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번째 편지 - 조용한 Wow
지난주 월요편지에 대해 여러 분이 좋았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다시 한번 Wow를 떠올렸습니다. Wow는 어떤 순간이 예기치 않게 마음을 건드릴 때, 말보다 먼저 새어 나오는 짧은 감탄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자주 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삶이 조금 팍팍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Wow가 꼭 장엄한 자연이나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만 나오는 것일까요. 높은 산과 넓은 바다, 눈부신 노을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탄도 있지만,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다 마음속에서 조용히 번져 나오는 Wow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런 삶을 ‘숭고한 삶’이라 부르고 싶었습니다.
1세기경 한 그리스인이 쓴 『숭고함에 대하여(On the Sublime)』는 역사상 숭고함을 본격적으로 다룬 가장 오래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학 비평과 수사학의 관점에서 숭고함을 탐구한 책입니다.
저자는 숭고함에 이르는 중요한 요소로 고결한 인격을 꼽습니다.
"숭고함은 위대한 영혼의 메아리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당시 수사학이 중시하던 ‘어떻게 논리적으로 타인을 설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위대한 글과 말의 힘이 단순한 설득에 있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서두에서 '숭고함이란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벼락처럼 다가와 한 인간의 내면을 단숨에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숭고함은 글을 화려하게 쓰거나 논리적으로 사람을 설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영혼의 크기와 인격의 깊이, 삶의 태도가 어떤 순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그것을 숭고하다고 느낍니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위대한 문학과 웅변이 탄생하지 않는가?” 그의 답은 ‘도덕적 타락’이었습니다.
부와 쾌락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사람을 스스로의 욕망에 종속된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위대한 영혼의 메아리’가 울려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숭고함은 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였습니다. 어떤 글이 숭고한가를 묻는 일은, 결국 그 글 속에 어떤 영혼의 크기가 담겨 있는가를 묻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문학 속에서도 '숭고함'은 대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순간에 나타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한 무고한 사람이 자신으로 오인되어 종신형을 받게 되자,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법정에 나아가 “내가 장발장이다”이라고 고백합니다. 위고는 인간의 영혼을 “하늘보다 더 숭고한 광경”이라고 말했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시드니 칼튼은 사랑하는 여인의 남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자리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백합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은, 이제껏 해 온 어떤 일보다도 훨씬 더 숭고한 일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비참한 삶 속에서도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소냐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숭고한 고통 앞에 절하는 것이오."
이 장면들을 보면 작가들이 언제 ‘숭고함’이라는 말을 사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숭고함은 성공하고 인정받으며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극한의 순간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 할 때, 고통을 감당해야 할 때, 죽음과 파멸 앞에서도 신념과 사랑, 존엄을 놓지 않으려 할 때 인간의 모습 속에서 숭고함은 빛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숭고한 희생’, ‘숭고한 뜻’이라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쓰면서도, ‘숭고한 사람’, ‘숭고한 삶’이라는 말은 왜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숭고’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 때문일 것입니다. ‘숭고한 희생’이나 ‘숭고한 뜻’은 인생의 어느 한순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과 ‘삶’은 한순간이 아닙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이어지는 길고 복잡한 궤적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은 누구나 흔들립니다. 나약해질 때도 있고, 이기적일 때도 있습니다. 좋은 뜻을 품었다가도 어느 순간 무너지고, 다짐을 했다가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한 인간 전체를 향해 감히 “저 사람은 숭고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말 앞에서 우리는 조심스러워집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생애가 모두 지나간 뒤에는 조금 달라집니다. 우리는 “슈바이처 박사의 숭고한 삶”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아마 그것은 한 인간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깊은 찬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숭고한 삶은 위대한 인물에게만 허락되는 것일까요. 저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결점이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욕심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본능과 한계를 조금씩 넘어보려 애쓰는 데서 인간의 숭고함은 생겨납니다.
인간은 누구나 편하고 싶고, 손해 보고 싶지 않으며, 자신을 먼저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양심을 지키는 사람.
손해인 줄 알면서도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나의 이익을 조금 내려놓더라도 타인에게 다정함을 건네는 사람.
그런 순간 인간은 자연보다 더 크고 깊은 존재가 됩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찾아옵니다. 억울한 일도 있고, 질병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감당해야 하는 운명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 사람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고, 자신을 포기할 수도 있으며, 남을 탓하며 타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존엄을 지켜냅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놓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의 뒷모습은 우리 마음에 숭고함으로 남습니다.
생각해 보면 숭고한 삶은 거창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살아내는 것.
맡은 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고단한 순간에도 쉽게 타락하지 않는 것.
손해를 보더라도 지켜야 할 선을 지키고,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려 애쓰는 것.
어쩌면 그런 작은 선택들이 하나씩 쌓여 숭고한 삶이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저는 아름다운 풍경과 놀라운 경험 앞에서 터져 나오는 Wow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대자연 앞에서 외치는 큰 Wow와는 다른, 한 사람의 삶 앞에서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리는 Wow를 생각해 봅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삶, 묵묵히 견뎌온 삶, 고통 속에서도 선한 기준을 놓지 않은 삶을 바라볼 때 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하고 싶습니다.
"Wow, 저 삶은 참 숭고하구나."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6.5.19 조근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