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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 1/4)
1. 저의 시조 휘(諱)를 후손인 제가 “류차달”하는 것은 불효이고 김선궁(金宣弓)도 大丞公이지만 선산김씨들은 諡號인 順忠公이라 하고 있으나 그래도 일부에서는 김선궁을 대승공이라 하기에 대승공 보다는 감히 휘(諱)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는 1/4∼4/4까지 인데 “뿌리깊은버드나무”카페에 초안을 공개하여 댓글을 받고 문헌을 확인하여 수정보완하였으나 1/4의 내용이 2/4에서 증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1/4은 문화류씨족보에서 태조를 지원한 내용과 배경을 위주로 했고 2/4는 1/4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며 3/4은 서남해안 전투에서 군량미를 제공한 내용이며 4/4는 대승공 사우입니다. 3. 제가 발표한 글에서 처음에는 참고문헌이나 그 단어 설명의 각주를 그 페이지 끝이나 논문 끝에 달았는데 제글을 읽는 대부분 종원들꺼서 각주자체를 이해를 못하고 있어(페이지 아래 써놓은 글이 무슨 말이냐 등) 각주를 문장 중간에 넣게 되었으니 양해 바랍니다. 4. 제가 어렸을 때 영암 모산 어른들(그 어른들도 윗대어른들에게서 들었던)로 부터 들은 구전 내용을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990년대는 이곳 시립이나 대학 도서관과 관련 신간서적을 구입(한줄의 대승공, 흥률사 글 때문에 책을 사기도 했음)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한자 한 글자를 옥편에서 찾다 못 찾아(한자를 정자가 아닌 약자를 자기필체로 흘려 쓴 한자) 한자를 잘하신 분을 찾아간 경험이 있고 타문족보를 복사해 와서 대조하다가 2010년대는 인터넷으로 모르는 한자도 찾고 조선왕조실록도 볼 수 있어 과거 조선조에 선조들이 고위관리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를 검색할 수 있어 조사한 자료를 정리 하였습니다. 5. 지금은 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구전이 대부분 사실이지만 하정공후손과 관련 내용이 많아 이번 대승공 자료에는 하정공 자료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6. 대승공에 관련 자료를 그동안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면서 완성된 글이 아니기에 의견을 주고 다음에 완성되면 글을 올리겠다고 했는데 미완성 대승공 관련 글을 퍼 나르기하여 자기 성씨 홍보 자료로 문화류씨에서 이런 글이 있다라고 인용하신 분은 이번 대승공 시리즈를 참고 하십시오. 그러나 전에 올린 대승공 자료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글인데 이번 씨리즈에는 전에 글에서 많은 부분을 줄였기에 소소한 글에는 전번 대승공 글이 참고 될 것입니다. 7.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 1/4”은 2019년 문화류씨 유주춘추에 투고한 글이며 2/4 3/4 4/4는 추후 유주춘추에 투고할 예정이지만 유주춘추를 매년 1,500부를 발행하는데 문화류씨가 2008년 무자보 수단에 317,846명이였고 2010년 인구통계에서 문화류씨는 류씨 90,313명+문화유씨 237,314명=문화 柳씨 합계 327,627명으로 대부분 柳씨가 유주춘추를 볼 수 없고 여자분들도 친정에 관심 있으신분은 각종 柳 씨 카페나 밴드에 활동하시기에 이번에 1/4, 2/4, 3/4, 4/4를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고 대종회홈페이지에도 올리겠습니다. |
先蹟探究
무자보의 대승공 탐구
하정공파광주종친회장
대승공33세 류재균
1. 서론
문화류씨 족보 영락보(1424년 발행)부터 무자보(2008년 발행)에 이르는 동안 문화류씨 시조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일부종원들은 대승공 아버지 이름(諱)이 확인 되지 않는 현실을 “아버지가 없다”라는 말로 문화류씨 시조를 비하하는 일부종원이 있어 대동보인 무자보에 기록된 류차달 家門과 왕건 (이하 선조 존칭 생략함)관련 자료를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한번 상기(想起)해 봅니다.
(무자보 1권 자손록 1쪽)
대승공 공적은 태조가 정남(토벌)시 수레와 군량 지원으로 대승 삼한벽상공신이 되셨다는 기록된 사실인데 무자보 편집위원들이 고심하신 부분은 대승공 행적은 고려개국공신 명단에 기록되어 있기에 공적보다는 정사보(1803년)부터 일휘 해, 자는 응통, 호는 아사라 한 것과 병인보(1926년)에부터 대승공 배우자를 신라 김알지 후손 균의 딸이라 하여 정사보 이전 족보인 가정보(1565) 기사보(1689) 경신보(1742) 을유보(1765)에는 대승공 다른 이름, 자, 호, 배우자 기록이 없는 곳을 해당년도의 족보를 보라(見)고 표기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대승공이 어느해 정남시부터 왕건과 관련이 있었는가하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문화류씨 구전자료를 문헌상에서 확인하려고 수년동안 고서와 신간 학술 서적과 해당종중 족보 확인차 종중을 방문하여 비문을 확인하고 남도지방 역사학회 학술발표에 참여한 학술지를 정리한 대승공 관련 자료입니다.
류차달이 왕건에게 수레와 군량미를 제공해서 고려 개국2등공신이 되셨는데 군웅활거 시대에 왕이 아닌 태봉국 궁예왕의 수 많은 장수중에 일개 장수에게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많은 재물을 조건 없이 지원 했는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과정입니다.
世宗實錄地理志 文化縣 편에 柳씨는 來姓(이주한 성씨)이라고 되어 있어 류차달선조(父, 祖父)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여 儒州로 왔고 유주가 류차달 8대손이며 고려 고종 최씨무인정권기 때 류경 위사공신의 공으로 문화현으로 승격되였고 고려 초부터 문화 지역의 토착 세력인데 대승공 선조(父, 祖父)는 황해도 어디에서 무역을 하여 부를 축적했는지 유주로 온 기록이 없으나 류차달을 고구려 후손으로 봅니다.
그러나 흥률사 중수 상량문에 류차달家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류차달 시대 해상호족으로 왕건을 도와준 호족중에 왕건이 나주침략에 나설 때 첫째장인 류천궁은 선박수리소에서 군함과 가병의 군사를 지원을 하였고 왕건 둘째장인 오다련은 적군(당시 왕건은 적국 장수임)에게 군사 침투로 안내할 인적자원을 제공한 해상 호족들은 왕건 할아버지 작제건 신혜왕후류천궁할아버지 류차달할아버지 등의 사해형제동맹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 해상 호족들은 장보고 이후 君子는 血肉의 親형제만을 兄弟라 하지 않고 敬과 禮로 맺어진 四海同胞를 모두 형제로 생각하라는 논어 구절에 나오는 형제동맹을 맺어 장보고 이후에 스스로 해상호족끼리 뭉치고 함께 해적소탕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형제동맹(司馬牛 四海兄弟)은 論語 顔淵篇에 나온 문구이고 문화류씨무자보 총목 113쪽 흥률사 중수 樑上所記書(상량하는 곳에서 기록한 글 : 상량문)에 “훌륭한 禪道場으로서 삼한의 보소가 될 뿐만 아니라 사해황제의 一區福地(하나의 상서로운 지역)가 되었다”에서 나온 四海兄弟同盟입니다. 고려왕조 개창의 사상적 기반인 선도장인 흥률사가 세워진 것이 805년이며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이 도의선사(헌덕왕13, 821년귀국)에게 절터를 잡으라 했고 망궁하불 제자들(輩)이 흥률사터에 절을 짓고 승려들이 모이니 선도장이 되고 사해황제(호족)의 복지로 이들이 흥률사에서 자주 모여 서로를 바다의 황제라 칭했고 사해황제(할아버지들 모임)가 흥률사를 떠나고 수백년후에 나타난 신인(류차달)이 의자에 졸고 있었는데 청의동자가 왕장군에게 군량이 떨어졌다는 꿈을 꾸었다는 것은 846년 장보고가 피살되고 851년 청해진을 해체된 후
에 장보고를 대신해서 해적으로 부터 보호해줄 사해형제동맹에 류차달 할아버
지가 계셨다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神人이 류차달이라는 것은 1352년(공민왕5) 법원선사가 흥률사를 중창하고 개조할 때 신인을 류차달이라 상량문에 기록합니다.
(무자보 총목 113쪽)
(무자보 총목 114쪽)
그리고 군인이나 장군이 아니면서 고려 개국공신인 호족은 류차달 이도 윤신달입니다. 윤신달은 왕건에게 군왕의 도리를 조언했고 이도는 금강에 홍수가 났을 때 배를 제공했다는데 류차달은 군량을 지원합니다.
그러나 전의이씽화 파평윤씨는 응양군대장군과 윤장군을 잉어거 구해 주었다고 장군이라 하지만 문허ㅏ류씨는 류차달을 장군이라 하지 않습니다.
왕건은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이 나오지만 류차달 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지 아버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2. 대승공 아버지와 할아버지
“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박은봉저, 책과함께출판사, 2007)에 의하면 왕건은 원래부터 성씨가 없었던 집안으로 할아버지는 작제건 아버지는 용건인데 도선국사가 용건에게 천하를 얻으려면 아들 이름을 왕건으로 하라는 말을 듣고 성씨를 왕씨로 바꾸었으니 왕건家 성씨는 작씨→용씨→왕씨(王家 : 개성왕씨)로 바꾸어집니다.
아자개 아들 견훤은 성씨가 아씨→견씨로 바꾸어지고 백옥삼→배현경(경주배씨시조) 김행→권행(안동권씨시조) 삼능산→신숭겸(평산신씨시조) 지중익→어중익(충주어씨시조) 등 왕족이나 호족들의 성씨가 당대에 바꾸어지는 경우가 후삼국시대 사회상입니다.
특별하게 토반 전주류씨 류방헌 묘지명에 의하면 류기후(신라각간, 증조)→류법반(후백제 우장군, 조부)→류윤겸(대감, 부)으로 이어지는 성씨도 있으나 선조 이름이 4대를 넘지 못하던 시대에 류차달 아버지는 류씨인지 다른 성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정주 류천궁은 왕건이 나주로 출전할 때 군함과 가병군사를 지원하고 류차달은 막대한 경제적 부담(군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주포구를 중심으로 서해안 무역에 종사하면서 형제의 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정청주, 신라말 고려초 호족연구, 일조각, 1996년)
왕건 가문은 강호경→강충→강보육→강보육 딸 진의(증조모)+당 선종→작제건→용건→왕건으로 이어졌고(정인지편저, 고려사세계) 궁예의 강씨황후 가문은 강호경→강충→강보전→강순산→강만루→강연창→강씨황후(궁예부인)로 이어집니다(신천강씨대종회 자료).
조선 태조가 1392년 정도전 등에게 명하여 1395년(태조 4)에 고려 태조부터 마지막 공양왕까지 37권의 고려사를 편찬한후 정종 태종 세종 문종대에 까지 개수하도록 하여 1454년(단종 2년)에 고려사 간행에 착수 할 때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어 왕건 선조를 연구조사하였는데 강보육 국조원덕대왕 추존이 잘 못이다 작제건 용건 왕건 3대가 이름에 건자가 들어간 것이 잘 못이다는 이제헌의 비평을 받지만 4대 이상 선조를 알 수 없는데 일개 호족인 류차달가문을 누가 연구해주어서 황제부터 류차달까지 115세(대) 까지 세계를 안다는 것은 허구입니다.
고려사에 의한 왕건의 4대는 왕건이 왕이 된 후 추존한 국조원덕대왕(손호술) 의조경강대왕(작제건) 세조위무대왕(용건) 태조(왕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입니다.
일부 말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류차달 출생년도를 880년으로 추정하는데 류차달을 비롯하여 류천궁이 왕건(877~943)을 처음 지원한 시기가 금성(나주)전투가 있던 903년입니다.
이때 류차달 나이 23살 정도이며 고려건국 918년에 38살입니다. 그래서 류차달아버지 조언이 있었기에 용건 아들 왕건을 지원했다는 설이 정설입니다.
이홍직(국사대사전, 백만사, 1975)에 의하면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은 청년시절에 당나라로 건너가서 장사를 하여 많은 재산을 모으고 송악에 돌아온 작제건은 많은 땅을 사들이고 평주 지방의 세력가인 각간 두은점의 딸과 결혼했고 용건은 그의 맏아들이었는데 용건 부인은 한씨이고 용건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 송악군을 궁예에게 바치고 천하를 얻을 대인이 나온다는 도선의 말을 믿고 왕건 만들기에 실행으로 궁예를 찾아가게 됩니다.
용건이 궁예에게 가서 금성태수가 되고 발어참성 성주로 왕건(877~943)을 요청하였고 903년 궁예장수로 나주 출전할 때 왕건은 26살입니다.
왕건이 궁예 장수로 903년 금성(나주)에 침투하여 10여개현을 접수하지만 견훤이 모르는 왕건의 일방적인 점령이었고 후백제 견훤과 909년 염해현 전투에서 처음으로 직접 전투를 하였으며 918년 고려 개국하여 태조왕이 됩니다.
왕건이 왕이 되기 15년전부터 왕건을 지원한 이름이 류차달인데 以車爲達 또는 車運達糧로 차달이란 이름을 왕건이 하사했다면 류차달은 이름 없는 상태로 왕건을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되기에 류차달 이름을 왕건이 하사(賜名)한 것이 아닙니다.
무역중심지 황해도 호족으로 염주 유긍순, 신천 강씨, 정주 류천궁, 황주 황보씨(황주군)신정황후, 류차달家, 작제건을 위해 예성강 하구지역에 영안성과 궁실을 지을 정도로 세력가인 백주(황해도 연안)의 유상희등이 있는데 904년에 궁예에게 항복한 연백지역 유긍순을 제외하고 신천군 왕건 외고조인 강씨(강효경) 해상세력으로 부와 무력을 축적하여 유주로 온 류차달 할아버지 등이 해상세력(형제동맹이 4명에서 동맹원이 늘어 남)을 만들어 부와 무력을 축적하여 송악으로 온 작제건 손자인 왕건을 도와주게 됩니다.
3. 왕건의 고려 건국전 전쟁과 대승공 지원
견훤이 889년 서남해에 방수군을 파견하고 892년 무진주(光州) 입성후에 장보고를 죽인 신라 장수인 견훤을 형제라 할 수 없다는 서남해안 호족들 반대로 9년후 900년에 전주로 가서 후백제 건국을 공포합니다.
901년 견훤이 신라 대야성(합천) 공격후 돌아오는 길에 서남해 호족들 저항으로 9년간 백제건국을 방해한 분풀이로 나주에 가서 약탈합니다.(강복룡, 서남해지역에서 벌인 완건과 견훤의 쟁패, 목포대교수)
류차달이 왕건을 지원하게된 원인이 846년 신라에서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제거한 후 해적 소탕을 위해 王建家 柳車達家 柳天弓家 등 四海兄弟同盟을 맺고 이들 도움으로 나주 전투에서 왕건이 태봉 장수로 903년(1차) 910년(2차) 914년(3차)에 왕건이 나주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해상 호족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고 대표적인 호족은 나주오씨 영암최씨 영광전씨 등이며 맹자 민본사상 서남지역에 전파한 백계산 옥룡사 도선국사와 제자인 곡성 대안사(태안사) 광자대사 윤다 등입니다.(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왕건이 궁예의 군사 지원 없이 903년 주사(舟師=해군)를 이끌고 목포 경계 해안 상륙하여 금성(나주) 10여 개 군현 점령했고 909년 왕건과 견훤 첫 격돌 왕건이 해군을 이끌고 염해현(무안 해제면)에 상륙하여 중국 오월(吳越)에 파견한 후백제 사신선 나포하며 진도군과 고이도 점령하고 912년 왕건 서남해 공략에 나섰을 때 견훤은 전함을 목포에서 덕진포 배치하였으나 왕건이 바람을 이용한 화공책으로 완승했고 912년 덕진포(전남영암군 덕진면)대전에서 왕건은 나주는 쉽게 토벌했으나 영암을 토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당시 왕건은 궁예가 하사한 용천검이 오랜 전투 탓에 칼이 몹시 무디어졌고 영암 지역을 토벌하는 데 고전하자 왕건 부인(오다련 딸)이 매일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고 어느 날 기도를 하다 보니 발밑에 숫돌이 하나 놓여 있었고 부인은 그 숫돌에 용천검을 갈아서 왕건에게 건네주었는데 다음 날 왕건은 전투에서 대승하였습니다. 그 후로 이 지역(영암 신북 여석산)의 숫돌이 좋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수년간 숫돌을 무한량 파내니 그곳에 못이 생겼고 그 깊이가 무한정 깊어져 중국까지 수출하게 되었습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
918년 왕건이 고려 개국하기전 까지 903년 909년 910년 912년 914년 큰 전투에 류천궁은 군선과 병사를 류차달은 군량미를 제공합니다
4. 왕건의 고려 건국후 전쟁과 대승공 지원
919년 왕건(태조) 고려 수도 개경으로 이전한 후에도 18년간 10여회 이상 지금까지는 서남해 전투였다면 견훤과 경상지역에서 전쟁을 합니다.
920년 신라 구원요청에 고려가 응함으로서 고려 건국후 후백제와의 첫 군사적 대립인데 대야성(陜川)과 구사군(창원지역)을 견훤에게 패배하고 924년 제1차 조물성 전투에서 曹物郡(안동 구미 김천 의성 지역) 패배하고 925년 제2차 조물성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패배하였고 927년 견훤은 근품성(尙州) 고울부(永川)를 습격하고 경주로 진격해 신라경애왕을 죽이고 왕의 족제 김부를 세워 왕(敬順王)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이 군사 5천명을 이끌고 공산에서 견훤과 결전했으나 크게 패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은 왕건은 겨우 달아나 위기를 모면합니다.
928년 제3차 조물성 전투로 청주에서 고려가 승리하고 929년 태조는 백제 대야성을 함락하고 929년 7월과 12월에 견훤은 고창 전투에서 류차달 류천궁에 우호적인 고창호족들 도움으로 승리하고 934년 운주(홍성) 전투에서 견훤이 대패하면서 후백제의 전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935년 신라가 멸망(경순왕 고려에 항복)하고 936년(태조 19)에 지금의 경북 구미 지방에서 고려와 후백제 일리천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됩니다. 후백제 멸망하고 신검이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하여 936년 견훤이 왕건에 투항합니다.
5. 류차달 고려 개국공신과 대승공 사우
① 고려 개국공신
“한국의 역사 한국사(조선사연구회엮, 한울, 1988)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삼국시대 상황은 수십만 단위의 병력이 움직이는 전쟁이었는데 후삼국 시대의 전쟁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고려와 후백제의 전면전도 동원된 양 측의 병력이 고작 수천인 경우가 다반사이며 일리천 전투에서 처음으로 만명 단위로 병력이 동원됩니다.
왕건은 고려 개국하고 개국공신을 선정하면서 혼인정책에 의한 29명의 호족은 공신에 배제하였고 궁예를 몰아낸 장수 5명(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은 1등공신으로 하고 호족과 장수들인 2등공신 12명 가운데 경제적 지원을 해준 공신은 류차달 뿐입니다.
② 대동사 대승공사우
문화현에 대승 류차달 서원을 정미년(영조3년,1727) 윤3월에 유생 류이항(柳以恒, 대승공24세 하정공후 효행록)이 주도하여 창건하여 문간공 류공권을 배향한다고 황해도 관찰사 이집(李潗) 문화현령 이태익(李泰榏)이 장계를 올렸는데 1714년(숙종 40) 이후 창건된 향현사(鄕賢祠) 영당(影堂) 생사당(生祠堂)을 모두 철훼하라는 명령을 영조17년(1741) 내렸습니다.
유현을 제외하고 고려때 시조를 배출한 성씨들은 서원봉사에서 자손봉사로 전환하였는데 류차달은 1948년 남북이 막히기 이전까지 묘하에서 자손봉사를 합니다.
대승공묘하 경사루(敬思樓)가 6.25 화재발생 전까지 존재하였고 문중재산목록 회의록 장서등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 대승공 사우는 대동사뿐입니다.
류차달 향사는 1945년 해방전까지 묘하에서 자손 봉사를 하였으나 북조선 노동당이 창건된 1946년(김준엽 외 편, 북한연구자료집제1집, 고려대학교 출판부, 1969)에 인천으로 이주한 九月山大宗齋所 관리한 신천군 文武面 楸陵里 柳厚臣 墨坊宗中(무자보 총목 51쪽, 류후신은 대승공28세, 하정공아들인 만호공묘가 대승공묘우측에 있어 대승공묘를 류후신 집안 종중에서 관리하였음) 종원이 대승공향사 준비를 하려고 곡수(토지 임대료)를 받으려 신천군에 갔는데 종중재산을 공산당에서 접수하여 곡수를 받지 못하고 간단하게 주과포를 올리고 왔으며 그 이후 대승공 묘하에서 향사를 지내지 못 하였으나 1946년 음9월 호남유림과 전국 종원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 동호동 좌상공파 종재와 유림과 종원의 제원으로 1996년까지 50여년간 향사를 지냈으나 종재 부족으로 1997년 대동사 보존회(회장: 진주인 류근창)에서 20년간 향사를 지내다가 2018년 음 2월 15일 문화류씨 광주전남종친회(회장: 류금환) 주관으로 류차달 대승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광주 대동사는 1933넌 전국 문화류씨각종중에 통문을 보내 1934년 서울 광화문밖 종원집에서 회의를 하여 대승공 사당은 장당군 진서면 전재리 문간공 류공권묘역에 건립하기로 결의하고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왜경을 방해로 관계자이신 관암 류상열공이 감금되어 중단되었고 1945년 음력 7월 다시 논의하여 나주 동호리에 건립하기로 하고 통문을 발송하고 나주 유림과 좌상공후 류상열공 주도로 류인대공과 일가 유림과 외손 헌성금으로 대동사가 완공됩니다.
③ 나주 동호동에 대승공 사우가 건립된 근거
왕건에게 처음으로 군량을 지원한 903년 나주 전투를 참가할 당시 대동사가 있는 동호동은 나주였고 고려 건국후에도 견훤이 멸망할 때까지 핏박을 받은 지역이였으며 조선조에 문화류씨 후손들이 자리 잡고 이웃에 나주오씨등이 토반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본량면으로 재편된 곳입니다.
6. 결론
① 류차달이 왕건을 도왔다는 처음 기록은 흥률사 상량문에 의하면 4해황제가 왔고 수백년후 류차달이 왔는데 왕장군을 도와주라는 꿈(류차달 아버지가 왕건을 도와 주라는 조언)을 꾸었다는 것입니다. 기사보에 상량문이 과장되었다고 하니 4해황제→4해호족→4해형제→공자 제자 司馬牛 四海兄弟→4해형제동맹으로 수백년→수십년으로 연관지으면 20대 약관나이에 왕건을 지원한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② 류차달은 왕이 되기전 궁예부하이며 장수 왕건을 지원했는데 류차달은 태조왕건이 고려 왕이 된 이후 군량을 지원했고 이름을 하사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대승공은 고려 건국전 왕건을 지원한 것이 20회 이상이고 고려 건국후 태조를 지원한 것이 60회 이상입니다. 만약 류차달의 군량 지원이 없었다면 현지에서 군량미를 확보 했을 때 그 지역 호족들이 왕건을 도와 주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장수가 아니면서 고려개국 2등공신이 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