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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병사공파 종친회 감사 왕경수
고려 태조의 선계에 대하여 궁금증이 점차 커지니 원파록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주된 곳이 문화류씨 문중(류문)과 연안차씨 문중(차문)의 블로그이고 이들 블로그에 새 소식이 있는지 로그인하게 된다.
차원부의 원파록을 류문에서는 1689년 기사보에 수용하였다가 약 320년이 지난 2008년 무자보에서 왜 삭제하였을까.
아래 내용은 류영렬 차류대종회 전 사무총장이 문화류씨 무자보에서 류문과 차문의 결별과정 변을 작성한 글인데 그 내용이 개성왕씨 문중(왕문)에도 도움되기에 글쓴 이의 양해없이 문장을 다듬어 올린다. 삭제 요청 있으면 응하고자 한다.
"차문, 류문, 왕문이 성씨는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는 차문의 동조이성(同祖異性) 논리의 상세 내용은 2016.7.11과 7.24 그리고 2018.5.8 개성 왕씨 병사공파종친회 까페 자료를 참고 바란다. --------------------------
[1997년 정축년, 차문이 대전 뿌리공원 한 모퉁이에 차문 유래 비석을 세우며 차건신의 아들 33세 차승색(류백)으로부터 34세 차공숙(류숙)과 차공도(왕공도) 형제 그리고 3대를 내려가 5대의 류씨들은 모두 가성(假性:가짜 성)이라 하였고 류문의 시조 대승공 류차달은 원래 휘(이름)가 차해인데 류문에서 류차달로 고쳐 시조로 삼았으며 류차달의 2세 효금이 실제 류문의 시조라 칭하는 등 폄훼하였다.
차문은 일천여년의 종사를 왜곡하는 기록을 비문에 입비하여 류문을 자극한 것이다. 나아가 2004년 갑신년, 차문이 족보를 간행하면서 차문 유래 비문을 영어, 독일어,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로 번역하여 족보 머리에 올려 가까이는 국내에 반포하고 멀리는 해외에 전파하여 온 세상의 이목을 받고자 하였으며 이것 또한 부족한지 세계 최초의 족보이자 서문만 남아있는 류문의 영락보(1423년 세종5년)와 류문 족보 중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가정보(1565년 명종20년) 또한 위보(僞譜)라며 배척하였다.
류문 대종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대책회의를 수차례 열어 차문이 비석에 새기고 족보에 올려놓은 기록이 사실이면 승복하고 거짓이면 엄정 대처하여 류문의 종문 사적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동년 8월, 류문 대종회에서는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차문의 잘못된 주장에 최종 대응키로 결의한 후 여러 자료를 수집, 심층 탐구하여 글 한편을 종보인 유주춘추(2005년간 13호)에 등재하고 차문에도 증빙 문헌을 동봉 우송하여 시정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차문의 답변은 차문이 내 세우는 차원부 설원기 또한 역사적 증거없는 위서인데도 이를 근거로 오히려 선대의 모화 사상(중국의 문물을 흠모하여 섬기며 따르는 사상)을 맹신하게 하고 선대의 유서라며 맹종하게 하였다. 영남대 이수건 교수는 역사학에 명문이 있는 분으로 그의 논문에서 차원부 설원기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2007년 정해년 5월 28일 양 문중이 만나 결별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그동안 류문과 차문이 동조이성인줄 알고 서로 숭조하고 애종하여왔다. 1945년 광주(光州)에 대동사를 짓고 대승공과 차효전 그리고 류효금을 양자로 여겨 합사(合祠: 둘 이상의 혼령을 한곳에 모아 제사지냄 )하기도 했으며 1964년 차류대종회 중앙 총본부 간판을 내걸고 종친 운동도 함께해 왔다. 문중 어른들께서는 “차문은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며 큰집“이라 일러주시었고 심지어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말씀해 오셨다.
그런가하면 류문의 한편에서는 차원부 설원기가 위서라는 주장도 있어 왔지만 크게 공론화되지 못하였다.
오는날 뿌리의 정체성을 바르게 잡으려는 류문 학자의 열정과 연구자의 헌신이 있었기에 동조이성 주장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지난 날 일부 선조들의 잘못된 판단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하였고 아직까지도 중국 황제를 가문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는 일부 종원이 있어 안타까우나 설득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 이 지구상에 5천여년의 조상 선계를 가진 성씨가 어디 있습니까.] --------------------------
도움말: □차원부 설원기에 기록된 차씨 선계 중국 하나라 사신갑은 지금의 요동 땅인 평양 일토산에서 왕조명으로 개명하고 왕조명의 58세 왕몽은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 차무일로 개명하여 신라 시중의 관직에 오른다. 차무일의 32세(왕조명의 89세) 차건신(차건갑)은 신라 39대 소성왕때 승상 벼슬로 고명 대신(고명지신/ 왕의 퇴임 또는 임종시 마지막 당부를 받드는 신하)이 된 후 임종하고 차무일의 33세이자 차건신의 아들인 차승색과 34세이자 손자인 차공숙과 차공도 형제는 40대 애장왕을 살해한 41대 헌덕왕의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승색과 공숙은 황해도로 피신하여 류백과 류숙으로 변성하고 공도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왕씨로 복성하였다.
□차원부와 차식 3부자 차무일의 58세 차원부(1320-1398)는 고려말 조선초 학자로 호는 운암 시호는 문절이다. 그의 6세인 차식(63세)과 7세(64세) 차천로와 차운로 삼부자는 문장에뛰어나 송나라 삼소(三蘇)[당송 8대가인 소순과 아들인 소식(소동파), 소철 삼부자]에 비유되나 그들이 지은 차원부 설원기가 위서라는 논란에 싸여 있다. □차문이 주장하는 차원부 설원기란? 차씨 집안의 서얼(庶孼)(서외손) 출신이자 조선 개국 공신인 정도전, 조영구, 하륜, 함부림 등이 차원부와 그 일가족을 죽인 사건을 두고 원통한 분을 풀어 달라는 문서이다.(서얼: 서자와 얼자의 합성어로 서자라 함은 맏아들 이외의 모든 아들과 평민 첩의 자식이고 얼자라 함은 천민 첩의 자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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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활동을 잘 하지 않는 개성왕씨 글이기에 공유하니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