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90년 9.28일 발간된 필자가 소장하는 족보입니다.
연안차씨 인터넷 기사에서는 [류차달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허무 맹랑한 공격을합니다
[차원부설원기]에서 족보에 계시는 2세 효금을 문화류씨 시조라 합니다. 천인 공로할 만행이 아닙니까?
대승공 류차달 시조님을 아에 없애야 한다고합니다. 다음 글애서 확인바랍니다. 그냥 차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 王車柳號는 은하철도구구를 타고 중국의 황제로부터 출발하여 [류효금] 마지막 역에서 여행을 마치고 내리니 “류차달기록은 잘못된 것이다.”는 여덟 개 항목의 장황한 글로 차문의 원파록에서 문화류씨에게 선전포고하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아래 글에서 확인하시고 함께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 ❑ 아래 글은 네이버 검색창 원파록 → 『연안차씨』 사이트에서 불러와 정리한 글입니다.
3. ❑ 신라태조 박혁거세에게 차씨로 사성(賜姓) 받았다는 1세 차무일과, 고려태조특명(高麗太祖特命)으로 본성차씨로 복성했다는 33세 승색, 34세 공숙, 35세 진부, 36세 무산, 37세 보림, 38세 차달까지 차문의 족보기사를 간략히 올려보니 다음 용어가 난무합니다. 그 용법이 무엇일가요? 왜? 유독히 차씨 족보에 이런 용어들이 난무할까요?
4. ❑ ①고려태조특명(高麗太祖特命) ②모성(冒姓) ③모칭(冒稱) ④가성(假姓) ⑤복성(復姓) ⑥본성(本姓)차씨 ⑦분성(分姓) ⑧동조이성(同祖異姓) ⑨양성(兩姓) ⑩득성시조(得姓始祖) ⑪득관시조(得貫始祖) ⑫동원(同原異姓) ⑬가성류씨(假姓柳氏) ⑭柳와 뜻이 같은 楊씨 -- 참 어지럽습니다. (버들柳자 버들楊자)
다른 성씨 족보에도 위와 같은 용어들이 어지럽게 쓰여 지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5. ❑ 원파록에서 4700여 년이나 된 차씨(車氏)의 연원(淵源)을 탐색하러 은하철도999를 타고 여행을 더납니다. 올해 2012년은 단기(檀紀)4345년, 불기(佛紀)2556년입니다.
원파록에서 車씨 집안은 아래와 같이 단기보다 300여 년 빠르게 4716년 전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출발지점은 중국의 皇帝로 부터입니다. 慕華思想(모화사상), 事大主義(사대주의)의 극치입니다. 왜냐고요? 중국 황제(公孫氏)가 조상이어야 하니까요.
약4716년 전 BC. 2704년 중국 헌원(軒轅) 황제(黃帝) 본성(本姓) ① 공손씨(公孫氏)역으로 부터 출발합니다. 모후(母后) ② 희씨(嬉氏) 황제(黃帝) 우제순(虞帝舜) 순(舜)임금 ③ 하후씨우(夏后氏禹) ④ 사씨(姒氏) 사성(賜姓) ⑤ 사신갑(姒辛甲) 고조선(古朝鮮) BC.1878 평양(平壤) 일토산 一 + 土=王 ⑥ 王씨가 탄생 왕수긍(王受兢) 기자준왕(箕子準王) 왕(王)씨를 동서(東西)로 막아 ⑦ 전(田)씨로 전자(田)를 중획(中劃)을 그어 ⑧신(申)씨 천지양획(天地兩劃) 더하여 ⑨ 車씨 →(신라 태조 박혁거세가 賜姓 AD 914 약 1194년 전) ⑩ 차달의 첫째아들 효전을 차씨로 잇게하고(고려태조 왕건 AD 918 약 1,000년 전) ⑪ 둘째아들 효금역에 도착하니 류씨로 賜姓하여 車柳 양성(兩姓)으로 분성하였다는 머나먼 여행길이였습니다. 역 정문에는 “류차달이란 말을 쓰지 말라”는 차문이 보낸 경고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6. ✶ BC 2704년에 중국 황하와 양자강을 건너고, 너른 중국 벌판을 지나서, 만주벌판을 지나, 압록강을 건넌 씨족집단이 평양에 도착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王氏姓을 賜姓 받고, ~~~~ 저 남쪽 나라 서라벌에 가서 박혁거세로부터 차씨로 사성 받고 또 개성 까지 올라와 고려태조에게 또 차씨로 사성을 받았을 수 있을까? 너른 대륙을 건너고 그 많은 무리들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평양까지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축지법(縮地法)을 활용하였나 봅니다.
조상을 미화하고 높여드리고 설화적 요소를 가미하여 인정과 온정을 보태고 자긍심을 갖게 함을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곳에는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이 적절히 배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중국 황제 公孫氏 姓을 갖어오느라 천산산맥을 넘어→ 황하→양자강→만주벌판→압록강→평양→서라벌→개성으로 여행하며 公孫씨→嬉씨→ 夏禹氏后씨→姒씨→王씨→田씨→申씨→車씨까지 오더니→柳씨(楊씨가 잠시 끼어 듭니다.)까지 여행을 하였답니다. 이렇게 시공(時空)을 함부로 넘나드는 것은 눈에 환히 드려다 보이는 억지가 아닐까요? 그래서 왕씨 차씨 류씨는 중국 황제의 자손이랍니다.
차씨가 되지 못한? 오늘의 申씨 田씨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7. ❑ 『차원부설원기』는 아래와 같은 현란한 소설을 써 내려옵니다.
✶ 王씨에서 → 車씨를 만들고 柳車達에서 達을 뽑아 성과 이름을 조합하니 車達이 됩니다.
✶ 신라태조 박혁거세는 차씨를 차무일에게 賜姓 →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됩니다.
고려태조 왕건에게서 또 두 번째 차씨 賜姓을 받으니 차달이 되고
큰아들 孝全은 → 연안차씨 득관시조(得貫始祖)가 되더니 어느 날 孝全의 全자의 人자가 빠져 王자가 되니 왕에 대한 불경이라 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합니다.
작은아들 孝金은 → 柳씨로 사성되니 文化柳氏 시조가 되고
車와 柳로 分姓되어 同原이요 동조이성(同祖異姓)이니 형제 집안이라 합니다.
『차원부설원기』가 목적하는 연안車씨 안에 개성王씨와 문화류씨를 거느리는 거대 명문족을 목적하는 효금역에 도착합니다. 5,000여 년의 길고도 먼 여행이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인구 5,000만 중 문화류씨 30만명, 연안차씨 20만명, 개성왕씨 2만이라 합니다. 합해야 50만명 미만입니다. 전체 인구의 100분의1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가?
8. 고려태조(高麗太祖)는 차승색부터 柳씨를 사성하였다더니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시키는 마술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집니다.
1세 차무일(車無一) 신라 태조(太祖) 박혁거세(朴赫居世) 차씨(車氏) 사성(賜姓) 득성시조(得姓始祖) ~~~① 33세 승색(承穡) : 모성(冒姓) 양씨(楊氏)의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假姓)으로 류씨(柳氏) →류색(柳穡) →여기서부터 문화류씨를 등장시킵니다 → 그러더니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 109년 만에 복성(復姓) “하하하 그렇구뇨”
② 34世 공숙(恭叔) 류숙(柳淑)이라 하며 피신(避身) 구성왕씨(舊姓王氏) 복성(復姓) 왕공도(王恭道) 원덕대왕(元德大王)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 고려태조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명(假姓名) 차씨(車氏)로 복성(復姓)
③ 35世 진부(振阜) :류진부(柳振阜) 고려태조(高麗太祖) 특명(特名)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 차진부(車振阜)
④ 36世 무선(茂先) : 가성류씨(假姓柳 류무선(柳茂先)이라 하며 고려태조(高麗太祖)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무선(車茂先)
⑥ 37 世 휘(諱) 보림(普林) : 가성류씨(假姓柳氏)를 5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 류보림(柳普林)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보림(車普林)
⑦ 38 世 달(達) : 가성명(假姓名)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휘(諱)는 해(海)요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 차승색(車承穡) 모성양씨(冒姓楊氏)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 류씨(柳氏)로 모칭(冒稱=모성(冒姓))한 것을 또 그만두는 것도 옳지 않다. 고 하시며 모성류씨(冒姓柳氏 =假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하여 공(公)의 사성명(賜姓名)은 차달(車達)로 하시고
공(公)의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케 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계승(繼承)케 하시고 공(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여 형제분(兄弟分)이 차류양성(車柳兩姓)으로 분성(分姓)하게 된 것이다.
『차원부설원기』의 여행 도착점은 여기입니다. 류차달의 근거를 없애기 위해서입니다.
위에서 묘한 논리가 펼져집니다. 위작의 극치입니다. 33세 차승색부터 가성류씨(柳穡)로 둔갑시키더니 6세는 차달이 등장하고 [대승공 류차달]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합니다. 이렇게 문화류씨 가문사를 멋대로 주무르는 『차원부설원기』를 이미 위서로 판명이 났지만 그 실체를 속속들이 파헤쳐 문화류씨들에게 실체적 접근을 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다음에서 차문이 문화류문에게 뭐라 공갈하는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차원부설원기』가 학계, 보학계, 인터넷상에서 위서로 판명되는 속도가 빨라지니까 나오는 대응이라고 봅니다. 【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이 글은 내용상으로 보아서 최근의 글로 판단됩니다. 하기야 차원부설원기는 세월이 갈수록 조작을 덧칠하니까요.
2000년 이후 『차원부설원기』가 학자들에 의하여 위조(僞造), 위작(僞作)한 위서(僞書)로 증명되고 온 천하에 알려지면서 문화류씨대종회에서 『차원부설원기』 삭제(削除)의 변(辯)을 공포하자 다급한 나머지 포문을 문화류씨에 열어 반격의 포를 쏩니다. 다음 여덟 가지 조목에서 표현되는 문장을 유의 깊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필자가 『차원부설원기』 독후록.2에서 밝혔듯이 쓰임의 문장이 너무 혐오스럽고, 독선적이고, 저질스럽고, 품위 없는 말이 난무하고, 원한에 찬, 저주하는, 공갈하는, 세상을 비관하는~~~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일국의 재상 형조참판 박팽년의 글이 아니라고 단정하였는데 다음의 문장도 같은 맥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9. ❑ 아래 글은 원파록 마지막 부분에 문화류씨를 겨냥한 글입니다.
인터넷상에 올린 글입니다. 일종의 공가(公家)문서입니다. 사용한 용어가 이래도 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관례상(慣例上) 성씨(姓氏)에 이름대신 호(號)를 붙여서 호칭(呼稱)하며 기록(記錄)한 것이 많이 있다.
예(例)를 들면 본성명(本姓名)이 한호(韓濩)인데 한석봉(韓石峰)으로 호칭(呼稱)하며 그렇게 기록을 하였다.
그래서 조선조(朝鮮朝)에 글을 쓰는 분들이 이름과 호(號)를 혼돈(混沌)하여 류해(柳海)를 류차달(柳車達)로 기록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柳海』의 경우( 境遇)는 일반관례(一般慣例)에 따라『柳車達』로 호칭(呼稱)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연유(緣由)가 아래와 같이 있다.
첫 째 : 차자(車字)는 우리 차류양문(車柳兩門)의 원조(元祖)이신 왕몽(王蒙)께서 신라태조(新羅太祖)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차(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으신 차씨(車氏)의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33세 차승색(承穡)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 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하여 왕실(王室)의 기강(紀綱)을 잡을 도모(圖謀)가 누설(漏泄)되어 황해도(黃海道) 유주(儒州)로 둔적(遯迹)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피신(避身) 6세 류해(柳海 :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직계손자(直系孫子)에 이르러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달자(達字) 사명(賜名)하였으며 득성조(得姓祖)로 부터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이어 내려온 조상(祖上)의 혼지(魂志)와 충정(忠貞)이 담겨 있는 성자(姓字)로 가문(家門)을 상징(象徵)는 것이기 때문에 자손(子孫)이 성자(姓字)를 이름자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성자(姓字)인 차자(車字)를 이름자로 쓴다면 이것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에 모욕죄(侮辱罪)를 범(犯)하는 불효행위(不孝行爲)로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짓는 것이다.
두번째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을 추숭(追崇)된 왕공도(王恭道)는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에 좌승상(左丞相)을 지낸 차무일(車無一)의 33세 손자(孫子) 차승색(車承穡)의 차자(次子) 차공도(車恭道)로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亂)에 강남(江南)으로 피신(避身),
옛 원조(遠祖)의 성(姓) 왕씨(王氏)로 복성(復姓) 개성명(改姓名)을 왕공도(王恭道)한 것이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고려개국(高麗開國) 후 조(國祖) 및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로 추숭(追崇)한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증조(曾祖)로 본성(本姓)이 차씨(車氏)인데 증조(曾祖)의 본성(本姓)인 차자(車字)를 신하(臣下)인 대승공(大丞公)의 이름자에 차자(車字)를 내려 줄 수 없는 것이며, 공신(功臣)인 대승공(大丞公)이 원덕대왕(元德大王)의 본성자(本姓字)를 이름자로 사용하면 원덕대왕(元德大王)을 능멸(凌蔑)하는 역적(逆賊)의 죄인(罪人)이 되는 것이다.
셋 째 : 연안(延安) 차씨(車氏)의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의 친제(親弟)인 휘(諱) 효금(孝金)인데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고려를 개국(開國)한 후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면서 대승공(大丞公)에게 복성명(復姓名) 차달(車達)로 내리고 휘(諱) 효금(孝金)에게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였는데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차씨(車氏)의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 복성명(復姓名)인 『車達』을 사명(賜名)으로 날조(捏造)하여 『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과 종가(宗家)를 능멸(凌蔑)하고 친형(親兄)의 후손(後孫)인 연안(延安) 차문(車門)을 모욕(侮辱)하는 처사(處事)라 용납(容納)수 없는 것이다.
넷 째 :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류씨(柳氏)로 모칭(冒稱)한 류백(柳栢 :一云 柳穡)으로부터 류해(柳海)까지 조상(祖上)의 성(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을 시키고 류해(柳海)는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신(功臣)이므로 사명(賜名)을 달(達)로 하여 성명(姓名)이 차달(車達)인 것을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한 초기(初期)에 하륜(河崙)이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頫)를 무고(誣告)하여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케 하여 역적누명(逆賊陋名)으로 차문(車門)이 적족피화(赤族被禍)로 차문(車門)이 합문몰락(闔門沒落)의 기화(奇禍)로 류문(柳門)에서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을 『柳車達』로 날조(捏造)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성(姓)은류씨(柳氏)이며 사명(賜名) 차달(車達)로 고려태조(高麗太祖)가 내렸다 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유생(儒生)들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 『柳車達』로 기록(記錄)하였다 사료(思料)되나 이것은 인륜사회(人倫社會)에 큰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처사(處事)이며 차문(車門)과 류문(柳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과 가문(家門)을 능욕(凌辱)하고 고려국조(高麗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된 왕공도(王恭道)의 본성명(本姓名)이 차공도(車恭道)인데 원대왕(元德大王)의 본성차자(本姓車字)를 그 나라 공신(功臣)이 이름의 글자로 쓴다면 이는 원덕대왕(元德大王)과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는 역적행위(逆賊行爲)가 됨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 : 근대(近代)에 와서 우리 차문(車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의 행적(行蹟)을 기록한 문헌(文獻) 및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우리차문(車門)은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신후예(恭臣後裔)로 왕건태조(王建太祖)는 차문묘예(車門苗裔)인 인연(因緣)으로 교목세가(喬木世家)로 려말(麗末)까지 잠영세가(簪纓勢家)로 계승(繼承)하였으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조(高麗朝)가 멸망(滅亡)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초(初)에 적족재화(赤族災禍)로 합문두적(闔門遯迹)하여 숨어 살면서 세인(世人)들은 이씨조선(李氏朝鮮)을 아조(我朝)라 불렀지만 우리 차문선대(車門先代)들은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 호칭(呼稱)하여 온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고 욕(辱)되게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복성명(復姓名)으로 성씨(姓氏)는 차씨(車氏) 휘(諱)는 달(達)로 사성명(賜姓名)한 차달(車達)을 사명(賜名) 차달(車達)이라 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에게 왕건태조(王建太祖)가 사성(賜姓)한 류자(柳字)를 성씨(姓氏)하여
【류차달(柳車達)】이란 성명(姓名)을 사용함은 불가(不可)함을 알면서 차문(車門)의 옛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에 【류차달(柳車達)】로 기록된 것은 차문(車門)이 역적누명(逆賊陋名) 휘말려 조선조(朝鮮朝)에서 서인(庶人)으로 전락(轉落)하여 힘없이 숨어 살면서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에 따라 불가피(不可避)한 사정(事情)으로 선대(先代)들이 류문(柳門)의 보첩(譜牒)과 문헌(文獻 것을 보아도 우리 차문후예(車門後裔)들은 )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잘못된 내용(內容)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引用)하여 기록해 온 것은 문맥(門脈)을 보존(保存)하는 차원(次元)에서 세상(世上)을 속이며 차문(車門)의 후예(後裔)들이 좋은 세상(世上)이 오면 왜곡(歪曲)돤 차문(車門)의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보첩(譜牒)과 문헌(文獻) 등 여러 곳에 암시(暗示)하여 진실(眞實)들을 감추어 기록(記錄)을 남겨 오늘날 까지 전하여 온 것에 차류양문(車柳兩門)은 유의(留意)해야 할 것이다.
이제 차류양문(車柳兩門)의 후예(後裔)들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욕(辱)되게 왜곡(歪曲)된 사적(史籍)을 바로잡는 일들을 근대(近代)에 주워진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가문사(家門史)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며 특히 차문(車門)의 후손(後孫)들은 선대(先代)들이 알면서도 올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왜곡(歪曲)된 기록을 인용(引用)해야 했던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의 수모(受侮)의 한(恨)을 풀어 지하(地下)의 선대(先代)들이 영면(永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찬문(車門)의 자존심(自尊心)을 짓밟고 모욕적(侮辱的)인 왜곡(歪曲)된 내용(內容)의 보첩문헌(譜牒文獻)을 과감(果敢)히 바로잡아 정리(整理)해야 하고 완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게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사명(賜名) 달(達)로 하였으니 성명(姓名)을 차달(車達)로 바로 고쳐 사용(使用)하고 모순(矛盾)된 【류차달(柳車達)】은 사용(使用)하지 않아야 한다.
여섯째 :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게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내린 성명(姓名) 차달(車達)의 “차자(車字)는 성차”로 곧 차자(車字)는 성(姓)이란 뜻이며, “달자(達字)는 연결할달”로 연결한다는 뜻이라 곧 차씨(車氏)로 연결한다는 뜻이 됨으로 곧 이것은 대승공(大丞公)께서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연결한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내용은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선생이 기술(記述)한 『車雲巖雪寃記』의 응제시편(應製詩編)을 살펴보면 이예장(李禮長)의 시주 (詩註)에 【言언雖수運운粮량之지功공而이特특贈증車達之지號호原원其기意의則즉不불忘망上상祖조本본姓성之지義의也야】라 한 구절(句節)을 번역하면 “말은 비록 양식을 운반한 공으로 차달(車達)이란 성명을 내렸다 하나 그 근본의 뜻은 곧 조상의 본성의 옳음을 잊지 않게 한 것이다.”
또 【其기子자孝효全전字자爲위生생字자別별賜사姓성氏씨不불是시他타全전意의也야以이其기長장而이承승襲습上상祖조之지弘홍烈열也야】라
한 구절(句節)의 번역은 “그 아들 효전(孝全)은 글자를 생자(生字)로 특별히 성명(姓名)에 내리지 않고 이것을 다른 전(全)으로 한 뜻은 그 맏이로 조상(祖上)의 홍열(弘烈)을 승습(承襲=承繼)케한 것이다.” 여기에 승습(承襲)이란 두 글자는 승계(承繼)와 같은 뜻인데 이것은 시조(始祖)로부터 한 대(代)도 끊어짐 없이 이어감을 말하는 것이며 중간에 끊어진 사실이 있다면 이 승습(承襲)이란 말을 쓸 수 없는 것이니
이 승습(承襲)의 두 글자는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는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차씨(車氏)의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함을 입증(立證)하고 있음으로 대승공(大丞公)의 성명(姓名)은 차달(車達)이고 【류차달(柳車達)】은 조작(造作)된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일곱째 : 1769년 영조(英祖) 45년 기축(己丑)에 간행(刊行)한 보첩(譜牒)의 서문(序文)을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홍문관대제학(行 弘文館大提學) 장수인(長水人) 황경원(黃景源)이 찬술(撰述)한 서문(序文)을 살펴보면 【自자承승穡색五오世세至지車차達달佐좌王왕氏씨有유大대功공復복姓성車차氏씨車차達달子자孝효全전】이란 구절(句節)을 번역은 “승색(承穡)으로부터 오세(五世)에 이르러 차달(車達)은 왕씨(王氏)를 도우셔 큰 공(功)이 있어 차씨(車氏) 복성(復姓)하였고 차달(車達)의 아들 효전(孝全)”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句節)의 차달(車達)이란 것은 즉 복성(復姓)은 차씨(車氏)요 이름은 달(達)이며 그 차달(車達)의 뜻을 풀이하면 차씨(車氏)로 연결(連結=承繼)한다는 것이며 대승공(大丞公)은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승계(承繼)하라고 내린 성명(姓名)이 차달(車達)이란 것을 확실(確實)하게 뒷받침 하고 있는 증거(證據)인데 대승공(大丞公)께서 남정(南征)할 때 향궤(餉饋)를 수레로 운반하여 영달(榮達)했다는 뜻으로 차달(車達)로 사호(賜號)했다고 주장(主張)을 하면서 【유차달(柳車達)】라 기록(記錄)하고 【류차달(柳車達)】이 류씨(柳氏)의 시조(始祖)라 하고 고려태조(高麗太祖)로부터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받은 류효금(柳孝金)을 류씨이세(柳氏二世)라 하는 것은 류씨(柳氏)의 시조(始祖)인 류효금(柳孝金)을 모욕(侮辱하고) 역대조상(歷代祖上)과 가문(家門)을 능멸(凌蔑)하는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것이다.
여덟째 : 조선(朝鮮)에 단종(端宗)의 명(命)을 받아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인 취금헌(醉琴獻)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과 유신(儒臣)들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께서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편집(編輯)한 【車차雲운巖암雪설寃원錄록】을 살펴보면
【車차達달丁정麗려室실輸수勤근之지日일孝효全전當당王왕事사靡미盬고之지時시輿여興흥原원賑진貸대之지粟속樹수顯현陵릉定정社사之지勞노國국爲위以이辦판出출車거乘승繼계良량道도運운米미征정南남特특贈증其기父부以이車차爲위達달世세績적之지號호】란 구절(句節)의 번역은 “차달(車達)은 장정(壯丁)을 려실(麗室 : 고려 조정)에 나날이 운송(運送)하는데 도우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 :구월산 주변)에 많은 속곡(粟穀)으로 진대(賑貸 : 구휼(救恤)를 배품)하였고, 현릉(顯陵 : 고려 시조 묘호(墓號))과 정사(定社 : 개국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정함의 공(功)임)의 공(功)을 세웠고,
타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하여 계량(繼粮 : 한 해에 농사지은 곡식으로 한 해 동안 양식을 이어 감)을 실어서 미곡(米穀)을 정남(征南 : 남쪽을 침)에 옮김을 실행하여서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차(車)와 달(達)로 한 것은 세적(世績 : 세계를 이어감)의 성명(姓名)으로 내린 것이다.” 라 하였는데 이 또한 차달(車達)은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이름은 달(達)로 내린 것이 확실(確實)한데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성씨(姓氏)인 차자(車字)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놓고 류차달(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을 능멸(凌蔑)하는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범(犯)하는 만고(萬古)에 불효(不孝)이다.
맺는 말
차문(車門)은 신라조(新羅朝)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으신 득성시조(得姓始祖)이신 차무일(車無一)로 시작하여 34세 휘(諱) 공숙(恭叔)이 이르러 애·헌(哀·憲)의 국난(國亂)을 만나 득성조(得姓祖)의 33세 휘(諱) 승색(承穡)· 34세 휘(諱) 공숙(恭叔)등 부자(父子)는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밑에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하여 신라조(新羅朝)의 좌상공(左相公) 휘(諱) 승색(承穡)은 피신(避身)의 목적(目的)으로 본성명(本姓名)을 감추고 할머니 군부인(郡夫人) 양씨(楊氏)의 성(姓)을 따라 양씨(楊氏)로 모칭(冒稱)한 후 다시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로 좌상공(左相公)의 6세인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公臣) 대승(大丞) 휘(諱) 해(海) 선조(先祖)까지 109년간을 모성류씨(冒姓柳氏)로 내려온 것을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 모성명(冒姓名)인 류해(柳海)까지 6세를 본성(本姓)인 구성차씨(舊姓車氏)로 복성(復姓=還姓)하여 차달(車達)로 성명(姓名)을 내린 것이며,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사자(嗣子)인 차효전(車孝全)은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39세로 애·헌(哀·憲)의 국난(國亂)으로 물락(沒落)한 차문(車門)의 문벌(門閥)을 고려개국(高麗開國)의 수공자(首功者)로 벼슬 대광(大匡)에 귀족(貴族)의 칭호(稱號)인 백작(伯爵)의 작위(爵位)에 피봉(被封)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차씨(車氏)의 묘예(苗裔)인 연유(緣由)로 차효전(車孝全)은 왕실(王室)의 종적(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塩州)로 하사(下賜)를 받아 문벌(門閥)을 다시 일으켜 세운 충시조(中始祖)로 그의후손(後孫)들 식읍지(食邑地)를 관향지(貫鄕地)로 삼았는데 이곳 염주(塩州)가 연안(延安)으로 개칭(改稱)함에 따라 처음으로 연안차씨(延安車氏)로 호칭(呼稱)을 하면서 득관조일세(得貫祖一世)하여 연안군(延安君)으로 추촌(追尊)하고 있으며,
【車차雲운巖암雪설원기】를 살펴보면 【車차氏씨以이其기長장而이承승襲습上상祖조之지弘홍烈열也야】라 한 구절(句節)의 번역은 차씨(車氏)의 맏이로서 조상(祖上)의 홍열(弘烈)을 승습(承襲)이라 한 것은 득관조(得貫祖)이신 차효전(車孝全)께서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한 세대(世代)도 끊지 말고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차씨(車氏)로복성(復姓)하여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까지 계승(繼承)하였다는 말인데 득성조(得姓祖)의 34세 차공숙(車恭叔)에 이르러 차문(車門)이없어지고 대승공(大丞公)이 류씨(柳氏)를 창성(創姓)하여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차씨(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아 분성분가(分姓分家)하고 차자(次子)인 효금(孝金)이 류씨(柳氏)로 부계(父繼)한 것 같이 말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관례(慣例)에 장자(長子)가 부계(父繼)하여 사자(嗣子)가 되고 차자(次子)는 분가(分家)하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이는 역사(歷史)와 관례(慣例)의 상례(常禮)잘 모르고 하는 말이며 이는 선조(先祖)에 대한 불공(不恭)의 범죄행위(犯罪行爲)가 되는 것이다.
이상(以上)과 같은 연유(緣由)로 대승공(大丞公)은 복성차씨(復姓車氏)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차달(車達)로 성명(姓名)을 내린 것이며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은 차문(車門)의 문벌(門閥)을 다시부흥(復興)시킨 중시조(中始祖)로 관향(貫鄕)을 연안(延安)으로 한 득관조(得貫祖)이며 사성(賜姓)을 받은 시조(始祖)가 안이다.
우리 차문(車門)의 사성(賜姓)을 받은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께서 차씨시조(車氏始祖)임을 다시 밝혀 두는 바이다.
【車차雲운巖암雪설寃원記)】와 차문(車門)의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들은 차문(車門)이 신라조(新羅朝) 및 고려조(高麗朝)에 잠영문벌(簪纓門閥)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술(記述)한 서적(書籍)이며 타문(他門)을 위해서 만들어진 서책(書冊)이 아닌 만큼 선대(先代)들이 기록한 사적(史籍)의 내용(內容)에 대하여 보는 시각(視覺)에 따라 번역(飜譯)을 달리할 수도 있으나 문중(門中)에 위상(位相)의 제고(提高)를 위하여 그에 합당한 번역(飜譯)이 타당(妥當)한 것이라 생각하며 특히 지난날의 역사에 오기(誤記)와 오역(誤譯)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 정리(整理)하는 것이 발전(發展)된 내일의 역사(歷史)를 위해 필요한 작업(作業)이요 과제(果題)라고 믿는 것이다.
❑ 『차원부설원기』뿐입니다. 다른 증거는 제시하지 못합니다. 차문의 경전으로 굳어 버려서입니다.
위의 모든 문장은 위서 『차원부설원기』 복사이므로 대응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차문의 다급함이 드러납니다.
❑ 이제는 『차원부설원기』가 위서임을 살짝 수긍하는 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습니까?
❑ 위 8개 문단과 맺음말 에 사용된 문장엔 차씨 가문의 급박한 사정이 닥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서로 판명된 『차원부설원기』에서 류차달이 없어지면 『차원부설원기』 자체의 존재 이유가 없어지니까? 항변(抗辯)이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몸부림입니다.
❑ 누가 누구에게 불효한단 말입니까? 모든 것이 위서(僞書)의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참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경전(經典)같은 믿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으니까요.
10. ❑ 류차 세계(世系)가 해주의 신광사에서 4얼에 의해 불태워져 근거가 없어졌다고 다음과 같이 조작합니다.
차원부설원기 국역본 P43,45 원문 : 網者趙鄭咸河俱以車門近孽柳車二姓同原之也系專數焚湯于海州神光寺權結一時 之?貴人作此禍之本根珍滅基嫡氏也 成三門奉 敎主
국역 : <결국 私怨 報復의 그물에 떨어졌다>는 것은,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이 모두 차씨 가문의 가까운 서얼로서 차문과 류문의 世系가 같은 근원으로 된 책은 모두 海州의 神光寺 에서 불태운 다음에 일시의 權臣 貴臣들과 손을 잡고 禍根을 만들어 그 嫡氏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이수건교수 : 류차동보(柳車同普)가 해주 삼광사에서 소각(燒却)되고 말았다는 내용도 한국족보사에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최초의 편간족보가 1476년임으로 그보다 70년 전에 류차족보가 판각될 리 없으며 류씨와 차씨가 동조(同祖) 동원(同原)이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사실이다.]
✶ 본인의 견해 : 『차원부설원기』가 세상에 등장하기 전 임으로 모든 것이 허구입니다. 뒷날의 화근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교활하게 마련한 것입니다. 선계(先系:王씨車씨柳씨의 족보근거)가 불타 모든 증거가 없으니 원파록을 새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문화류씨 족보 영락보(永樂譜)는 세종 癸卯 5년1423년 위 90년 전에 세계 최초로 발간되었고, 가정보(嘉靖譜) 또한 乙丑 명종2년1565 위 19년 전에 발간되었음으로 해주 신광사 이야기는 위조입니다.
연안차씨에서 변명하는 말 : 연안차씨 족보는 최초 戊子譜 1708년에 발행되었는데
고려 숭의회(사단법인)에서 편집한 려말 충의열전이란 책에 “고려조 공민왕 말기에 성리학자로써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내신 운암공(차원부)께서 려흥왕(驪興王) 우왕(禑王) 14년 무진(戊辰 1388)년에 종문의 역사를 정리하여 왕씨 차씨 류씨 삼 성(王氏 車氏 柳氏 三 姓)의 보판을 판각하고 해주 신광사(海州 神光寺)에 보관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서울 대학교 한국사 교수인 한우근선생과 이태진선생 등이 편저한 한국문화사의 조선 전기편에서도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고려 말엽에 해주 신광사(海州 神光寺)에 보판 판각이 보관되었다는 연안 차씨 족보(延安 車氏 族譜)가 가장 오래된 족보이며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라고 기술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갖어옴--
✶ “차원부가 왕씨 차씨 류씨 삼 성(王氏 車氏 柳氏 三 姓)의 보판을 판각” 하였다. 한우근 선생과 이태진 선생은 차문(車門)의 고도한 전술 전략에 속은 것입니다. 요즈음의 인터넷에서는 [문화류씨] [연안차씨를] 검색하면 『차원부설원기』 기사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근래에는 몇 군데에서 삭제되는 경향입니다.
『차원부설원기』가 위서로 판명 났는데 차원부가 어떻게 보판을 판각하였단 말입니까? 고도의 전술 전략이 아니겠습니까?
글을 맺으며
❑ 문화류씨 종친 여러분!!!❰류차달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글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분노와 공분이 부글부글 끓을 것입니다. 저런 허위와 위선을 우리는 용서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 문화류씨에게는 1,000여 년을 뫼셔온 대승공 류차달 시조이십니다.
1). 왜? 나는 『차원부설원기』에 집착하는가? 참 당혹스럽습니다. 이곳에서는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을 차승색 의 6세손 류효금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참 천인공로 할 위서를 꾸며 400여 년 간 차문은 차원부를 중시조 떠 받들게 조작하고, 문화류문의 선조들은 이를 방관하고 원파록을 차문의 주장대로 받아들이는 우를 범하였다는 점입니다. 문화류씨대종회에서 2008년 다행히 『원파록 삭제의 변』을 통하여 차문과 일체적 단절을 이루어낸 쾌 거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차원부설원기』의 굴레를 벗어 던짐을 속 시원하게 생각합니다.
2), 차원부설원기 저자의 그 원대하고 치밀한 설계와 조작과 현란한 문장력을 감탄합니다. 깊이 생각지 않고서 글을 읽어서는 깜빡 속아 넘어 갈수 있으니까요.
3). 위작의 숫법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① 4700여 년 차문의 가계(家系) 설계에 王씨와 문화류씨를 얽어 맺다는 점입니다. (왕씨에게는 양해를 구합니다.)
② 姓에 관한 10여 가지 용어를 동원하여 독자로 하여금 혼란케 하였다는 점입니다.
③ 격한 용어와 감성을 자극하는 언어로 위작의 숫법을 은폐하려는 점입니다.
⑤ 『차원부설원기』 독후록 4.를 쓰면서 이 책의 폐해를 너무나 절실하게 느낍니다.
⑥ 문화류씨의 정체성(正體性)을 우리는 바르게 유지하여야 할 것입니다. 류차 문제에서 방관자적인 자세를 적극적 인 자세로 임하여 주셔야 자손의 도리를 다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