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야구를 TV로 처음 본 것은 1988년 어느 초가을입니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해태 포수 장채근이 좌중간 가르는 2루타를 치는 걸 봤습니다. 저 작고 빠른 공을 가느다란 방망이로 정확히 맞춰 그렇게 멀리 보내는 게 신기했고 "우와 저거 뭐지~"하는 마음에 집중해서 봤습니다. 그게 저의 첫 야구중계입니다.
[2] 그 시절 입시전쟁 치르는 대한민국의 중고딩들이 모두 그렇듯, 저 역시 TV로 야구를 보는 건 굉장히 눈치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엄마는 늘 제가 숙제(혹은 공부)하기를 원했으니까요. 그래서 당시 야구는 주말 오후나 집이 비었을때 잠깐씩 보던 오아시스 같은 유희였습니다.
그 갈증을 달래준 것은 라디오였습니다. 네이버 실시간 중계로 4개 구장 상황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요즘에야 [라디오로 야구 듣기]가 그저 7080시절 구시대 유물처럼 들리겠지요. 하지만 저는 2000년대 초반까지 라디오 중계를 들었습니다.
라디오가 재밌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리만 듣고 상상할 수 있거든요. 타구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주자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 않고 느껴야 합니다. 캐스터가 '우아~ 레프트 뒤로~' 하고 소리 지르면 그 짧은 순간 동안 그 타구가 홈런인지 아웃인지 알 수 없으니 심장이 터질 듯 쫄깃했습니다. '홈으로~ 슬라이딩~' 하는 멘트가 나올때면 아웃일지 세잎일지 가늠할 수 없어 긴장됐습니다. 다른 팀 응원하는 친구와 이어폰 한쪽씩 나눠끼고 들을때면 긴장은 두배가 되죠. 독서실에서도 그랬고, 친구네 집에서 공부한다고 뻥치고 침대에 누워 그 친구와 같이 중계를 들을때도 그랬습니다.
[3] 2002년 즈음부터는 [인터넷 문자중계]에 푹 빠졌습니다. 06WBC나 08베이징 시절부터 야구팬이 되신 분들은 문자중계를 잘 모르실거고, 그 이전부터 야구를 보셨던 분들은 아마 많이들 경험 하셨겠죠.
1구. 볼
2구. 파울
3구. 볼 (1루주자 김수연 도루로 2루 진루)
4구. 스트라이크
5구. 볼
6구. 파울
화면에 이렇게 한줄씩 찍힙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정말 심각한 덕후죠. 세시간 동안 저걸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재밌습니다. 가장 숨막히는 것은 어느 순간 '렉'이 걸릴때입니다. 야구장에서 뭔가 일이 터진겁니다. 병살타를 쳤거나 아니면 실책을 했거나 아무튼 무슨 일이 생겨서 문자중계 알바생이 입력할 내용이 많아진 겁니다. 그럴때는 라디오 중계에서 다음 상황을 상상하며 가슴이 쫄리듯 심장이 콩닥콩닥 뜁니다.
문자중계가 재밌었던 이유는 카페 채팅창에서 회원들이랑 수다 떨면서 봤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문자중계 응원방] 같은 게시판을 만들어 놓고 댓글로 응원멘트 달면서 놉니다. [아싸 안타~] 이런 댓글을 달면서 같이 보는거죠. 2003년 어느날인가는 한 경기에 응원댓글이 1천개가 달렸던 기억도 납니다.
[4] 2000년대 중후반부터 케이블에서 4구장 동시 생중계를 시작하고 네이버에서 실시간 중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문자중계니 라디오니 하는 것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서 뭘 하든 고화질 중계 화면을 볼 수 있는데 굳이 문자나 음성으로 상상하며 중계를 볼(?) 필요가 없죠. 요즘은 야구장 직관 중에도 DMB로 느린 화면 돌려보거나 다른 구장 중계를 볼 수 있는 시대니까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느팀 경기든 다 본방사수 할 수 있습니다.
야구를 가장 잘(?) 그리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분명히 지금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게 언제가 제일 재밌었냐고 물으면, 독서실에서 친구랑 몰래 라디오 듣던 시절이라고 답합니다. 보지 않고 상상하던 특유의 재미가 있었고, 먹고 사는 걱정 없이 그저 엄마 눈치만 보고 성적 떨어지는 걱정만 하면 됐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해서겠지요. 사람의 정서는 고등학교 시절에 멈춘다는데, 아마 제 기억 속의 야구 중계도 그런가 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중계보던 기억이 가장 많이 남아있습니까?
첫댓글 전 그래도 집에서 티비중계 보는게 가장 편하고 좋아요. 혼자이면 더 좋고, 치킨에 소주가 있으면 더더욱 좋고요. 경기 끝나면 바로 뻗기 ^^
05년부터 야구를 보았는데 거의 08년? 까지는 문자중계가 많지 않았나요
초5때 (91년)야구중계는 토 일 주말중계가 젤 보기 편했지만 재미는 금요일 밤이 최고였던 것 같아요. 그당시엔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야간경기 특유의 긴장감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경기가 7,8회로 가면서 점점 박진감넘쳐졌거든요.
"정규방송 관계로 여기서 중계 방송을 마칩니다" 이때부터 직관을 많이 가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문자중계 시절이 가장 몰입해서 봤던 시기인듯 합니다. 진짜 안타 문자 한줄에 열광하던 그런 시절이었으니..
고등학교때 야간자습시간에 라디오로 야구중계 듣곤했는데 ...
700서비스인가(?) 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때도 나름 재미있었는데.. 전화중계라고나 할까요~
ㅋㅋㅋ 저도요. 동감하네요.
한일 수퍼게임 이요.. 학교에서 몰래보던.. ㅎㅎ
하일성 허구연 김소식 주로 이분들 기억
케이비에스에서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해줬던 중계요.
8시30분되면 일일드라마한다고..7회정도 되면 항상 정규방송관계로..라는 맨트가 떴죠. 90년대 초반일겁니다. 이종범이 신인으로 유격수 였는데..해태유니폼이 너무 싫겠금 날라다니며 수비했어요
금요라이트라고 해서 금요일에 야간경기 중계를 해줬었죠..
라디오 중계라 추억이 새록새록...격하게 공감 ... 라디오중계 정말 손에 땀이 날정도로 긴장감도 있었던 기억이 ^^
고3때 야자시간에 전자사전으로 라디오켜서 들었더랬죠ㅋㅋ 영어듣기펼쳐놓고ㅋㅋ 대전경기 라디오중계는 한화한테 엄청 편파적이라 킼킼대다가 혼날뻔한적도 여러번
평화방송 원음방송 이런 생전 듣지도 않을 방송국 중계 청취 많이 했습니다 ㅋ
90년대는 라디오였죠. 정민철 9회등판. 이종범 끝내기 만루홈런이 티비방송이 아니었음에도 사람들 기억속에 많이 남는거보면 라디오의 그 긴장감은 어마어마하죠ㅋ
라디오 중계에 한표 던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