 담론이기에 시인은 ‘물 거울’ 한 조각에 공감할 수 있다. 이처럼 조정인의 윤리적 시어들은 시인의 인식에서 비롯된 언어가 아닌, 신적 계시라는 외재성에 의해 공감하는 언어다. 다시 말해 공감은 ‘불안한 얼굴’이 계시하는 사물 타자에 의해 느껴지는 것이지, 시인 내부의 자발적 의지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시인은 신적 계시성에 의해 타자의 불안을 잠재우며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베개로 베어 주고”, “자장가를 불러”주며, “오래 어루만”져 주는 등 이런 행위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때서야 불안도 흙에 스며든 “초원의 빛 한 덩이”가 되어 감정이 평온해진다. 이 시에서 ‘흙’의 상징은 불안의 양육자인 동시에 ‘어머니’와 동일한 구체성이다. 불안은 양육자의 보살핌에 의지해 “봄이 오고”, “눈을 맞추며 웃기도” 한다. 평온해진 불안을 본 시인은 “미소가 얼마나 먼 데서 온 별빛인지”이라는 진술을 통해 흙의 노고에 외경심을 갖는다. 이 진술은 시에서 직접성이 아닌, 암시성을 통해 드러난다.
이와 연계되는 시 「습(習)」에서 시인은 “발가숭이 불안을 물가로 데려가 세례식을 치르고, ‘안드로메다의 봄’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진술한다. 이 시행에서 조정인 시인의 시인상이자, 타자윤리상의 백미인 ‘선지주의’를 드러낸다. 시인의 선지(先知)자적인 행동은 ‘물’로 죄를 씻어 내리는 세례식을 하고, 이것에 의해 신은 불안을 ‘새’로 부활시킨다. 이 부활이 곧 ‘안드로메다의 봄’이다. “먼 데서 온 별빛”과 “안드로메다의 봄”이 서로 연결되면서 시는 한층 더 윤리적 선성을 밑바탕에 깔게 된다. 시인의 이러한 행위는 가톨릭 공동체적 연대의 가능성을 종교적인 상징(「새가 태어나는 장소」)으로 나타낸다. 불안을 통해서 보면, 조정인 시인의 시는 관념과 구체적인 이미지의 동일화에 의해 윤리적 공감을 상징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은 비유적 타자를 통해 선적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새가 태어나는 장소」에서는 ‘불안’이 주체였다면, 「습(習)」 에서는 ‘어둠’이 주체 역할을 한다. ‘불안’과 ‘어둠’, 즉 파토스를 잠재우는 것은 에로스의 강한 생명력이다. 에로스는 타자를 향한 지향성으로서 시인에게 공감을 끌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파토스적인 얼굴의 계시를 보는 순간 시인은 이에 공감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어둠”이다. 어둠이 “우리의 종교라고 할 때”, 신적 계시성은 시인의 본질을 추구하는 타자와 나의 관계가 아닌, 뭇 타자들이 사는 세속의 삶을 표현한다. 어둠은 마침내 기나긴 ‘잠’ 의 베일을 벗고 ‘빛’에 의해 ‘초원’의 생명력을 펄럭인다. 따라서 종교의 역할은 ‘빛’을 통해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정인 시인 시의 장점은 ‘불안’과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고 포근함이다. 그녀는 이들을 끌어안고 잠재우는 강한 모성성을 가졌다. 그런데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어둠’과 ‘내’가 ‘밤의 진흙’에서 친밀의식을 통과해야 만 공감할 수 있다고 한다. “밤의 진흙”과 같은 어두운 타자 얼굴의 계시를 보고 시인이 어떻게 “검은 혼례”를 치를 수 있을까? ‘검은 혼례’는 ‘죽음의 허무’와 ‘내적 침묵’으로 일관하는 견고한 화합체이다. 그런데 이는 레비나스에 의해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 ‘검은 혼례’는 ‘검은 진흙’ 얼굴이 언어 담론을 형성하고 있기에 그 자체가 계시라고 한다. 시인은 신적 계시를 통해 “빛의 벌판에 서 있는 너”와 친밀하게 된다. 인간 세계에서, ‘빛’은 신적 타자의 초월적 진리를 표현하므로 ‘너’와 ‘나’는 무한한 빛이 주는 생명력에 의해 서로 사랑하게 된다.
3. 사랑과 박애의 가족공동체
‘너’와 ‘나’는 만남을 통해 사랑의 결실을 보고 임신과 출산을 거쳐 가정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조정인 시인의 시에서 시인과 타자가 만나는 사랑의 흔적은 시인 안에 타자성을 근본으로 가지는 타자와 나의 관계에 있다. 대부분 시인은 타자윤리를 ‘남’과 ‘여’의 에로스적 관계로만 본다. 이에 비해 조정인의 시에서 타자성은 출산을 통해 자녀가 탄생하고 모성을 중심으로 가족공동체(「내 잠 속에 기숙하는 이」, 「개의 영혼을 보았다」)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시인은 가족공동체에서 더 확장해 민족공동체(「조선인」)의 형제애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정인 시인의 모성은 자녀를 통해 자신의 무한 미래를 구체화한다. 조정인 시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가족공동체 안에서 모성과 시인 간의 사랑으로 발전하며, ‘남’과 ‘여’라는 서로의 욕망을 고착화한 성애적 사랑이 주를 이루지는 않는다. 그런데 「거절된 꽃」에서는 부성이 자녀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우애의 가족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탈사랑에 의한 가족공동체 해체를 불러온다.
자정 지난 빈 거실, 당신은 여전히 티브이를 켜 둔 채 헝겊인형처럼
소파에 가라앉아 고개를 꾸벅이네, 어두운 드라마 어디쯤 출구를 찾아
한 세기 전으로 이어진 복도를 더듬으시나,
(…)
그이를 닦는 데 온밤을 다 썼네 남은 생의 양동이 물을 들이부어도
가시지 않을, 육친이라는 말의 비린내 진흙에 피를 이겨 쓴 한 줄 문장을
통과하는 캄캄한 시간 진흙은 아프고 피 섞인 진흙은 더 많이 아프네
엄마 어디 가시나, 스윽 스윽 가지 부러진 검은 사과나무를 끌며 여전히
귓속, 좁고 긴 복도를 지나 저만치 골목 입구에 기다리는
등 굽은 슬픔
-「진흙은 아프다」 일부분
무서워, 아버지, 아파, 거긴 벌서 무너졌어, 밟으면 허공이야
아버지, 내 어두운 아버지, 그곳에 발을 디디면 다시 뺄 수 없어……
세계의 마룻바닥엔 액체가 되어 흐르는 아이들 연일 새어 나가는
어린 숨 이제 막 발색을 시작한 옅은 하늘색 둥글고 말랑거리고
가볍고 머뭇머뭇 떠도는 어린 영혼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동동거리는 발아래 점점 형체를 띠는
(생략)
-「거절된 꽃」 일부분
조정인의 시에서는 ‘흙’과 ‘진흙’이라는 상징어가 가끔 출몰한다. ‘흙’의 상징은 “왼쪽 가슴에 애도의 소임을 갖고 태어나서”(「그날 상상할 수도 없이 먼 그곳의 날씨와 어린 익사자의 벌어진 입에 대한 서사 3. 꽃을 말하다」)공감을 통한 생명력의 기표로 드러나고, (「습(習」,「흙을 쥐고 걸었다」), ‘진흙’의 상징은 ‘죽음’과 ‘불안’을 받들고 끌어안는 ‘사랑’과 ‘박애’의 표상으로 드러난다(「진흙은 아프다」, 「새가 태어나는 장소」, 「조선인」 ). 위의 「진흙은 아프다」에서 가족공동체 중심에는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중심 대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와 시인의 관계는 ‘실존의 가능성’을 통해 관련성을 짓는 것 이상, 사랑으로 연결된 모녀관계의 윤리적 은유성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현 상태는 “어두운 드라마 어디쯤 출구를 찾아 한 세기 전으로 이어진 복도를 더듬”을 정도로 죽어가고 있다. 또한, 어머니는 “부러진 검은 사과나무를 끌며 여전히/ 귓속, 좁고 긴 복도를 지”나 여성성을 놓은 채 죽음에 근접해가고 있다. ‘동굴’, ‘귓속’, ‘복도’는 죽음의 통로와 연결되고, ‘부러진 검은 사과나무’는 죽어가는 여성성이라는 은유의 기표로 쓰인다. 죽음이 임박한 어머니를 보는 시인은 “남은 생의 양동이 물”을 들이붓고”, “진흙에 피를 이겨 쓴 한 줄 문장을” 통과할 정도로 캄캄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가족공동체 개념으로서 사랑을 보면, 어머니가 시인을 사랑하는 게 아닌, 역으로 시인이 죽어가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랑은 사랑의 곡진함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아래 「거절된 꽃」에서 조정인 시인은 폭력적인 가족공동체의 전체성을 보고 집안의 주체인 부성을 비판한다. 우애의 가족공동체에서 부성의 역할은 가족의 중심이며 모성과의 사랑을 통해 자녀를 출산하고 보호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거절된 꽃」에서의 부성은 자녀를 살해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녀를 관망하는 자세를 취한다. 이때 아버지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 얼굴의 계시가 시인에게 윤리적 책임으로 돌아온다. 아이가 “액체가 되어 흐르”고, “아이들의 숨이 가늘게 새어”나간다. 아이 죽음의 기표가 ‘액체’와 ‘새어나가는 숨’이다. 죽어가는 아이의 “머뭇머뭇 떠도는 영혼”의 계시성 역시 시인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폭력적인 부성은 “내 어두운 아버지”라고 아이가 말할 만큼 배타성을 띤다. 동시에 부성은 우애의 가족공동체를 파괴하고 해체한다.
조정인 시인의 시에서 사랑은 어머니의 죽음 과정을 통해 육적 사랑을 신성에 가깝게 끌어올리는 역사랑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폭력적인 가족공동체에 관한 시에서 박애는 부성의 비상호적인 배타성에 의해 파괴된 가족애를 그린다. 따라서 「진흙은 아프다」와 「거절된 꽃」을 통해 시인의 사랑과 박애는 절반의 실패로 마감한다. 하지만 시인은 가족공동체 사랑을 넘어 민족공동체 형제애를 보여주기도 한다. (「조선인」)
4. 박해 속의 대속
타자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박애는 누군가의 희생과 대속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과 얼마예요』에서 대속은 타자의 박해부터 얻어진다는 점에서 무게가 있다. 대부분 시인들의 시 주제는 인간의 부조리나 산업화의 폐해, 사이버 시대의 지식의 정체성 같은 것들을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에 비해 조정인 시인의 시 주제는 동물 타자와 뭇 타자들의 죽어가는 얼굴이 시인을 인질로 잡고 박해하는 무한 책임에 초점을 맞춘다. 이 박해는 죽어가는 타자의 모든 영광과 불행 그리고 파산까지 시인의 주체성과 대속을 단정 짓게 한다. 이 대속이 바로 타자에 대한 시인의 책임의식이다. 말하자면 대속이란 시인이 죽어가는 타자들의 영광과 벌까지도 대신 짐을 지고 책임을 떠맡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 대속이 시인의 무력한 수동성 너머에 위치한 죽어가는 타자의 행위와 결합한 수동성보다 더 깊은 수동성일 때 시인은 박해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맛보게 된다. 즉 자신의 죄 사함을 받게 된다. 따라서 대속의 또 다른 의미인 속죄는 타자를 대속하면서 받은 박해이며, 나의 자유 속에서 자신을 완전히 비웠을 때 얻게 되는 사실 그 자체이다.
아래 시는 동물 타자와 뭇 타자를 통해 ‘대가 없음’인 무한 대속을 행하는 조정인 시인의 윤리 책임의식이 드러난다.
개 한 마리 방향의 미열을 따라 길을 건넜을 것인데, 길 건너를 향해 막막한 걸음을 떼었을 것인데, 길 건너는 검은 미궁이 되고 있었다. 낭패로군, 녀석이 부서진 개의 둘레를 돌며 습관적으로 벌어진 상처를 핥다가 아직 온기가 남은 주검 속으로 들어가 비스듬히 눕는다. 모든 게 아늑하고 단출해졌다. 저의 가장 나중에 깃들어……
-「부서진 시간」 일부분
감은 눈 속으로 물이랑이 밀려든다. 물가에서 그는 그를 넘어선다. 확장된다. 마음의 발생이여, 이것은 누구의 돌연한 개입인가. 만장의,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산 자의 눈동자 속으로 뜨겁게 들어왔다. -나는 지금 네가 아프다. 그는 Y의 눈꺼풀을 느리게 감겼다. 아니, 그의 눈꺼풀을 쓸었다. 손바닥 가득 타인의 눈꺼풀이 들어왔다. 세계의 재배열이 이루어지는 느린 순간이었다.
-「Angel in us」 일부분
위 시들은 조정인 시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대속의 경험적, 비유적 사유가 들어 있다. 여기서 시인의 경험적 사실은 자신을 동물 타자로 투사해 죽어가는 타자의 계시성이 자신을 박해하는 인질에 대한 일이다. 인질은 “죽음의 커버를 그리는 일종의 꽃나무 인간들”(「폐허라는 찬란」)이고, “갈 건너 막막한 걸음을 떼다” 죽어버린 동식물 인간이다. 또 하나의 “비유적 사유” 속에는 시인 자신을 투사한 개의 대속이 상처를 핥고, “동굴 깊숙이 잠든 슬픔”(「그날 상상할 수 없이 먼 그곳의 날씨와 어린 익사자의 벌어진 입에 대한 서사」) 속으로 들어가 개의 죽음을 자신의 윤리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대속의 행위는 “온기가 남은 주검 속으로 들어가 비스듬히 눕는” 것이다. 살아 있는 개는 자신의 본질 의미를 넘어 삶이 죽음을 받든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행은 ‘비유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속은 죽어가는 타자의 눈빛이 자신을 인질로 삼고, 타자의 삶 속에서 벌과 파탄까지 받드는 수동성 중의 수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Angel in us」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속은 “만장의,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산 자의 눈동자 속으로 뜨겁게 들어”오는 데 있다. 이 시행에서 타자의 눈동자는 시인의 눈으로 들어오는 동화에 의해 죽어가는 자의 고통을 자신의 ‘대가 없음’으로써 대속의 책임을 지고 있다. 그렇게 동화된 자의 죽음은 시인의 심로를 거쳐 마침내 시인은 “나는 지금 네가 아프다”라고 손바닥으로 절규한다. 절규 이후 시인은 “손바닥 가득 타인의 눈꺼풀이” 들어온다. 여기서 ‘눈꺼풀’은 ‘떴다’와 ‘감았다’라는 행위를 통해 많은 의미를 지닌다. 이를테면 ‘떴다’는 것은 이성의 빛과 연관이 있으며, 사물을 보는 행위가 이성을 꿰뚫어 보는 신성을 지닐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는 의미다. 또한,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일을 끝내지 못하고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에 반해 ‘감았다’는 것은 지성이든 벌이든 세속의 일체를 비우고 죽었다는 의미다. 시인은 타자의 눈꺼풀을 손으로 쓸어주며 그의 벌과 파탄까지도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고 속죄한다. 이러한 행위는 죽은 자와 시인의 마음이 일체화되지 못했을 때 타자의 눈을 쓸어줄 수 없으며, 또한, “검은 꽃 한 송이를 먹일” 수도 없다. (「그날, 상상할 수도 없이 먼 그곳의 날씨와 어린 익사자의 벌어진 입에 대한 서사」)그리고 “검붉은 울음이 대지를 적시고 문턱을 넘어 인간의 잠 속으로 흘러”들 수도 없다. 그렇지 않았기에 시인은 타자의 눈을 손으로 감긴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잠 속에서 축생의 피 울음을 자신의 것으로 껴안을 수 있다.
시인의 대속은 잠이든, 현실이든 우주에 속해있는 타자들을 자신의 기억에서 불러내어 받드는 무한타자 책임이다. 이는 블랑쉬가 이 세상의 안정성은 내 삶이 부서질 때 그 자체의 상태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모든 타자의 죽음이 곧 내 삶의 박해로 돌아왔을 때 이를 끌어안거나 포괄한다는 것은 죽어가는 이의 행위 그 너머의 무력한 수동성을 받듦으로써 나는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기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정인 시인의 시는 타자의 죄업까지도 나의 책임으로 돌리는 숭고한 윤리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5. 타자윤리시학의 가치 발현
조정인 시인의 시편들은, 독자들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또는 타자윤리 쪽이든 어떤 면에서든 다 개방되어 있다. 특히 시집 속, 시의 많은 부분을 관류하는 타자윤리는 우리로 하여금 이성이나 합리성의 중심이 되는 주체 중심보다, 너, 이웃, 다수 타자까지 끌어안는 타자의 타자성이다. 여기에는 시인이 사랑과 박애와 대속에 관한 ‘시쓰기’ 특징을 내보이고 있다. 타자에 대한 사랑과 공감에 관한 표현들은 조정인 시인의 작품 속에서 숭고한 윤리의식으로 발현된다. 우리는 독자가 이점을 수용하기를 소망한다.
조정인의 타자윤리의 연원은 가톨릭 교의에 따라 신을 신뢰하고 동시에 시인 자신이 근원적인 타자성을 열망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타자에 대한 사랑은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현실에 참여하는 일이다. 거기서 고통스러운 타자얼굴이 드러내는 계시성에 따라 타자를 근접하게 되고 열망하기에 이른다. 「새가 태어난 장소」에서 시인은 “얼굴 없는 불안에 팔베개를 베어 주고 자장가를 불러준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보면, 시인 자신보다 타자를 더 사랑하고 공감하고 있다. (「습(習)」) 시에서의 공감은 관념과 구체적인 이미지의 동일화에 의한 윤리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윤리적 실천이라고 해서 모든 가족공동체가 우애나 선성으로 단합하는 것은 아니다. 시에서의 가족공동체의 우애의식은 아버지가 가족을 사랑하는 게 아닌 딸이 어머니를 보살피는 역사랑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거절된 꽃」에서는 폭력적인 부성 때문에 자녀가 죽는 해체된 가족공동체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시의 전체 프레임에서 보면, 가족공동체 사랑은 해체의식을 드러내는 데 반해 (「조선인」) 민족공동체의 형제애에서는 확장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확장된 시세계는 사랑보다 타인의 죄업을 짊어지는 대속이다. 이러한 사랑은 조정인 시인이 가톨리시즘에 천착한 사회적 윤리 책임과 시인 안에 내재된 본질적인 ‘타자윤리’ 책임이 합쳐지면서 ‘윤리적 시쓰기’로 나타났다. 타 시인들은 욕심내지 않은 형이상학적 시세계를 조정인 시인은 21년간이나 한 곳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녀의 타자윤리시학의 형설지공을 한국 시단이 외경심으로 맞이해야 할 이유다. *
-「타자얼굴이 보여주는 근원적 윤리-조정인 작품론」, 2020 가을호 『두레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