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공손축(公孫丑)장을 읽어보면 인간이라면 어떤 마음을 지녀야 인간일 수 있는가에 대한 깊고 넓은 철학적 인간론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맹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사람은 모두 남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지녔다(人皆有不忍人之心)”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평범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면밀하게 따져보면 인간이란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는가를 참으로 명료하게 설명해주는 말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맹자는 차마 지녀서는 안 될 마음을 버리고 천성적으로 지닌 네 종류의 마음을 확충해서 행동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렇게 관찰해보면, 측은한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요, 수오의 마음(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모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端)이라 하여, 동양철학의 중요한 명제인 ‘사단(四端)’에 대한 학설을 창안해냈습니다. 여기의 ‘사단’에 칠정(七情)까지 합하여 ‘사단칠정’에 대한 사상은 성리학의 대명제가 되어 특히 조선 5백년 역사에서 논쟁의 한복판에 자리하면서 성리학의 발전을 이끌어왔습니다.
다산의 『맹자요의(孟子要義)』라는 저서는 주자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자들의 견해와는 분명하게 다른 학설을 주장하여 다산경학의 체계를 새롭게 세웠는데, ‘사단’의 단(端)이라는 글자의 의미에서 주자와는 다른 해석을 내리면서 주자학의 이론과는 다른 다산학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주자는 ‘단’이 ‘서(緖)’ 즉 실마리라는 뜻으로 ‘인의예지’는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치[在心之理]”로 해석하였지만, 다산은 ‘단’이 ‘서’가 아니라 ‘시초[初]’라고 해석하여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은 ‘인의예지’의 시초이기 때문에 그대로는 덕(德)이 될 수 없고 그러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인의예지라는 덕이 완성될 수 있다는 ‘행동철학’을 주장하였습니다.
“인의예지란 이름은 일로 행한 뒤라야 완성되므로, 남을 사랑한 이후에야 인이라 이르고, 남을 사랑하기 이전에는 인이란 이름은 존립이 안 된다. 나를 착하게 한 이후에야 의(義)라 이르게 되지 나를 착하게 하기 이전에 의라는 이름도 존립하지 못한다(仁義禮智之名 成於行事之後 故愛人而後 謂之仁, 愛人之先 仁之名未立也 善我而後 謂之義 善我之先 義之名未立也)”라고 말하여 남을 아껴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행위로 실천하여야 인이라는 명칭이 성립되고,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생각 때문에 자기를 착한 행위로 옮겨주어야 의라는 명칭이 제 뜻을 발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중앙일보 배명복칼럼(2015.5.26일자)을 읽어보면 맹자와 다산의 사단에 대한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여, 오늘의 한국 사회는 ‘염치’를 잃고, 아무리 막된 일을 하고 막된 말을 해놓고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은 없어진 나라임을 통탄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고관대작들, 국가와 사회의 지도자들, 이런 지경에 이른 이 나라, 맹자나 다산은 무어라고 말할까요. 철면피에 후안무치의 사람들만 출세하여 잘 나가는 세상이 두려울 뿐입니다. ‘수오지심’이라는 단어는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나봅니다.
박석무 드림
양심 지키기
위대한 공적을 뽐내고,
훌륭한 문장을 자랑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아닌 외물(外物)에 기대는 것일 뿐.
마음의 본체는 본디 밝으니
만약 그 본 모습을 잃지 않는다면
특별한 공적이 없더라도
글자 한 자 모르더라도
떳떳하게 살 수 있음을
사람들은 왜 알지 못하는가?
비록 배운 것이 부족하고 가진 재산이 없더라도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평화로운 세상이며 민주화 된 세상입니다. 재산 많이 가진 자들과 권력 쥔 자들이 마음대로 하는 것은 곧 독재입니다. 그 권력으로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언론을 막고 비판적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합니다.
♤사진출처:연지해회/2005년8월16일 중국 남해 관음해상에 나투신 아미타부처
♤율: 나무아미타불성호(화악판華樂版,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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