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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비행장에 오면 다른 곳에 징용으로 끌려가지 않았습니다. 군수공장이기 때문에 교토부에 사는 처자식이 있는 조선인들은 전부 여기에 모였습니다. 나는 아내와 2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전시 중에 비행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남자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바보새끼', ‘이놈' 소리 들으며 일했던 선배들은 모두 죽었지만, 여기에는 그 자식과 손자들이 집을 짓고 일도 하고, 학교에 다니기도 합니다. 살기에 익숙해진 곳을 이제 와서 나가라고 해도 딴 데 갈 수가 없습니다” |
“여기 조선인이 살고 있는 토지는 누구도 살 사람이 없고 또 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아 그냥 이대로 이상한 가건물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펌프로 물을 끌어 올리지만 깊게 구멍을 뚫을 수 없어 물이 빨갛습니다. 실제로 우리집도 물이 빨갛고 기름도 떠 있었습니다. 아침엔 잠깐 퍼내고 붉은 기가 없어지고 나면 얼굴을 씻습니다. 그런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불만이라고 하면 우지시가 한 선을 그어서 방치해두는 그런 식의 정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만, 저로서는 정말 분합니다. 외국인이라도 해도 시민이니까 보통의 취급을 해주면 되는데도 타인의 토지니까 수도도 가스관도 묻어줄 수 없다고 하고 다른 아무 것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기 때문에 대단히 분개하며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토로에 처음 왔을 당시 주위는 풀이 더부룩하고 자갈투성이인 산이었습니다. 한바에 끌려왔습니다. 판자촌 공동 합숙소는 기둥과 삼목나무로 만든 벽과 지붕이 다 였습니다. 그 날 당장 적토를 반죽해서 아궁이를 두 개 만들어서 취사장으로 했습니다. 합숙소의 방은 가족 수에 상관없이 한 가족마다 할당되었습니다. 3평 정도의 짚이 깔린 방이었습니다. 천정도 없었고 지붕을 엮은 삼목나무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버렸습니다. 밤에는 별이 보였습니다. 비가 너무 세게 오는 날이면 대야를 받쳐놓고 아기들이 비에 젖지 않도록 이리 눕히고 저리 눕히고…. 합숙소는 집이 아닙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조선인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왜 지금에 와서 나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토로에 일본 사람이 반 정도만 살았었더라도 이런 짓은 못할 것입니다. 고국에서 쫓겨나와 걸레처럼 일을 시켜왔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방치되어 왔는데, 이제는 지금 살고 있는 토지를 빼앗으려 하고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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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6살 때 대구에서 강제연행 당했습니다. 후쿠오카현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어요. 뭐든지 예, 예하고 따라야했지요. 일본인이 조선인 집에 와서 ‘이 토지 사겠다' 하면 싼 값에라도 팔아야만 했습니다. 논밭이 없어서 먹을 게 없어지고. 큰 토지, 비옥한 토지는 모두 일본인한테 빼앗겼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저는 먼저 처자를 대구 친척 집에 보냈습니다. 여기에 일들을 정리하고 바로 귀국하려고 했는데, 결국 가지 못하고 남게 되었습니다” “토지문제를 알았을 때, 설마하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동포끼리 모여 서로 도와가며 살아 왔는데…. 나이가 들어 앞으로 얼마나 살지 모르겠지만, 우토로에서 안정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남자는 비행장 건설 현장에서 일했습니다. 삽으로 흙을 파서 트럭에 싣고 여자는 대나무 숲에서 푸른 대나무를 가져와 몇 십대나 되는 ‘고추잠자리(아카톰보)'라는 비행기의 붉은 색깔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렸습니다. 공습이 울리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죽는다면 집에서 죽자고 모두가 이야기 했습니다” “처음에 우토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불편하고 지저분하다고 하지만 옛날에 비하면 극락입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하나둘 거의 밖으로 이사를 나갔습니다. 우토로는 지금 대다수가 노인들입니다. 노인들은 강제 퇴거가 집행되면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 |
“전쟁 당시, 일본군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로 싸웠습니다. 편리할 때는 쓰다가 막상 우리가 토지에서 쫓겨나도록 되어도 일본 정부는 아무것도 해주질 않습니다. 교토부도 우지시도 아무런 상담에 응해주질 않습니다. 밤에 자고 있노라면 분노로 가슴이 떨리는 일도 있습니다. 우토로는 고향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토로에 남고 싶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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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편은 쇳조각 회수업을 했는데, 남은 물건을 팔기도 하고 도로의 아스팔트 깔기, 도로 옆 도랑 공사 등을 했습니다. 매일매일 다섯 명의 아이들을 어떻게 먹여 살릴까 365일 중에 300일은 울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괴로울 때에는 이사람 저사람이 ‘뭐 부족한 것은 없나' ‘술이라도 마시러 와요'라고 격려해주었습니다. 우토로는 정말 좋은 곳입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반반씩만 살았더라도 이런 토지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조선인만 살고 있기 때문에 차별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선조의 발자취를 헛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한 싸울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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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주민에게 불하하게 됐다고 몇 년 전에 들었습니다. 소문인지 누가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수도가 부설되어서 그 얘기는 정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토지는 부동산회사에 팔려졌습니다. 곧 주민 집회를 열었지만,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소송을 걸어와 전쟁 전부터 있던 사람까지 나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은 남편은 단결해서 우토로를 지켜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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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집은 저쪽이야'라고 말하며 우토로가 아닌 일본인이 사는 쪽을 가르키기도 했습니다. 금방 탄로날 거짓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담임 선생님은 아주 좋은 분이었습니다. 면접 시험에 두 번이나 같이 가주셨습니다. 하지만 두 번 다 취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는 역시 조선인은 채용해주지 않는구나 하고 도리가 없다고 단념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양이와 쥐가 서로 뒤쫓는 듯한 그런 가건물의 집이었습니다. 남편은 찌그런진 집에서 시작해 낮이고 밤이고 일하여 덤프트럭을 사서 건설일을 조금씩 넓혀갔습니다. 여섯명의 자식을 키우며 11년 전에 지금의 집으로 고쳤습니다. 얼마 전에 수도가 부설되어 겨우 여기서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좋아할 때 토지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우토로 밖에서 사는 것은 상상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여기서 안심하며 계속 살고 싶습니다” |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은 우토로는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전혀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부 아는 사람이고, 동료이니까요. 여기는 조선인들의 생명의 토지입니다. 모두 함께 고생해 왔기 때문에 우토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쫓아내려고 하는 업자의 불도저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 |
“내가 우리 나이로 4살 때 23살이었던 아버지가 혼자서 일본에 갔습니다. 자신의 토지가 없어서 농사를 할 수 없고 돈이 없어 생활할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일본에 갔다고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17살 때 아버지가 돌아와 저와 남동생을 데리고 갔습니다. 말도 모르고 일자리도 없어 낡은 천을 모아서 기저귀나 걸레로 만들어 팔기도 하고 막일 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먹을 거라고는 배급으로 비료에 쓰이는 깻묵과 작은 감자 등으로 우동이나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우토로에서는 밥이 많이 있으니?, 푸성귀가 많이 있으니까 같이 먹자고 해서 자주 모였습니다. 밤 늦게 돌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서로 끼니 걱정을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도왔기 때문에 지금 모두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 |
“조선이 독립되어 ‘자 돌아가자'는 기분이었습니다. 우토로에서도 전쟁 후부터 반년 사이에 150세대 였던 것이 5, 60세대로 줄었습니다. 돌아갈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병으로 오래 자리에 눕고 돈도 그리 간단히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귀국한 어머니 친척에게서 일도, 먹을 것도 없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 뒤로는 우토로에 남아 먹기 위해 일만 했습니다.” “일본을 위해 비행장을 만든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도 정부나 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닛산자동차와 부동산회사에 한층 더 강하게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 |
“건설공사 관계로 알게 된 일본인도 어떻게 토지를 싸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걱정을 해줍니다. 마음은 대단히 고맙지만, 우토로 운동은 토지를 싸게 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닛산을 교섭 테이블에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기에다가 일본정부를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입니다. 그것이 우토로에서 사망한 사람이나 전국에서 전후보상 문제에 관계되는 재일조선인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출처 : 우토로국제대책회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