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 시험엔 수어통역 제공, 택시운전 자격시험에는 ‘미제공’
한국교통안전공단 “수어통역, 형평성 어긋날 수 있고 예산·시간 걸려”
장애계 “수어 편의제공 없어 불리한 결과 초래,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8일 오전 11시, 장추련 등은 인권위 앞에서 청각장애인 택시운전 자격시험에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한국교통안전공단과 국토교통부를 규탄하며 진정인과 함께 인권위에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진정인 이병도 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운전면허 자격증이 있는 청각장애인들이 택시운전면허 시험에서 정당한 편의를 제공받지 못해 공식 택시 운전 자격증을 따지 못하는 억울한 상황에 처했다. 이에 청각장애인들이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를 찾아가 한국교통안전공단과 국토교통부를 차별 진정했다.
8일 오전 11시,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등은 인권위 앞에서 청각장애인 택시운전 자격시험에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한국교통안전공단과 국토교통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진정인과 함께 인권위에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지난 2010년, 청각장애인은 대형·특수면허를 제외한 1종 면허 취득이 전면 허용됐다. 1993년 청력 데시벨을 기준으로 (장애등급제 폐지 전) 5급과 6급 청각장애인에게만 처음 일부 2종 면허가 허용된 지 17년 만이다. 청각장애인은 1종 면허 취득이 전면 허용됨에 따라 택시운전 면허도 취득할 수 있게 됐다.
자동차 운전면허 시험을 관리하는 한국도로교통공단은 청각장애인이나 비문해자를 위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운전면허 학과시험 문제 학습 콘텐츠를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며, PC 학과 시험에서 제공되는 수어 동영상과 ‘읽어주는 시험과정’을 사전에 체험해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운전면허 도로주행시험의 경우, 지난 2012년 음성으로만 제공되는 전자채점시스템을 도입하여 청각장애인 접근이 불가능하자, 이후 음성코스 안내를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안내시스템을 개발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 장애인 활동가들이 인권위 앞에서 청각장애인 택시운전 자격시험에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한국교통안전공단과 국토교통부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그러나 이와 반대로 현재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시행하는 택시운전자격시험에서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농인을 위한 정당한 편의가 전혀 제공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즉, 이미 운전면허 경력이 충분한 청각장애인이더라도, 택시운전자격시험에서는 자신에게 맞는 언어로 시험을 볼 수 없어 직업 선택에 제한을 받고 있다.
이로 인해 20년 이상 운전을 한 농인마저 시험에 번번이 떨어져, 5~20회까지 시험을 계속 응시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청각장애인들이 자격 취득 전 주어지는 3개월 임시 택시운전 자격으로 일하고 있으며, 정식으로 일을 하기 위한 자격시험 통과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이주언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는 “청각장애인 중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을 농인이라고 한다. 농인 진정인들은 운전면허를 딸 때 수어를 통해서 시험을 봤다.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는 진정인들은 특별한 사고 없이 운전을 잘하시며, 자부심을 느끼며 즐겁게 일하고 계신다”며 “그러나 택시운전 시험에서는 정당한 편의제공이 되지 않고 있다. 현재 진정인들은 임시면허로 운전 중이지만, 이 기간이 끝나면 택시 운전을 하지 못할까 봐 불안한 상황”이라며 인권위 진정 취지를 밝혔다.
이 사건의 진정인이자 택시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는 청각장애인 이병도 씨는 “다른 직장에서 일할 때는 사람들의 편견과 의사소통의 부재로 일을 그만두게 됐다. 그런데 택시 운전은 승객들과 의사소통할 수 있고 그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는데 큰 만족감이 있어 적성에 맞는 직업”이라며 “자격 시험에서 편의제공이 되지 않아 정식 면허를 갖지 못하고 있다. 3개월 임시 자격증이 만료되면 또 일을 그만두고 일자리를 구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진정인 측이 한국교통안전공단에 편의제공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물은 결과, ‘수어필기시험의 경우, 개발에 비용이 많이 소요되지만, 응시하는 청각장애인의 수가 적다. 수어통역사가 대동한다면 부정행위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교통안전공단 측은 8일, 비마이너와의 전화 통화에서 “국토교통부와 협의 중이지만, 예산과 시간이 걸려 당장 수어 편의제공을 시행할 수는 없다. 대신 시험 시간을 50% 더 제공하는 등 장애인복지법상 규정된 다른 편의제공 방식 도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부정행위에 대해서는 “수어통역사가 시험장에 들어가는 방식의 경우, 공단 직원이 수어를 모르기 때문에 부정행위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워 일반인(비장애인)과의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답했다.
이러한 한국교통안전공단의 입장에 대해 장추련 측은 “어느 시험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부정행위에 대한 관리·감독의 책임을 시험에 응시하는 장애인에게 전가하고, 장애인을 범죄자 취급하는 행위”라고 분노했다.
한국교통안전공단 측이 처음 문제를 제기 받은 건 약 1년 전인 지난 2020년 12월이다. 당시 공단은 택시운전자격시험에서의 청각장애인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는 민원을 국민신문고를 통해 받았지만,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을 한 뒤 지금까지 그 어떠한 편의제공도 하지 않고 있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 이가연
이처럼 형식적으로 청각장애인에게 택시운전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제한하지 않지만, 청각장애인에게 편의지원을 제공하지 않아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 차별 행위는 장애인차별금지법상 명백한 위법이다.
박김영희 장추련 상임대표는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지 13년이 지났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이 노동할 때에는 늘 권리를 말하기 전에 기회를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그러나 기회만 주어진다고 해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이라며 “택시기사가 되기 위해 자격을 취득하려 해도 여전히 정당한 편의가 제공되고 있지 않다. 장애유형과 정도에 따라 정당한 편의가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 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이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투쟁하면서 한국교통안전공사와 국토교통부가 어떻게 대처할 지 두고 보겠다”고 밝혔다.
이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