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싹바싹 입이 탓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은행 지하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것 같았다. 대원 한 명이
상황보고서를 들고왔다. 계엄군이 진압작전을 시작하려는데 도청에 쌓여있는 폭발물에 대하여 뇌관 연결여부를 확인하라는 지시였다. 뇌관은 연결되어
있었다. 시민대표들도 겁이나 우왕좌왕했다.
5월26일, 정보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위대 중 강경파가 철수하고 온건파의 조치로
폭약 전문가가 뇌관을 해체하는데 성공했다는 내용이었다. 숙련된 그도 몇 톤이나 되는 다이너마이트 뇌관을 연결하려면 엄청난 기술이 필요한데
학생들이 했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의아해 했다한다. 어쨌든 날라갈뻔한 도청이 살았다. 도청뿐이 아니라 광주가 살았다. 불과 10여 년 전의
상황이었다.
518 유족회는 영암 독천 생가에 살고있는 동석이네 집까지 찾아와 온 식구들을 괴롭혔다. 계엄군으로 시민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아버지 묘도 현충원에서 파헤쳐야 한다고 주변에서 술렁였다. 딸까지 일기장에 '아빠는 살인마' 라고 적은걸 아내가 보고
일러주었다.
■1990년 11월 해숙이가 소문으로 들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정의 기억 연대' 라는 시민단체에서 수요집회를 시작했다.
용수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용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정의감이 있고 나서기를 좋아했다. 연숙이의 위안부 생활을 다 알게된 용수는 '정의
기억 연대' 집회에 나갔다.
처음엔 친구 언니라고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나 정의연은 당사자가 필요했다. 시도도 해봤지만 연숙이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그때 처음 윤미향을 알았다. 두 손을 꼬옥 잡고 눈물을 흘렸다. 뱃지도 달 수 있고 미국 대통령도 만날 수 있다며
당사자가 되어보라고 권유했다.
솔깃해진 용수는 연숙이가 되었다. 그런데 윤미향 고년이 모든걸 망쳐놨다. 뱃지도 지가 먼저
차지했다. 돈도 커녕, 밥도 아끼며 30년 동안이나 젖가슴을 후벼 판 참 도둑년이다. 도둑질이 들킬까봐 마포쉼터 손소장도 기꺼이 죽이고도 남을
년이다. 의원이 좋긴 좋아 '살인의 추억'이 곳곳에 회칠되어 선명하게 있음에도 신문과 방송은 윤미향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쬐깐한 유튜브만 날뛸
뿐이다.
■옛적 단발머리 우리 엄니 얼굴이 소녀상 얼굴이다. 일제시대 사진관에서 연숙이모와 찍었을적 얼굴 그대로다. 그 얼굴이
윤미향의 돈벌이가 된 것을 몇 해 전 아버지 옆에 묻힌 엄니는 모른다. 동석이는 착잡한 심정으로 KTX를 탔다. 동작동 묘지를 가봐야
했다.
백선엽 장군의 수명을 재촉하려 저 문재인 놈들이 친일을 씨부리고 묻히기만 해봐라, 파묘를 하겠다며 총동원령이다. 미국도
존경하는 전쟁영웅을 죽이고 있어 부화가 치민대다 성묘도 할 겸 근심걱정 디딤돌을 그대로 딛고서 서울길에 올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저 천인공노할 놈들은 뻔뻔함의 극치로 미통당을 2중대로 부정선거 일축하고 이승만. 박정희 묘소까지 파내려 할것이다. 625 전사자
묘역을 오르는데 무척 숨이차다. 작년에 수술은 했지만 암이 임파선과 간에 퍼져 지금 손쓰지 않으면 얼마 못 산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귓전에
흘렸다.
"엄니, 용수이모가 저질러 부렀소. 윤미향 고년, 나쁜년이라고 기자회견 해부렀소. 그래도 아무 쓰잘데 없능가 싶소.
국회의원 됐응께 더 기고 날읍디다. 간첩출신 남편놈도 덩달아 기가살아 유경식당 지배인 태백산 깊은 산골 아지트로 끌고가 월북하라고 겁까지
줬답디다.
그리고 아부지, 518 폭동은 북한특수군 소행인줄 다 알지라우? 그란디 말입니다. 인자부터 그 말만 꺼내도 징역을
살린다니 나는 다 살었서라우. 암덩어리도 퍼졌다니 이나저나 죽게 생겼서라우.
그랑께 말인디 엄니, 그리고 아부지, 나 한번만
도와주시요잉? 아부지가 장롱간에 숨겨노신 권총으로 저놈들 쏴 죽이고 갈랑께 그때까지만 살게 해 주랑께라"
술잔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몇바퀴 돌리는데 인기척이 났다. 어머니였다. 하얀 소복입은 엄니가 참으로 예뻐보였다. 믿음직스런 아들을 내려다보는 해숙이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아버지도 그윽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2020년 6월 15일
이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