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C 대표였던 김준곤 목사가 소개한 MD사역자 문준경 전도사
기독교인이 되기까지
내 신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신앙의 선배는 누구일까? 책에서 만난 많은 성자들, 내가 모시고 배운 흠모하는 스승들, 주님의 제자 같은 사람들 가운데서 복합된 모자이크처럼 나의 신앙의식의 상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심층 심리를 분석해보면 각 사람의 의식의 뿌리는 인류의식의 공동의 호수에 맞닿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인류 전체와 크리스천 전원의 산물일 것이다. 물론 내가 소개하고 싶은 존경하는 스승들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은 너무 많이 알려졌고, 만인의 사표인지라, 나와의 관계를 개인화시키면 오히려 그분들을 격하시키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어 숨겨져 있는 무명의 순교자 한 분을 소개하고 싶다.
내 신앙의 원초적 뿌리
문준경 전도사님은 성결교단에는 알려져 있지만, 한국 교회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6.25사변 때 공산당에게 전남의 낙도 증동리 모래사장에서 59세의 일기로 순교하신 분이다. 그분은 내 아버지의 외사촌과 결혼하신, 우리 가족의 친척이셨다. 그분은 지금은 예수님만으로 밤마다 철야로 지새우는 권사님이신 나의 어머니와 함께, 세상에서 나에게 맨 처음으로 예수님을 소개해주신 내 시골 이모님 같은 분이시고,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나를 맞아 주실 것 같은 분이시다.
또한 나의 가족이 학살되고 나도 죽다가 살아난 6.25때, 하마터면 같은 섬에서 순교의 동기생이 될 뻔했던 분이시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나룻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와야 하는 우리 집에 그분은 종종 찾아오셔서, 몹시 외롭게 사시던 우리 어머니와 머물면서 전도 집회를 열곤 하셨다. 수수한 아주머니처럼 고무신을 신고 과자 선물을 듬뿍 가지고 오셔서 껴안고 기도해 주시곤 하셨다.
초등학교도 다닌 일이 없고, 도레미파를 배운 적도 없지만, 그 분 특유의 낭랑한 목청으로 당시 이성봉 목사님이 많이 부르시던 허사가나 부흥성가, 천당가를 부르면, 우리 집 마당으로 동네 아낙네들과 어린이들과 강아지까지 다 모였다. 그러면 그분은 일장(一場) 전도설교를 시작하곤 했다. 나는 당시에 그분이 무식한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4대 성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전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오시면 잔치 같은 분위기가 되는 것이 왠지 모르게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내 신앙의 혈액검사를 하고 원초적 뿌리 찾기를 해보면 그분은 내 신앙의 지하실에 예수의 씨앗을 최초로 심어준 분으로 발견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죽임당한 여인은 가엾다. 버림받은 여인은 더 측은하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다."라고. 문전도사님은 친정도 시댁도 꽤 잘사는 집안이었다. 열일곱 살 때 암태 문씨 집안에서 증동리 정씨 집안으로 시집왔는데, 결혼 초야(初夜)부터 버림받고 며칠 안 되어 신랑이 집을 나가 다른 섬에서 소실을 얻고 살림하면서부터 잊혀진 여인이 되었다.
시집에서 20년을 살 때, 길쌈하고 바느질하며 들일하고 부엌일 하며 극진히 시부모님을 모셨다. 효부라고 소문이 자자했으나 피눈물 나는 시집살이도 참아야 했다. 손재봉틀로 삯바느질 해서 송아지를 여러 마리 사서는 여러 집에 나누어 주었다가 크면 이익을 서로 나눴는데, 모은 돈은 남편이 가져다가 딴 살림하여 소실과 사는데 써버렸다. 하도 한이 맺혀서 기도문을 써서 천지신명에게 소지(燒紙)를 올린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불쌍한 딸자식처럼 측은하게 사랑해 주었던 시아버지가 그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땅바닥에 글을 쓰고 지우며 글을 익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삼년상(喪)을 치르고 목포에 사는 오라버니의 권유로 셋방 하나를 얻어, 20년 시집 생활을 청산하고 손재봉틀 하나를 가지고 도시로 올라왔다.
예수님과의 만남
그 무렵 성결교단에는 오순절 같은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목포에는 북교동교회에서 이성봉 목사님이 부임하여 축호 전도니 하며 부흥성회에 불이 붙은 때였다. 문준경 전도사님이 그 전도팀의 그물에 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님을 만났다. 이성봉 목사님이 그에게는 직접적인 천사였다. 천국이 있었다. 눈물의 샘이 터졌다. 항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의 뒤로 발 곁에 서서 울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머리털로 씻고 입 맞추었던 여인 속에서 문 전도사님의 삶의 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기에 그토록 오래인 그리움이여!"(어거스틴의 고백). 늦게야 님을 만났으니 그분에게는 밤낮의 구별이 없었다. 밤을 살고 새벽을 살며 열심히 배우고 교회를 섬기며 전도를 했다.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다. 그 나이 37세 때였다. 신앙 성장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교회집회, 장례식, 혼인식 때면 문 집사님은 그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특송을 했다. 일가친척, 친지들 집을 칡넝쿨 같은 연줄을 타고 행상 여인 같이 축호 전도로 누볐다. 첫 전도 여행을 암태면의 친정으로 떠났다. 20년 만에 집을 찾은 불쌍한 생과부 딸을 맞은 부모님의 가슴은 아팠다. 골수 유교 전통의 아버지께 전도하기란 무리한 일이었다.
"네가 시집가서 고생하더니 서양 귀신 들려 실성했구나."하고 오물을 퍼다 머리 위로 퍼부으면서 "썩 물러가라."할 정도였다. 길을 가며 찬송하고 꿈속에서도 찬송했다. 주님의 사랑때문에 한 맺힌 인생 때문에 눈물의 샘은 마를 날이 없었다. 경성성경학교는 성결교신학교였다. 6개월은 전도 실천하고, 6개월은 공부하는 6년제 학교였다. 문 전도사님은 처음에는 청강생이었으나 뒤에 원입생이 되었다. 물론 고학이었다. 마늘장수, 물장수, 삯바느질 등 온갖 일을 했다. 고되고 허기졌지만 꿈만 같았다.
그의 기숙사 방은 '사랑의 방'으로 소문이 났다. 여학생들이 어머니처럼 따랐다. 그의 삶은 항상 사도행전의 원색적인 신앙생활이었다. 한 번은 병든 홀어머니 때문에 울고 있는 여학생을 보고 단 하나의 재산인 손재봉틀을 들고 나가 팔아서 100원을 마련해주었다. 또 한 번은 유일의 유산인 명화병풍을 200원에 팔아 딱한 신학생을 도왔다.
이런 일화도 있다. 6개월의 인턴 실습을 마치고 목포역으로 돈 없이 가고 있었다. 학교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과 행상하는 여집사님이 "돈도 없이 나왔지라우?"라고 말했다. 여집사는 문 전도사님에게 돈 한 푼 없음을 알고 있었다. 문 전도사님은 "사람이 가지, 돈이 간당가?'라고 대답했다. 그 여집사님이 학비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이 그 분 삶의 연속이었다.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
11개 섬을 24시간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니셨다. 그분의 발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나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섬사람들에게 그분은 예수의 증인이었고 편지였다.
증동리교회를 세울 때에는 시숙(媤叔)과 전도받은 시집 친척들, 이만신 목사님 자당(慈堂)을 포함하여 20여 명 성도들과 함께 한 달동안 목재와 기와를 이어 나르고, 터 닦고 흙 일구느라 손발이 터졌다. 그렇게 하여 대초리, 방충리, 우전리, 병풍리, 진리, 재원 등 많은 교회들이 그분의 몸으로 세워졌고 또 지교회들도 세웠다. 그분이 전도해서 키운 성결교 중진 목사인 이만신, 이봉성 목사 외 10여 명의 목사님들, 그들의 제자의 제자들이 오늘도 그 순교 정신을 이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진리교회에서는 그가 키운 이판일 장로, 이판성 집사의 두 가정, 열세 명이 순교했고, 유일한 유족인 이인재 목사님은 그 뒤를 이어 목회를 하고 있다.
렘브란트의 명화 「십자가형」에는 그 현장의 다양한 인물들의 독특한 개성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가장자리에 그림자처럼 희미한 인물 하나가 숨어있다. 렘브란트는 그가 바로 렘브란트 자신이라고 시사한다. 문준경 전도사님 가족들 가운데 나는 저만치 멀리 서있는 렘브란트 같은 존재다. 그러나 내 속에서도 씨앗은 심겨져 퍼지고 있다. "사과 한 알의 씨앗을 셀 수 있어도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
그가 세운 교회들은 일제 때 성결교단 폐쇄령으로 친일 앞잡이들이 빼앗아 경방단 본부로 사용했다. 그는 신사참배 거부로 시달림을 받았다. 성도들이 비밀 예배를 드릴라치면 골목에서 폭행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는 과로와 영양실조로 심한 각혈을 하며 사경을 헤매이기도 했다.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사람들은 빨갱이로 변신하여 온갖 박해와 폭행을 자행했다. 6.25 직전에는 예레미야의 '북에서 남으로 기울어진 끓는 가마'의 경고를 하며 어느 여인보다 많은 우국의 눈물을 흘렸다. 그분은 자신의 순교를 예감했는지 미리 관을 짜놓고 수의를 손수 만들어 놓았었다.
마을의 사제, 만인의 목자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자 몸이 약하니 공기 좋은 섬에 와서 좀 휴양하라고 권해서 나는 친구 목사를 데리고 문 전도사님 댁에서 3개월 동안 식객(食客)이 된 일이 있었다. 그분의 교회나 사택은 차라리 목민센타였다. 무엇이나 의논하고 돌봐주는 곳이었다. 그 집은 항상 너댓 명씩 귀신들린 여인, 반신불수 되어 쫓겨난 오갈 데 없이 버려진 여인들의 숙소였다. 대소변을 받아내느라 방에서는 악취가 났다.
문 전도사님은 밤낮을 교회에서 살면서 새벽같이 큰 바랑같은 것을 들쳐메고 나가 누룽지나 잔치집, 제삿집의 음식을 걷어서 가난한 집에 나눠주는 '대신 거지'였다. 바랑 속에는 김기약이나 연고, 민간 비방약 같은 것이 듬뿍 있어서 병자들을 심방해 부담 없이 약을 먹이고 발라주고는 만져주고 기도를 하였다. 병이 소문나게 잘 나왔다. 신 불신(信 不信)을 가리지 않았다. 초상집도 찾아가고 싸움하는 집도 찾아갔다. 모두의 가난과 고통에 자기 피부를 맞대고 살았다. 그분은 산파는 아니었으나 아기를 받는 데는 누구보다 명수였다.
그 마을은 미신이 많은 곳이었다. 재앙을 입고 동티(건드려서는 안 될 땅을 파거나 그런 나무를 베어서 그것을 맡은 지신이 노하여 받는 재앙)가 나면 무당을 불러 굿하는 것이 관행인데도 많은 집에서 무당 대신 문 전도사님에게 기도를 청했다. 내 친구는 그가 무당 같다고 했다. 나는 "이보다 더 거룩한 무당도 있는가?"라고 했다.
그는 그 마을의 사제(司祭)였고 간호사, 산파, 목자, 만인의 어머니였다. 일제 시대 이 마을에 장질부사(염병)가 돌아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전염이 무서워 버려진 환자들이 많았다. 가족들조차 시체 치우는 일을 기피 했는데, 문 전도사님이 "나는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부담이 없다."며 환자를 돌보고 시체를 매장한 이야기는 소문난 미담으로 전해진다.
내가 신학교에 간 것을 누구보다 기뻐하신 분은 문 전도사님이셨다. 한 번은 내게 찾아와 돈이 있는지 물으셨다. "어떻게 되겠지요."하고선, 그때 마침 미군 부대에 다니던 친구가 가져다준 다이야찐 고약 수천 개를 목회하는 데 쓰십사고 드렸다. 그런데 그것을 집집마다 팔아서 근 1년 학비를 만들어 보내주신 일도 있었다. 나와 친구가 그 집에 머물던 석 달 동안, 기뻐하시며 펄펄 뛰는 생선요리, 젓갈, 풋나물 등으로 지성을 다해 끼니때마다 메뉴를 바꾸어 잔치상을 베푸셨다.
백사장의 순교
6.25 때는 남편과 소실이 붙잡혀 있는 감옥에 매일같이 세탁이니 음식이니 뒷바라지를 해 모두를 감격시키셨다. 지방 빨갱이들은 문 전도사님이 모두의 존경이 크므로 즉결 처분을 못하고 상부인 목포 내무서로 이송했는데, 목포는 이미 빨갱이들이 도망가고 없어서 자동 석방이 되었다.
그런데 문 전도사님은 교인들을 못 잊고 특히 양딸 삼은 백 전도사님을 못잊어 모두가 말리는데도 도살장 같은 증동리로 되돌아와서 붙잡혀 모래밭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죄목은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이란 것이었다. 찔리고 맞으며 개처럼 끌려갔다. 가상(架上)의 칠언(七言)처럼 사뭇 기도를 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전도사님이 백 전도사님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형지(刑地)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분의 모습은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부탁하신 주님을 연상케 했다.
백 전도사님은 그 분을 못 잊어 3년 동안 흰 소복을 입었고, 지금도 새벽마다 눈물로 교회 마룻바닥을 적신다. 그 백 전도사님은 낙도 중의 낙도, 문 전도사님이 세운 재원교회를 지키고 계신다. 1950년 10월 5일,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고 파도소리도 침묵하는 칠흑의 심야에 그분이 30년을 살았던 백사장으로 끌려갔다. 죽창으로 찔리고 발길로 채이고 총대로 찍히어 반죽음이 되면서도 사뭇 저들을 용서하라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스데반과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몸이 벌집이 되기 전 "주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기도했다. 문 전도사님이 순교현장에서 드린 최후의 기도였다. 이 때 문준경 전도사님은 59세였다.
못잊어 하는 사람들
1951년 순교 1주년 되는 그분의 환갑날, 장례추도식이 있었다. 호남지방 성결교 남녀 교역자들이 다 모여 건을 쓰고 상복을 입었다. 전도 받은 교인들, 도움 받고 못 잊어 하는 사람들, 전도 받은 시가집 사람들, 친정 일가친척들, 그를 죽였으나 용서받은 식구들, 동네사람들 등 흰옷 입은 구름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상여 뒤를 따랐다. 서울에서 온 어느 성도는 "김구 선생 장례식보다 추모 인파가 많다."고 했다.
증동리 교회당은 순교의 피 묻은 현장의 모래로 만든 벽돌로 신축되었다. 평소에 그분은 양딸인 백 전도사님에게 자기는 정씨 문중 선산에 묻힐 수 없으니, 자기가 죽으면 그 산 아래 밭의 한 모퉁이에 묻어달라고 했다. 순교 1주기 때 이 얘기를 들은 정씨 문중에서는 전도 받은 분들도 많아 문중 회의를 열었다. 결국 그분은 문중을 빛낸 분이니 선산 중앙에 모시자고 만장일치로 결의해서 지금 그분의 묘는 정씨 문중 선산 한가운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