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 걸인 섬긴 '단벌의 천사' MD사역자 방애인
어느 날 길가에서 사람들이 정신병자인 한 노파를 에워싼 채 놀리고 있었다. 놀림을 받는 노파는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때 어여쁜 한 처녀가 눈물을 글썽인 채 그 노파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노파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노파를 희롱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구경꾼들도 처녀가 마치 어머니인 듯 노파의 손을 잡고 데려가는 모습을 보고 감격의 눈물에 젖었다. 노파 앞에 나타난 천사는 방애인(1909~1933)이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다가동3가 전주서문교회 역사자료실엔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이란 책자의 다양한 개정판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 3대 담임이었던 배은희 목사가 지은 책이다. 강순명 목사와 함께 독신전도단을 만든 창시자로서 그 자신도 성인의 풍모를 지녔던 배 목사가 감히 ‘조선 성자’라고 일컬었던 이는 이 교회 안팎에서 봉사활동을 벌이다 겨우 스물네 살로 생을 마감한 처녀였다.
서문교회를 떠나 완산구 효자동의 전주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건물에 들어서니, 직영하는 어린이집에선 아이들이 명랑하게 뛰놀며 재잘대고, 사무실에선 동남아시아 출신 새터민들의 고충 상담을 하고 있다. 이곳에선 5년 전부터 ‘방 선생 본받기 운동’을 벌이고 있고, 올해부터는 ‘방애인 기념상’까지 제정했다. 이명자 사무총장은 “전주YWCA 초기 활동가인 방애인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한 활동들”이라고 말했다.
애인은 황해도 황주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거쳐 개성 호수돈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열여덟 살에 전주 기전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전주에 왔다. 당시로선 으스댈만한 신여성이었지만 그는 겸손하고 성실했다. 그는 3년 만에 모교인 황주 양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러자 서문교회 1000여 명의 교인이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 애인은 “전주에 와서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이렇듯 눈물로 아쉬워하니 두렵기 짝이 없다”면서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성심을 다해 봉사할 결심을 했다.
그의 뜻대로 2년 뒤인 1931년 9월 기전여학교 교사로서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애인은 2년 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애인은 황주에서 살던 30년 1월 10일치 일기에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들었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라고 했고, 11일엔 “나는 어디로서인지 세 번 손뼉 치는 소리를 듣고, 혼자 신성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걸음이다”라고 했다.
성령 체험 후 기쁨에 넘쳐…어렵고 힘든 사람 위해 헌신
그렇게 성령을 체험해 겉모습을 꾸밀 필요가 없을 만큼 마음이 부유해지고 기쁨에 넘쳤던 것일까. 부잣집 딸과 신여성 처녀로서 단장하던 값진 옷감도, 향수와 크림도 그의 소지품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단 한 벌의 옷뿐이었다.
1932년 여름엔 수재가 발생해 이재민들이 전주 다가공원에 밀려들었다. 이들은 가을이 돼 찬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자 친인척이나 지인의 도움을 받아 하나둘씩 떠나갔다. 오직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 가족만이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애인은 이를 보고 자신의 필수품인 시계와 만년필을 팔아 셋방을 얻어주었다.
전주엔 그나마 그런 부모조차 없이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애인은 그런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짓기 위해 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전주 시내 8000여 호를 가가호호 방문해 한 푼 두 푼씩 모아 마침내 고아원을 열었다. 방학이 돼도 고향집에 돌아가지 않고 전주 교외 시골에 야학을 열어 글을 깨치지 못한 농촌 여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던 애인은 한밤중에 돌아오면서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찾아 들쳐 업고 오곤 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깎아주고 검은 때가 덕지덕지 낀 아이를 목욕시켰다. 얇은 옷 단벌로 겨울을 나는 딸이 안타까워 어머니가 보낸 솜옷도 입어보지도 않은 채 모두 거리의 걸인들에게 주었다.
애인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길거리에서 무뢰배들이 무섭게 싸울 때 어떤 사람도 그 앞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애인은 두려움 없이 다가가 눈물과 온유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면 뭔가에 홀린 듯 싸우던 이들이 웃으며 악수하곤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열병을 얻어 숨을 거두자 전주 시내는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던 배은희 목사는 애인의 전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세상을 비관하는 성자가 아니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였다. 그는 스승이 되려는 교만한 성자가 아니요, 형제의 발아래에 엎드려 겸손히 섬기는 성자였다. 그는 죄인에 대한 책망의 성자가 아니요,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였다.”
1925년 이후부터 강인한 의지로 독신전도단을 지휘하여 오던 배은희 목사에게 한결 부드러움을 가지게 하는 교훈적인 인물이 있었다. 바로 방애인(方愛仁) 선생이었다. 황해도 황주 출신의 그녀는, 1926년 3월에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18세의 나이로 다음달 4월에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전주에 온 그녀는 곧 서문밖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이후로 1926년 4월부터 3년간, 1931년 9월부터 다시 3년간 전주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녀의 6년여에 걸친 전주에서의 생활과 행동 및 신앙 태도는 뭇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온유·겸손하고 청순한 자태로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모범이 되었다.
방애인 선생은 주일 오전에는 완산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서문밖교회의 확장주일학교인 뒷골·전룡리·바구말의 유년주일학교를 지도하였다. 그녀는 기전여학교 학생 몇 명을 데리고 세 곳을 돌며 함께 지도하였고 밤에는 기전여학교 기숙사생들을 인솔하고 서문밖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여 배 목사의 강설을 들으며 신앙 지도를 받게 하였다. 평일에는 학교의 수업을 마친 후 거리로 나와서 걸인 수용소와 빈민들을 돌보며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자기 주머니를 털어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가식없이 돌보았다. 1932년의 큰 수재를 당했을 때에도 그녀는 이재민 수용소에 자주 들러 구휼에 힘썼다. 이렇게 구제의 삶을 실천하다가 그녀는 드디어 고아원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고, 당시 그녀의 신앙 상담자였던 배은희 목사의 지도를 받아 전주서문밖예배당 근처에 전주고아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고아원 사업은 서문밖교회 부인조력회, 전주 여자기독청년회, 전주 신흥학교 기독학생회 및 사회 유지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후원을 받았다. 이 젊은 여성이 고아들을 위해 건물을 마련하고 수리와 운영을 감당해낸 것이다. 성품이 강성인 배은희 목사도 그녀의 열성에 감복하였고 교회 차원에서 그 사업을 적극 후원하였다. 특히 전주 신흥학교 기독청년회에서는 매년 겨울에 ‘동정메달’이라는 사랑의 배지를 만들어 토요일 오후에 전교생이 나서서 각 기관과 각 가정을 방문하며 판매하였고, 판매 수익금은 전주고아원을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특히 무뚝뚝한 남학생들의 사랑 실천 운동은 여러 사람에게 정신적 교훈이 되었다. 이로써 그녀가 젊은 미혼 여성임에도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방애인 선생’이라고 깍듯이 선생 칭호를 붙여 불렀다. 그녀의 별명은 참으로 많았다. 금식기도를 비롯하여 기도를 열심히 하였기에 ‘기도의 사람’이라 하였고, 굶주린 걸인을 먹이고 치료받게 하여 ‘걸인과 병자의 친구’라 하였으며, 가난한 자를 긍휼로 돌보아 주었기에 ‘가난한 자의 천사’라고 불렸다. 배 목사는 그녀를 칭송하여 ‘거리의 성자’라고까지 불렀다.
방애인 선생은 1933년 6월 30일 방학식을 마치고 고향 황주에 가서,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을 받아야 함에도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전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고향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인도에 열성을 쏟다가 몸져 눕고 말았다. 그러나 개학날이 다가오자 강한 책임감으로 전주 학교로 일단 복귀하였으나 예수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세는 더욱 위중해져 9월 16일 묘령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의 사랑의 실천에 감화를 받은 학생들은 물론 동료 교사와 서문밖교회 여성 교인들, 그리고 전주 여자기독청년회원들, 교계와 사회에서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이들이 애도하며 소복 차림으로 장례의 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녀에게 감화를 받은 배은희 목사는 『방애인 소전』이라는 소책자를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방애인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쳤다. 그는 교사라기보다는 차라리 학생들의 어머니였다. 학생이 병이 났을 때에는 밤을 새워 기도해 주었고, 슬픔과 괴로움이 있을 때면 은밀한 방에 데리고 가서 기도해 주고 위로와 격려해 주고, 벌 받을 짓을 한 학생을 발견하면 고요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눈물로 권면하면서 기도해 주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학생을 보면 옛날 위인들의 전기를 이야기해 주면서 위로하고 새 용기를 주면서 기도하였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이 있으면 그 부모를 찾아가서 좋은 말로 위로하고, 가정 사정이 어려운 학생은 자기의 박봉을 떼어 도와주었다. 졸업생들의 이름을 적어놓고 기도해 주었고, 졸업 후 갈 길이 막힌 학생은 스스로 상담하고 지도해 주었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학교 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며 계속해서 그들의 내일을 위해 은밀히 금식하며 기도하는 거룩한 사랑의 교사였다. 그만큼 학생들도 그를 따랐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하며 따르던 학생들은 부모의 사랑이 없이는 살아도 방애인 선생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학생 가운데 실력이 모자라는 저능아가 있으면 따로 가르쳐 주고, 그 학부모 집에 찾아가 복습에 주의할 점을 일러주어 낙제생이 생기지 않게 하였다.
1933년 9월 1일 개학식이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고 9월 16일 그는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전주시내에 금방 알려졌고 방 애인 양의 장례식 때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로 향하여 가는 소복 입은 수십 명의 여자들의 눈물과 울음소리, 수 백 명의 학생들의 울음소리는 가히 전주 시내를 온통 슬픔의 장소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전주 서문밖 교회의 배 은희 목사님은 이런 글을 남기셨다.
“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쌓이고 쌓인 일거리를 두고 어떻게 차마 가셨는가,
그대의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던 전주를 그렇게도 쉬이 떠나시었는가,
고아를 업어주던 그대의 등에 짐이 무거워 가셨는가,
정신병자를 쓸어안고 울던 그대의 가슴의 심장이 터져 가셨는가,
문둥병자를 어루만지며 울던 그대의 눈에 눈물이 다하여 가셨는가,
옷 벗어 걸인 주고 추위를 못 견디어 가셨는가,
남의 짐을 들고 가다가 팔이 아파 잠깐 쉬려고 가셨는가,
쌓이고 또 샇인 일을 누구에게 맡기고 가셨는가,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오오 ! 조선의 청년들이여, 그대들이 하는 일이 그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