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눌 (柳思訥,1375-1440.대승공14세), 문숙공(文肅公), 文肅公派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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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1393,태조2) 19세 문과급제 사간원정원(司諫院正言) ․병조정량(兵曹正郞).
丁亥(1407,태종7) 4월, 이조정량(吏曹正郞)으로 재직 중 중시(重試)에 급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좌사간(左司諫) 홍주목사(洪州牧使)
辛卯(1411,태종11)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甲午(1414,태종14)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
戊戌(1418,세종2)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
壬寅(1422.세종4)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癸卯(1423,세종5) 한성부윤(漢城府尹)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겸직
乙巳(1425,세종7) 경창부윤(慶昌府尹)
丙午(1426,세종8) 인수부윤(仁壽府尹)
丁未(1427,세종9)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
戊申(1428,세종10) 좌군총제(左軍摠制) 한성부윤,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진하사(進賀使)로 명(明)나라에 감.
庚戌(1430,세종12) 악학제조(樂學提調)가 되어 신주조회악기(新鑄朝會樂器) 및 가자(架子)를 올렸고, 박연(朴堧)과 함께 「아악보(雅樂譜)」 완성.
辛亥(1431,세종13) 용흥가(龍興歌) 가사(歌辭)를 지어 세종에게 바침.
壬子(1432,세종14)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악기(樂器)와 악보(樂譜) 정리
甲寅(1434,세종16) 진작가사(嗔雀歌辭)를 지어 바치니, 예조(禮曹)에서 도감(都監)에 명하여 익힐 것을 청함.
난계 박연(蘭溪 朴堧)과 함께 아악을 정리하여 국악(國樂) 발전에 공헌함.
乙卯(1435,세종17) 충청도도순검사(忠淸道都巡檢使) 구악(舊樂) 정리, 맹사성(孟思誠) 박연 등과 함께 조선 초기의 악학 정비.
丙辰(1436,세종18) 세년가(世年歌)를 상고해보니 단군(壇君)은 조선의 시조(始祖)로서 처음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에 백악(白岳)으로 옮기고, 상 무정(商 武丁) 8년 乙未에 아사달산(附斯達山 :文化 九月山)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읍니다. 그 가사에 이르기를 고려때에 구월산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堂宇)와 위판(位版)이 지금까지 있어 세년가로 더불어 일치합니다. 하여 구월산에 삼성당 사당을 세움.
戊午(1438,세종20) 중추원사(中樞院事),
乙未(1439,세종21) 예문관대제학
庚申(1440,세종22) 6월 20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6세. 훈시자손서(訓示子孫書)가 전하고 있으며, 강릉 경포대시(江陵 鏡浦臺詩)와 한성 화양정기(漢城 華暘亭記)등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전하고 있음.
문숙공의 묘소는 지금 인천시 북구 경서동(仁川市 北區 景西洞) 봉수산 신좌원(烽遂山 辛坐原)에 쌍분으로 모셔 있음.
공의 묘갈명은 회당 윤응선(晦堂 尹膺善)이 짓고, 辛亥(1971)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금암 성구용(錦庵 成丸鏞)이 지었음.
공의 처부(妻父) 문희공 유창(文僖公劉敞)을 향사하는 장성 송계사(長城 松溪祠)에 공이 배향되어있음.
공의 후손은 주로 경기도(京畿道)와 충청북도(忠淸北道)에 세거하고 있음.
※輿地勝覽, 墓碣銘,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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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승공 14세 문숙공(휘 思訥,藥學提調,예문관대제학)의 고손 휘 德種(號定菴,형조정랑) 정암집(하정공후 류정수님께서 고서점에서 구입한 정암집 구월산별곡과 별곡서문(하정공종중 류호섭사무장께서 보내온 정암집 구월산별곡 사진)
2. 문숙공후 류금열님께서 보내온 정암집 구월산별곡
여러가지 사정으로 하정공종중과 류금열님께서 사진으로 보내온 정암집에 陽智題詠, 九月山別曲, 華暘亭記 등이 있는 것은 이 세편을 문숙공이 지었다(撰)했다는 것이며 구월산별곡 해설(역자 : 류주현 류주환)은 문화류씨대동회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아래는 정암집에 있는 구월산별곡을 해설한 내용으로 이전 한글 맞춤법으로 해설되었지만 원문 그대로 여기에 씁니다.
류정수님께서 고서점에서 구입한 정암집은 원본이며 류금열님께서 보내온 정암집은 원본을 한글번역하면서 문숙공종중에서 발행한 정암집으로 보입니다.
문법 표기로 보면 자유당시절 한글로 번역된 듯하지만 의미 전달은 “류주환님” 해설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받아 옮겨쓰다보니 오자(誤字)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정암공(1532~1613)의 정암집에 별곡서를 보면 고조(문속공)께서 구월산별곡을 撰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월산 별곡 : 문숙공지음
구월산이 있고 삼지강이 흐르는 유주땅은 이름난 좋은 곳입니다. 후양말엽
고려초기에 이땅에서 유씨가 기가하였습니다. 문간공 문정공 정신공 장경
공 같은 훌륭한 분들이 대대로 큰벼슬을 하고 착한일을 많이하여 꽃다움이
름을 후세에 끼치게 되었으니 그경황이 어떻다하겠음닛까. 조상이 남겨
놓은 거룩한 뜻과 업적을 이어 받들고 조상의유풍을 욕되이하지않았습니다.
거듭노래부름니다. 부모는 자손을 낳아길러 당내에 웅게중게하니 나아가
면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고 도라오면 반드시 부모를 뵈일적에 옷색이
찬란한 때때옷자락이 너흘너흘 춤을추다 부모의 얼골빛을 살피어 기분
이상하지않도록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야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드린
다는 효성어린노래를 부르니 넘치는경사가 무궁하여 그얼마나 거룩한
고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고하자면 하늘같이높고커도 다할길없어 거듭노
래부른다. 몸부림친들 할수없구나 서로좋아할뿐이고 서로닮지않음이 형
제간의진정이고 집안이 모두 화동하며 싸움없음이 선조의 유품이라서
이것을마음에새겨 있지않고 종평생외여 더욱마음을 가다듬어 구족간에
침목하니 그우애가 얼마나 크겠는고 형제간에 의좋은 것은 천륜의 상
도로서 즐거운일인데 만일에 형제간에 싸움을한다면 나는숨어버릴
이라. 산에가서 나물캐고 묻에가서 고기잡어도 주림을 면할 수 있고 가
든지 멈추든지 거리낌이 없어 오직어디있더라도 편안하니 써주면 세상
에 나와서 도를 행하고 버리면물러가서 은퇴하여 몹시곤궁하게 살면서
도 편안한 마음으로 천도를지키니 접촉한사람도없이 혼자지나면서 재기
를감추어두고 때를기다리니 그얼마나 즐거운가 임금을사모하여 잊지않
는 일편단심을 가슴에 품고 임금만을 위하여 살아가리라.
구월산별곡서 : 정암공지음
고조 할아버지 문숙공은 문장으로 세상에 울렸으니 조고마한도리도 통
하지 않음이 없고 음률을 잘 이해 ~~~~~~~~~~~~~~~
(정암집과 위 사진의 한글번역본과 류정수님께서 한글번역하신후 한글번역본을 접하는 기회가 오면 다시 구월산별곡 자료를 공유하겠습니다)
정암집 별곡서문(한글번역분)을 사진으로 다 받지 못했고 류호섭님이 보내준 別曲序를 네줄 받았지만 제가 한자 실력이 없어 네줄의미를 짐작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어 류정수님 번역본(류찬길님 전언임)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 추기 : 류금열님께서 카톡으로 보내온 내용은 정암집 번역본은 1966년 류홍렬문숙공회장 때 후손 류인원한학자가 한글번역하였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