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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의 시조 휘(諱)를 후손인 제가 “류차달”하는 것은 불효이고 김선궁(金宣弓)도 大丞公이지만 선산김씨들은 諡號인 順忠公이라 하고 있으나 그래도 일부에서는 김선궁을 대승공이라 하기에 대승공 보다는 감히 휘(諱)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2.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는 1/4∼4/4까지 인데 “뿌리깊은버드나무”카페에 초안을 공개하여 댓글을 받고 문헌을 확인하여 수정보완하였으나 1/4의 내용이 2/4에서 증복되는 부분이 있지만 1/4은 문화류씨족보에서 태조를 지원한 내용과 배경을 위주로 했고 2/4는 1/4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며 3/4은 서남해안 전투에서 군량미를 제공한 내용이며 4/4는 대승공 사우입니다. 3. 제가 발표한 글에서 처음에는 참고문헌이나 그 단어 설명의 각주를 그 페이지 끝이나 논문 끝에 달았는데 제글을 읽는 대부분 종원들꺼서 각주자체를 이해를 못하고 있어(페이지 아래 써놓은 글이 무슨 말이냐 등) 각주를 문장 중간에 넣게 되었으니 양해 바랍니다. 4. 제가 어렸을 때 영암 모산 어른들(그 어른들도 윗대어른들에게서 들었던)로 부터 들은 구전 내용을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1990년대는 이곳 시립이나 대학 도서관과 관련 신간서적을 구입(한줄의 대승공, 흥률사 글 때문에 책을 사기도 했음)하여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서 한자 한 글자를 옥편에서 찾다 못 찾아(한자를 정자가 아닌 약자를 자기필체로 흘려 쓴 한자) 한자를 잘하신 분을 찾아간 경험이 있고 타문족보를 복사해 와서 대조하다가 2010년대는 인터넷으로 모르는 한자도 찾고 조선왕조실록도 볼 수 있어 과거 조선조에 선조들이 고위관리가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자료를 검색할 수 있어 조사한 자료를 정리 하였습니다. 5. 지금은 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구전이 대부분 사실이지만 하정공후손과 관련 내용이 많아 이번 대승공 자료에는 하정공 자료는 올리지 않았습니다. 6. 대승공에 관련 자료를 그동안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면서 완성된 글이 아니기에 의견을 주고 다음에 완성되면 글을 올리겠다고 했는데 미완성 대승공 관련 글을 퍼 나르기하여 자기 성씨 홍보 자료로 문화류씨에서 이런 글이 있다라고 인용하신 분은 이번 대승공 시리즈를 참고 하십시오. 그러나 전에 올린 대승공 자료는 미흡한 점이 있으나 나름대로 참고할 만한 글인데 이번 씨리즈에는 전에 글에서 많은 부분을 줄였기에 소소한 글에는 전번 대승공 글이 참고 될 것입니다. 7.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 1/4”은 2019년 문화류씨 유주춘추에 투고한 글이며 2/4 3/4 4/4는 추후 유주춘추에 투고할 예정이지만 유주춘추를 매년 1,500부를 발행하는데 문화류씨가 2008년 무자보 수단에 317,846명이였고 2010년 인구통계에서 문화류씨는 류씨 90,313명+문화유씨 237,314명=문화 柳씨 합계 327,627명으로 대부분 柳씨가 유주춘추를 볼 수 없고 여자분들도 친정에 관심 있으신분은 각종 柳 씨 카페나 밴드에 활동하시기에 이번에 1/4, 2/4, 3/4, 4/4를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에 올리고 대종회홈페이지에도 올리겠습니다. |
先蹟探究
류차달 수레와 군량미(糧)
하정공파광주종친회장
대승공33세 류 재 균
1. 서론
유주춘추 22집(2019년판) “무자보의 대승공 탐구”에서 문화류씨 족보와 사학자 8분의 글을 근거로 대승공에 대한 자료를 제공했는데 많은 족보연구자들이 저의 “뿌리깊은 버드나무”카페 대승공 글을 읽고 퍼나르며 참고문헌으로 인용하고 독자들중에 고려개국공신이며 각성씨의 시조인 각성씨대종회에서 자기들 시조 연구에 대승공 글을 인용 하고 있어 이번에는 대승공이 왕건을 군량미로 지원한 배경에 대하여 다른 방향으로 탐구해 봅니다.(대승공 존칭은 생략합니다)
족보에 대승공 事蹟의 “太祖征南公多出車乘以通糧道”에서 태조 남방정벌시 대승공께서 내놓은 수레 군량미(糧)에 대한 글입니다.
統合三韓翊贊功臣秩 29명중에 1등공신 5명은 왕건 책사인 최응과 장군(군인)으로 궁예를 몰아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며 2등공신 12명은 유금필(마군장군) 김선평(신라 고창성주로 고창전투 참여) 장길(고창전투 참여) 류차달(군량미 제공) 이도(금강전투 참여) 함규(평장사) 김선궁(숭선전투 참여) 홍규(광평시랑 평장사) 왕희순(왕건의 사촌 아들 손자) 김훤술(삼중대광보국문하시중) 윤신달(태사공 장군) 박윤용(울산호족) 3등공신 10명 4등공신 2명으로 구분합니다.
고려 개국공신은 궁예 부장인 마군장군(馬軍將軍, 騎兵隊長) 출신 4명과 영암 해상호족이며 왕건 책사 1명이 1등공신이고 2등공 12명 중에 11명은 전투와 관련되어 장군으로 공신이 되었는데 류차달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군량미 제공으로 공신이 됩니다.
896년 양길 부하인 궁예에게 왕건이 들어가게 되고 901년 태봉을 건국하고 902년까지 각종 전투가 있었습니다.
903년 이전에는 궁예가 후삼국 통일전쟁에 전쟁비용이 필요했는데 내륙지역의 호족이나 백성들에게는 큰 부담이었으나 류천궁(정주성 정주항)과 류차달이 왕건을 도와준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성씨 柳로 활동한 선조는 류척량(궁예 실각후 도망가지않고 군량미창고를 지킴) 류법반(백제 우장군, 전주류방현조부, 증조부는 신라각간 류기휴) 류훈율(신라관리) 류지방(武烈公 裵玄慶傳에 2등 개국공신으로 나옴) 류긍순(염주호족) 류차달 류천궁 류덕영(장덕왕후 父) 등입니다(류주환저 2012년 대호하루 355쪽)
전주인 류기휴 류법반 경우처럼 부자간에 다른 나라 관직이지만 류법반과 류차달만 후손이 현재까지 계승 유지되지만 이들 柳씨간에 인친족 관련이 없습니다.
흥률사 증수기에 류차달 선조(父 또는 祖父, 청의동자)가 류차달에게 왕장군 군량미를 지원하라는 내용이 있고 왕건 친척이나 장군이 아니면서 개국공신이 된후 다른 공신처럼 평장사나 문하시중의 대우를 받지 않고 유주지역에 대승이란 지방관으로 6대손까지 유주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개국공신입니다.
류차달도 호족이기에 家兵이 있었지만 다른 호족들처럼 가병을 전투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없고 가병을 출병시킨 일부 공신처럼 諡號를 받지 못했습니다.
2. 흥률사중수량상소기서(興栗寺重修樑上所記書)
至正16년 戊辰 4월 법원선사가 흥률사 중창개조(重剏改造)하면서 (지장16년은 丙申 1356년이며 지정18년은 戊戌년으로 1358년임)쓴 상량소 글에 의하면(무자보 총목114쪽) 흥률사는 805년 세워졌고 신라 흥덕왕이 도의선사에게 터를 잡고 절을 지으니 선도장이 되고 4해황제의 一區福地(하나의 상서로운 지역)가 되었는데 그 후 백년이 지나 류차달이 흥률사에 가서 뜰에서 졸고 있는데 청의동자가 왕장군이 진중에 군량이 떨어졌는데 너는 졸고 있느냐고 합니다.
도의선사가 헌덕왕 13년(821년) 귀국하였고 왕건이 877년 출생하고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 궁예 장수인 장군인 왕건에게 군량미를 제공한 것은 흥률사 중건후 70여년 후 일입니다.
805년 창건된 흥률사에서 4명의 해상 호족이 주기적으로 만났고 821년 도의선사가 중건한 후 창건하고 98년이 지난 903년 류차달이 흥률사를 찾아간 것은 꿈에 선몽하기 위해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청의동자가 되어 불러들인 것이고 꿈에 청의동자로 나와 손자에게 이야기 한 것으로 봅니다.
법원선사 흥률사 중수기가 과장된 부분이 있다고 해도 흥률사에 류차달이 가서 졸고 있을 때 부터 백년전에 4해황제(왕건이 황제가 된후 조부를 황제라하여 4해 황제가 됨)인 작제건(왕건조부) 류천궁(신혜왕후조부) 류차달조부 등이 신라조정에 의해 제거된 장보고 이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한 4해황제동맹을 맺어 자신들을 보호하게 됩니다.
3. 흥률사 四海皇帝 모임
형제동맹(司馬牛 四海兄弟)은 論語 顔淵篇에 나온 문구이며 四海兄弟同盟이 4해황제동맹이며 청의동자는 류차달 할아버지로 보는 근거가 흥률사 중수기는 류차달이 자신의 묘역 옆에 있는 흥률사에 시주를 얼마나 했는지 알수 없으나 류차달에 대한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류차달이 많은 절 중에 폐허가 된 흥률사에 가서 졸았고 꿈의 왕장군이 군량미가 떨어졌으나 도와 주라는 청의동자를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이야기라 하면 유일한 문헌자료인 흥률사 상량문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통일 신라에서 해상호족을 해적으로 부터 보호해준 장보고가 있지만 남해안은 보호가 되지만 서해안은 불안하여 서해 해상호족들이 뭉치기 위해 흥률사에 모여 4해형제라 했고 이들이 해상 안전을 책임질 4해형제 동맹을 맺고 이들 손자대인 왕건 신혜왕후 류차달 장화왕후 시대를 맞이하여 류천궁과 류차달은 궁예의 눈 밖에 나면 목숨을 위태롭고 오다련은 견훤에게 발각되면 목숨을 걸 정도의 끈끈한 할아버지들의 형제 동맹으로 왕건을 도왔고 백주(연안)의 유상희 혜성(아산)의 박술회 영광의 전종회 강주(진주)의 왕봉규 울산의 박윤웅 등 해상 호족들이 왕건을 돕는 4해황제와 연결된 해상 세력입니다.
841년부터 910년까지 패서호족들이 4해황제동맹을 결성하고 해안호족을 포섭해 나가서 서해 남해 동해를 어울어 신천 개성 풍덕 연안 승주 진주 울산 해상호족과 교류를 합니다.
흥률사 상량문 “四海皇帝”를 柳麟錫(1842년~1915년) 의암집(毅菴集)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에서 四海를 天下라하여 후삼국호족이라 하는데 여러 문헌을 종합한 결과 패서지역 호족동맹을 주도한 4명을 호족은 작제건 류차달은 확실하지만 류천궁 등은 의문점이 있으나 류차달은 사해황제에 충분하다는 내용입니다.
알에서 태어낳았다고 해도 믿으면서 4해황재동맹에 류차달에 포함된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라 하는 것은 류차달을 과소평가 한 것입니다.
※주1 : 흥률사 四海黃帝는 四海를 중국으로 보는 학자가 있고, 온 천하라 하여 후삼국 호족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 흥률사는 구월산에 있기에 중국은 아니고 후삼국 호족이란 것도 황해도가 신라 땅이기에 가능성이 있으나 서해에서 호족들 무역활동을 보호하기 위해 각세력의 대표들 4명이 모였다는 것으로 4명 대표로 자격이 충분하고 또 류차달이 흥률사에 가서 꿈에 왕장군이 군량미가 없으나 도우라는 것은 4해황재 후손이 류차달이라는 것이고 중수기에 꿈꾼 사람이 류차달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류차달과 작제건이 확실하다는 것은 흥률사중수기에 류차달과 왕건이 등장하고 四海黃帝들이 만나고 백년후 폐허된 흥률사를 류차달이 흥률사를 찾아가서 왕장군을 도우라는 게시를 받았기에 백년전이면 류차달 祖父와 왕건조부(작제건) 등 4명이 앞으로 해적으로부터 무역활동을 보호하는 방안을 마련하가 위해 만난 곳(一區福地)입니다.
4. 왕건 가문
묘호 | 시호 | 휘 | 능호 | 비고 |
원덕대왕 | 강보육 | - | 태조 증조부 | |
경강대왕 | 작제건 | - | 태조 할아버지 | |
원렬민혜위무대왕 | 륭 | 창릉 | 태조 아버지 | |
태조 |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 | 건 | 현릉 | 본인 |
고려 추존 왕인 손호술(강보육) 작제건 용건과 왕건 이름 표기는 고려사에 성씨가 손(강)씨→작씨→용씨→왕씨로 변한 성씨로 왕건은 증조인 강보육(손호술)은 국조원덕대왕(궁예 처가인 신천 강씨 후손), 조부 작제건은 의조경강대왕, 父 용건은 세조위무대왕으로 추존하고, 본인 왕건은 태조가 되는데 이제현(1287∼1367)은 고려사 완간 이전부터 알려진 김광의 편년통록에 할아버지 아버지 본인의 3대 이름에 “건”자가 들어간 것과 왕건의 증조에 “강”씨를 인정한 것을 비판합니다. 즉 손호술(강보육,증조) 작제건(조부) 용건(아버지) 왕건으로 선대를 정인지 고려사에 기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합니다.
※주2 : 조선조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동원되어 왕건 선조를 연구하지만 4대이상 선조를 알 수 없는데 일게 호족을 누가 연구해서 대승공 아버지를 알아 내느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흥률사에서 4해황제가 만난 백년후 류차달이 흥률사에서 졸았고 왕장군에게 군량미가 없으니 도와 주라는 꿈과 관련된 인물 2명과 왕건 장인 2명 가문 가계도 |
| 조부 | 작제건 | 청의동자 | 이름모름 | 오부돈 |
부 | 용건 | 이름모름 | 류천궁 | 오다련 | ||
본인 | 왕건 | 류차달 | 신혜왕후 | 장화왕후 | ||
본관 | 개성왕씨 | 문화류씨 | 정주류씨 | 나주오씨 |
왕건은 궁예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나주 전투를 승락 받았으나 자신 家兵과 처가인 류천궁 가병과 군선은 확보했으나 군량미가 부족하였는데 장인인 류천궁이 류차달 父에게 청의동자와 4해황제동맹을 이야기 하며 군량미를 부탁합니다.
류차달이 나주 전투 때 나이가 23살 정도입니다. 23살 청년이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본인 재산이라기 보다는 아버지 재산이라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왕장군(이때는 궁예 부하인 일개 장수임)을 도와 주라고 해서 왕건에게 군량미를 주었는데 현실은 궁예에게 군량미를 주면서 겉으로는 궁예에게 충성하고 실질적으로는 4해 황제 손자인 왕건을 지원합니다.
영암출신 형미(逈微, 864∼917)스님은 왕건을 지지하다가 궁예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류차달이 왕건을 지원한 것은 아주 위험한 도박입니다.
5. 류차달 가문
류주환교수가 2008년 1월 7일 블로그 글에서 대승공의 활약을 신비하게 묘사하고 있는 흥률사 자료나 효금의 호랑이 전승은 우리의 신화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청의동자나 호랑이 전승을 추상적인 허구라고 하면 타성씨들도 인정하는 내용을 후손이 부정하는 꼴이 됩니다.
대승공 7세 공권 묘비에서 공권의 아버지 총, 할아버지 보춘, 증조 노일 이름이 밝혀졌고(4대까지만 밝혀졌는데) 대승공10세 류승(정신공)의 딸 권보(權溥)의 부인 문화류씨 묘비명에 대승공과 효금 손자 금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타성씨들에서 부려워하는 1세 차달, 2세 효금, 3세 금환, 4세 노일, 5세 보춘, 6세 총, 7세 공권의 宗史가 완성됩니다.
대승공7세 류공권 묘표에(무자보 총목139쪽) 父 총 조부 보춘 증조 노일과 현손까지 기록(~~~姓柳氏始寧人也曾祖諱盧一檢校大將軍祖諱寶春檢校小府少監考諱寵檢校小府少監~~~)과 동시대 권부(權溥, 안동권씨는 권보라함)의 처 문화류씨(대승공10세 승 딸) 묘지명에 류차달이 나오고(~~~始寧柳氏。自國初爲著姓。有大丞車達者。佐太祖有功。其七世孫文簡公諱公權。以文學參大政~~~) 대승공 11세 돈 묘지명에 류차달 류효금 호랑이 기록이 있는데(~~~文化顯人也其先車達~~~) 묘지명 어디에도 차효전(류효전) 기록이 없고 묘비에 의해 류차달부터 공권 아들 현손까지 1세부터 11세까지 세계(世系) 기록이 있습니다.
박혁거세나 김알지는 당시 문란한 성 사회에서 아버지를 알 수 없이 태어난 것이고 하느님 손자 환웅(태양숭배한 태양족→배달족→백의민족)과 곰을 숭배하는 웅족의 결합으로 연합정부인 고조선이 탄생하고 배달족 단군이 왕이 되었다는 설화입니다.
부여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천신(天神)과 아들인 해모수처럼 하느님 아들이다 박혁거세처럼 박에서 태어 낳다, 김알지처럼 알에서 태어 낳다 하든지, 도선국사처럼 오이를 먹고 태어 낳다거나 윤신달처럼 금궤에서 나왔다고 할 수 없는 아버지가 존재하는 인물로 류차달 아버지 이름을 모른다는 것인데 타문에서 만들어준 류차달 6대조(월흑산장등 윗대)까지를 사용하자는 것은 고려초 4대까지 선조기록을 알 수있는 상식을 무시하는 꼴입니다.
왕건보다 약 3,100년전에 살았던 왕조명 왕수긍의 후손들이 왕건 가문의 경우에서 처럼 당대에 성씨가 바꾸어 지는데 왕씨로 계속 이어올 수 없는 사실을 황제 희씨 하우씨 왕조명 등을 엮어 만든 것이 원파록인데 약재 류상운 손녀사위이며 만암 류봉휘 사위 집안인 남구만 손자 남극관 등 학자들이 위서라 했지만 우리 선조들이 비판 없이 받아 들였으나 왕조명과 왕수긍은 왕건 선조와 관련이 없습니다.
※주3 : 도선국사가 왕건아버지에게 성씨를 왕씨로 바꾸라고 해서 왕씨가 되었기에 왕조명 왕수긍을 왕건 선조라는 것은 허구입니다.
6. 오다련 나총례 가문
왕건이 나주에 올때 도와준 오다련과 나총례는 해안 호족 세력입니다.
압해 능창(수달)과 친한 호족으로 금성태수 나총례(羅聰禮)는 왕건이 금성(나주)을 침략할 때 도와 준 공로로 삼한벽상일등공신(三韓壁上一等功臣)의 호를 받고 삼중대광보국숭록대부(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로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해진 금성라씨 시조입니다.
능창의 친구인 나총례가 왕건을 도운 것은 4해황재와 연결된 호족이기에 가능했습니다.
나총례를 금성라씨대종회에서는 정종때 삼한벽상 1등공신이 되었다는데 고려 태조 때 후삼국 통일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공신호 제정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936년(태조 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 神興寺)를 중수하면서 이 곳에 공신당(功臣堂)을 두고 동쪽과 서쪽 벽에 삼한공신을 그려 넣었기에 936년에서 940년 사이에 제정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삼한공신 가운데 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사이에는 위계상의 차이가 있지만 태조 대의 공신이 3,200명 정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나종례를 비롯한 많은 해안호족들이 공신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오다련은 금성(나주)을 중심으로 오월국과 일본을 상대로 해상무역을 한 호족으로 아버지는 오부돈이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오다련 딸과 왕건을 정략적 혼인을 시킨 것은 四海皇帝세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주4: 오다련 나총례가 궁예 밑에 있던 왕건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903년(天復 3년) 왕건이 출동하자 그를 도와 공을 세운 것은 4해황제의 영향력으로 봅니다.
7. 왕건의 전투 연보
① 후백제 견훤
먼저 국가를 형성한 세력은 견훤의 후백제였습니다.
서기 890년 5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무진주에서 신라 서면도통 지후 병마 제치 지철 도독 전무공 등 주군사 행 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 식읍 2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 開國公食邑二千戶)라는 긴 작위명으로 출발한 견훤은 892년 26살의 나이로 후백제를 세웁니다.
892년 서남해방위군 창설하여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10여년간 완산주(전주)로 옮기지 못한 이유가 당시 4해 황제와 연결된 서남해안호족들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안호족들은 장보고를 제거한 신라 장군이라는 이유로 견훤을 견제(牽制)했습니다.
② 궁예 부하로 왕건 전투
궁예가 활동한 곳은 모두 신라 땅입니다.
○ 891년 세달사(강원도 영월소재)를 떠나 죽주(竹州: 안성)의 호족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 892년에는 북원(北原: 원주)의 호족 양길(梁吉)의 부하로 100기병(騎兵)를 지원하여 원주청주를 맡게 되었고, 894년 10월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입성하여 3,5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습니다.
※주5 : 견훤은 처음부터 5천 군대를 보유하였으나 궁예는 백명단위 군대로 각종 전투를 하다가 이때 3천 5백명 분대롤 보유합니다.
○ 896년에는 송악(松嶽: 개성)의 호족 왕건 가문이 귀부하였습니다.
○ 896년 용건의 아들 왕건을 2인자 격으로 중용하기 시작하였고 898년까지 항복한 호족은 박지윤(황해도 패강진 군진세력) 황보제공(예성강서북 패서 내륙 호족) 류천궁(평안도 정주성) 등이 있습니다.
○ 900년 왕건이 궁예 명령으로 양길 본거지를 제거하고 901년에 궁예는 고려(高麗)를 건국합니다.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여 후고구려라합니다.
○ 903년 나주 전투 승리에 이어 909년 왕건을 나주에 파견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910년 왕건의 활약으로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나주를 점령하게 되면서 해상력을 장악합니다.
○ 915년에는 부인 강씨(康氏)가 비법(非法)을 많이 행한다고 간쟁하고 부인과 두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주6 : 궁예는 신천호족의 딸인 강씨(왕건 증조 강보육도 신천인임)부인을 죽임으로 인해 황해도 패서지역 호족들이 왕건을 지지 합니다.
○ 918년 6월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知謙) 등 4인의 마군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습니다.
③ 태조 왕건으로 전투 연보
○ 919년 : 고려 수도 개경으로 이전(이후 18년간 전쟁)
○ 920년~930년 : 고창(안동)전투
○ 920년 신라의 구원요청에 고려 건국후 후백제와의 첫 군사적 대립으로 대야성(陜川)과 구사군(창원지역)을 함락시킵니다.
○ 924년 : 견훤 曹物郡(안동 구미 의성 지역)공격(제1차 조물성전투)
○ 925년 : 연산진 전투(제2차 조물성전투)
○ 927년 견훤은 근품성(尙州), 고울부(永川)를 습격하고 경주로 진격해 신라경애왕을 죽이고 왕의 족제 김부를 세워 왕(敬順王)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공산에서 견훤과 결전했으나 크게 패해 신숭겸과 옷을 바꾸어 입은 왕건은 겨우 달아나 위기를 모면합니다.
○ 928년 제3차 조물성전투가 벌어집니다.
○ 929년 고려수군 영창은 참모 최지몽과 장군 등과 함께 배를 타고 나주로 가서 남쪽에서 공격하고 홍유는 다른 장수들과 대야성을 함락합니다.
○ 929년 7월 견훤은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고창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협조입니다
○ 929년 12월 고창에서 태조 유금필등이 후백제군을 격파합니다.
○ 934년 : 운주(홍성)전투
○ 935년 : 신라멸망(경순왕 고려에 항복)
○ 936년 : 태조 19년에 지금의 경북 구미 지방에서 고려와 후백제 일리천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8. 류차달과 군량미
왕건은 877년 생이므로 901년 후고구려 개국 때 나이가 24살이고 신혜왕후는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던 시절 만나게 되었는데 《고려사》 903년 왕건은 나주로의 출정에 앞서 전함을 수리하고 군사를 먹이는 등의 준비를 정주에서 하였고 정주를 수군기지로서 활용하였던 것인데 정주가 왕건의 수군기지로서 활용된 것은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지만 류천궁의 경제적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류천궁이 경제적 후원을 하면서 같은 성씨를 사용하는 柳車達아버지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이때 대승공 나이를 23살로 추정하기에 대승공 아버지에게 요청했다고 봅니다) 장화왕후는 오부돈아들 오다련 딸로 왕건은 903년과 909년, 913년에 각각 나주에 출진하였는데, 장화왕후의 아들인 혜종이 912년에 태어났으므로 장화왕후는 왕건과 903년이나 909년경 혼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왕건 신혜왕후 류차달 장화왕후가 903년 나주출전 때 20대 나이이므로 그 아버지인 용건 류천궁 류차달아버지 등이 궁예시대 활동했고 이들 할아버지인 작제건 류천궁아버지 류차달조부 흥률사에서 4해황제로 만난 100년후 손자손녀들이 나주전투에서 만나게 됩니다.
9. 결론
궁예가 후고구려 건국후 왕건이 궁예 의심을 피하는 수단으로 나주전투를 하겠다고 궁예 허락을 받았으나 궁예가 군대를 주지 않았는데 왕건 아버지와 장인 류천궁, 류차달아버지 배경을 믿고 나주전투를 합니다.
903년 양길이 궁예에게 기병 100명을 내주어 자기가 양길을 배신한 경력이 있기에 나주전투에서 궁예는 왕건에게 20-30명 정도 군사를 내 주는데 이들은 전투 보다는 왕건과 왕건 부하인 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을 감시하는 임무 입니다.
왕건이 궁에 부하이던 901년부터 후삼국통일한 936년까지 35년 동안 류차달은 군인이 아니고 왕건 처족도 아니면서 지속적으로 군량미와 군마 군포 각종 군수물자를 제공하였습니다.
흥률사 4해황제는 작제건과 류차달 祖父는 확실하나 류천궁은 의문점이 있고 오다련은 4해황제세력과 연관된 서남해안 호족으로 봅니다.
류천궁은 왕건 장인이기에 왕건을 도와 주지만 류차달은 흥률사 4해황제 모임에 일원이 아니면 목숨을 걸고 왕건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황해도 해양호족들 대표 4명이 흥률사에 모여 동맹을 맺고 서로를 해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안 서남해안 동해안 해상호족들이 합류하게 되고 이들 세력들이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 기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