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죽창에 쓰러진 ‘믿음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전남 신안군 증도는 더는 섬이 아니다. 연육교가 들어서면서 뭍이 됐다. 병풍도 소악도 화도 등의 유·무인도를 포함한 33.62㎢ 면적의 면(面) 중심지가 증도다. 2014년 기준 1679명이 산다. 근년 들어 ‘한국의 가봐야 할 여행지’ 2위에 꼽히기도 했다.
크리스천에게 증도는 손꼽는 성지다. 순교자 문준경(1891~1950) 전도사의 발자취 때문이다. 문준경은 일제강점기 암태도 소작쟁의 사건으로 유명한 신안 암태도 태생이다. 그는 17세에 증도 총각과 결혼하면서 구속사적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려 한 것 같다. 문준경은 한국교회의 자랑스런 순교자다. 구원의 확신과 이웃을 위한 희생으로 지상에서 ‘ 아름다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1950년 10월 5일 새벽. 증동리교회에서 800m 떨어진 바닷가에 죽창과 총으로 무장한 내무서원들이 중동리교회 교역자 문 전도사를 내팽개쳤다. 그가 딸처럼 사랑한 30대 초반의 백정희 전도사와 함께였다. 내무서원들은 다름 아닌 인민군, 빨치산, 자생 공산당원들이었다. 유산계급과 미 제국주의자 타도를 외치던 자생 공산당원들 대부분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던 이웃이었다. 사탄의 이념 주입은 빠르게 공동체를 파괴했다.
“문준경, 새끼 많이 깐 씨암탉!”
그들에게 문준경과 백정희는 미 제국주의자의 앞잡이요, 종교라는 아편을 퍼뜨리는 인민의 적이었다. 특히 문준경은 증도를 중심으로 서남해안 인민에게 아편을 퍼뜨리는 수괴였다. 새벽 2시. 익숙한 갯냄새와 해송 바람소리가 문준경의 코와 귀에 닿지 않았다. 죽음이 눈앞이었다. ‘새끼 많이 깐 씨암탉’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로마 군병의 모욕과도 같았다. 하지만 대속의 면류관을 쓰려던 문준경에게 저주가 담긴 말은 티끌조차도 되지 못했다. 그들은 죽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고 했던가. 그 고통의 와중에도 문준경은 “제발 백 전도사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하나님 아버지,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죽어가는 목숨에 총대와 칼이 날아들었다. 처참했다. 확인 사살이 이어졌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였다.
그 순교지는 67년이 지난 오늘 교계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 관리하고 있었다. 시신은 순교 직후 증동리교회 뒷산에 매장됐고 2005년 지금의 순교지로 이장됐다. 1964년 그의 신앙의 제자들은 ‘여기 도서의 영혼을 사랑하시던 문준경 전도사님이 누어 계시다’는 추모석을 세웠다. 추모석 뒷면에는 이렇게 새겼다. ‘…빈한 자의 위로되고 병든 자의 의사, 아해 낳은 집의 산파, 문맹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 압해 지도 임자 자은 암태 안좌 등지에 복음 전도, 진리 증등리 대초리 방축리 교회 설립, 모든 것을 섬사람을 위하였고 자기를 위하여는 아무 것도 취한 것이 없었다. 그대의 이름에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히 깃들기를. 우리들의 어머니.’ 그는 죽임을 당한 그 자리에 누워 있다. 부활의 때에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순교터에선 그가 개척했던 증동리교회, 그리고 순교자기념관이 보인다. 그 뒤로 증도와 부속 섬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정봉이 완만하다. 문준경은 생전 산정봉 정상에 올라 기도를 했다. 남편으로부터 소박 아닌 소박을 맞은 여인, 자식 없는 어머니, 시집 귀신 되라며 내치다시피한 친정, 문맹에 고달픈 시집살이, 더구나 예수쟁이…. 문준경은 염전집 귀한 딸이었다. 그럼에도 서당교육은 남자들에게만 해당됐다. 꽃다운 나이에 삼종지도의 길에 들어서야 했다. 부잣집 막내아들 남편은 결혼 초기부터 남과 다름없었다. 일본을 왕래하며 신문물을 접했던 남편에게 쪽진 머리의 아내는 구시대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는 홀로 시집살이를 하며 견디고 또 견뎠다.
시아버지는 문준경의 총명함을 알고 언문을 가르쳤다. 시아버지가 준 배움의 붓 한 자루가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여전히 남편은 외지를 나돌았다. 동네 사람들은 소박맞았다고 했다. 소실을 얻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스물일곱 살이 됐을 때 가장 의지했던 시아버지가 죽었다. 자신을 극진히 아껴주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큰 시숙과 생활하게 돼 갈 곳이 없어진 그녀는 목포로 건너와 단칸방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다.이런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한줄기 놀라운 빛으로 다가왔다.예수를 믿으면 삶의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교회가 유명한 성결교부흥사인 이성봉(李聖鳳)목사(당시 전도사)가 초가집 한간을 얻어 막 개척을 시작한 북교동성결교회였다.
이성봉목사의 설교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낙도 없었던 그녀에게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안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대와 기쁨을 채워 주었다. 1년 만에 학습과 세례를 받고 개인전도와 축호전도에 가장 열성을 보이는 성도가 되었다 성령의 불길을 받은 그는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 식구들을 구원하고 싶어서였다. 화난 아버지는 수채 구정물을 퍼부으며 내쫓았다.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각오한 사도의 길이었다.
집사직분을 받은 그녀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서원하고 죽을 때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경성성서학원(서울신대전신)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기도한 결과 청강생으로 입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결혼한 여자는 입학할 수 없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도 정규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학금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던 그녀는 이성봉목사의 보증과 요청으로 결국 정규학생이 되어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문전도사의 전도열정은 남달라 방학마다 고향으로 내려가 33년 진리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35년 증동리교회,36년 대초리교회를 차례로 건립했다.방축리에는 기도소를 지었다.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음만으로 교회를 세운 그녀에게 수많은 어려움과 고초가 쉬지 않고 따랐으나 기도는 언제나 승리를 안겨 주었다.
졸업 후에도 대도시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 온 문전도사는 나룻배를 타고 이섬 저섬 무교회지역을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녀는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노릇,우체부노릇을 마다하지 않았고 섬주위 돌짝밭길을 얼마나 걸었는지 1년에 고무신을 아홉 컬레나 바꿔 신었다고 전해진다. 문전도사의 열정적인 기도는 신유의 은사까지 더해 정신병자, 중풍병자를 고쳐내 ‘섬 여의사’란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성결교단이 강제해산됨과 동시에 문전도사가 개척한 증도교회에까지 여파가 미쳤다. 그녀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며 목포경찰서로 불러내 고문을 일삼았다. 이 때마다 문전도사는 찬송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를 부르며 에스더서 4장16절 “죽으면 죽으리라”를 수없이 되풀이 했다. 아무리 회유와 협박이 이어져도 굴욕적인 신사참배는 허락치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 공산당을 따르는 좌익들의 활동은 이 작은 섬까지 영향을 미쳤다.특히 6·25 후 지역 전체가 인민군의 손길에 넘어가자 평소 교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이들이 문전도사와 성도들을 못살게 굴었다. 50년 10월 4일.국군이 증동리섬까지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악의에 찬 공산당원들은 교인과 양민들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이끌어 냈다.그리고 한사람씩 단도로 내려쳐 죽이는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 문전도사에게 와서는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구만”이라며 몽둥이로 내리쳤고 그녀는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말을 남기고 이어진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 당시 59세.이 사실은 옆에 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수양딸 백정희 전도사에 의해 알려졌다.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 톨의 밀알이 되어 30배,60배,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다.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제자들에 의해 발굴된 순교자
문준경 생애의 절정은 반경 1~2㎞ 내에 있는 순교터, 증동리교회, 순교자기념관, 산정봉 정상 기도바위이다. 그는 남성 목회자 중심의 근현대기에 여전도사였기 때문에 묻힐 뻔한 인물이었다. 누구도 남도 섬 구석의 여전도사 순교를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백정희 전도사와 마을 사람들의 증언, 경방단과 벌인 소송에서의 교회개척기 진술서 등이 ‘신화화’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신앙의 역사가 됐다. 또 이성봉 이명직 장석초 김응조 목사라는 성결교의 스승들, 그 지역 신앙의 제자 김준곤(1925~2009·한국대학생선교회 설립자), 이만신(1929~2015·부흥사), 정태기(크리스찬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목사 등의 생생한 증언도 큰 역할을 했다.
12일 산정봉 기도바위. 누군가 마른 솔가지를 주워 바위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두었다. 문준경 전도사가 고난 받는 형제와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딱 그 장소다. 그 봉우리에선 멀리 한반도 지형과 꼭 빼닮은 숲이 보인다. 저 숲을 에스더와 같은 지혜와 담대함으로 살았던 문준경도 봤을 것이다.
문준경 제자 목회자의 증언
김준곤 “소화제니 먹으라고 주시고 때로는 아픈 부위를 만지시며 할머니가 손자의 배를 쓰다듬듯 하셨습니다. 그때 기도하는 모습이 제 마음에 확 박혔습니다. ‘이 자매는 돈도 없고, 약도 없고, 여기는 병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십시오’라고 하셨죠. 신기하게 낫습니다. 신자 불신자 가리지 않고 치유하셨습니다.”
이만신 “어려서부터 이모할머니 문준경 전도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늘 가까이에서 뵈면서 그분의 신앙지도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것도, 그분의 영성이 자리했던 것을 느낍니다.”
정태기 “문 전도사는 정씨 문중 어른인 제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우리 집에 자주 들렀습니다. 어린 시절 그를 만나면 울다가도, 시무룩하다가도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가 계시는 동안 전 어른들 눈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저녁 무렵 우리 집에 들렀다가 몇 시간 후 순교하시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