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단교에 서서
이 대 영
ldy7173@hanmail.net
중국 단동의 중련호텔에서 북녘 땅을 바라보았다. 압록강에 눈보라친다. 강 건너 신의주의 하늘을 뿌옇게 뒤덮고 있다. 연기 없는 굴뚝이 음산스럽게 우뚝 서 있다. 내 어릴 적 후진국 굴레에서 맴돌던 암울했던 시절, 그 회색도시처럼. 밤이 되었다. 다리의 이쪽에선 화려한 불빛과 함께 현란한 레이저광선을 쏘아 올린다. 단교건너 북녘 땅엔 암흑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 조·중의 국경은 빛과 어둠으로 구분되어 지고 있다. 옛적 수풍발전소의 위용은 어디 갔을까. 내 마음은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다 못해 처연해진다. 6·25동란으로 남편을 잃고 한 평생을 홀로 사신 어머니의 생애, 저 너머 북녘 땅이 없었으면 어떠셨을까. 눈 내리는 그날 밤, 압록강단교에 서서 아련히 떠오르는 격정의 지난세월, 벌써 초로의 육십 줄에 들어선 내 살아온 길 더듬대 봐도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 밀려드는 건 왜일까. 12년 전 어머니께서 76세의 일기로 작고하셨다. 31세에 외기러기처럼 홀로 사신 어머니를 잃은 불효자는 슬픔을 가누지 못했었다. 어머니의 일생을 되짚어보며 정신없이 한권분량의 상주일기를 썼다. 그러나 마음을 드러내는 글을 쓴다는 게 참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제 베이징에서 내가 탈 단동 행 오후 4시 비행기는 무려 일곱 시간이 넘게 출발이 지체되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다가 6시가 지나서야 안내방송이 나왔다.
“단동 행 비행기에 탑승할 손님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단동비행장에 눈이 쌓여 치우는 중입니다. 우선 간단한 도시락과 광천수를 타가시기 바랍니다.”
언제 출발예정이란 말은 없었다. 눈이 그치면 치워서라도 이륙시킬 작정인가보다 기다리는 수밖에. 결국 11시가 넘어 출발한 비행기는 자정이 지나 단동비행장에 내려앉았다. 활주로 곁엔 치운 눈덩이가 산이 되어 시베리아 동토의 땅을 방불케 했다. 다음날, 2층의 레스토랑에서 아침식사 중이었다. 어제 연착된 비행기에 동승해온 서양인의 일행인 중국인 젊은이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얘기인즉, 그들은 핀란드 국영방송국 북경주제 특파원이란다. 핵문제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북한에 관하여 압록강을 중심으로 특집방송을 준비한다고 한다. 한국인인 나의 일상적 하루를 취재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 북경사무소 직원인 강 경리와 나란히 앉아왔던 그 서양인에게는 내가 유독 한국인으로 보였나보다. 탑승하고부터 강 경리와 서툰 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단동에 무엇 하러가느냐?”라고 하며 관심을 갖고 물어 우리의 일정을 알려주었단다. 그들도 조·중 교역의 관문인 압록강철교와 신의주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에서 자고 나서 레스토랑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우리를 찾았나보다. 내가 자기네의 특집방송에 적합한 대상자라 여기었던지 식탁에 앉자마자 중국인 통역을 시켜 인터뷰요청을 했다.
“저 금발의 여자가 기자이고 남자는 촬영 기자라는데요.”
“이 친구는 통역이구요.”
금발의 여기자는 나를 향해 서양인 특유의 미소를 보냈다. 나도 그녀에게 손을 들어 싱긋 웃었다.
눈 내린 단동시내는 건물도 길도 하얗다. 아파트 분양사무실에 가고자 길을 나섰다. 미끄러운 눈길을 소걸음 거닐듯 조심스레 걸었다. 핀란드 카메라 기자는 달음질로 우리보다 오십여 미터나 앞서 내달아 촬영하더니 서류에 사인하는 모습, 취·등록세 내는 장면까지 찍고 찍었다.
아파트 동방명주 15동 1501호 거실에서 내려다보면 오른쪽엔 6·25때 폭격의 산물인 단교가, 뒤엔 단동시내 너머 기암괴석의 산자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위화도 건너편 북녘 땅 초승달모양의 백사장을 살포시 휘돌아 온 강물은 넘실넘실 춤을 춘다. 저 너머 신의주시, 지난 가을엔 강변시가지 지나서 황금 들녘이 펼쳐져 우리강산 들녘처럼 풍요하더니 지금은 횅해져 스산하다.
강 너머 북녘 땅을 바라보며 금발의 여기자와 나는 대담을 나눈다. 인터뷰다.
여기자 : 풍광이 좋습니다. 왜 이곳에 아파트를 구입했나요? 혹여 북에 가족이나 친척은 있는지요?
나 : 앞으로 남ㆍ북간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 서울에서 평양 신의주를 거처 베이징까지 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내 조국 끝자락 신의주를 이곳에서 바라만보아도 얼마나 흐뭇하겠어요. 북에 친인척은 없습니다. 오히려 6ㆍ25동란 동족상잔의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인터뷰는 삼십 여분이나 계속되었다. 내용인즉, 북한의 핵보유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오르는 국제적인 대응문제 등이었으나 질의응답하면서는 예상보다 더 진지하게 대담을 나눌 수 있었다. 조건을 전제로 분단국가의 같은 민족으로서 이 인터뷰가 혹 거두절미되어 나의 몇 마디만 인용하여 방송매체의 의도대로 방송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말을 빼놓지 않았다. 마무리되는듯하여 중국특파원으로서 남ㆍ북한을 드나든 당신이 북한을 보는 정세가 더 정확하리라며 내가 질문을 던졌다.
“핵을 보유한 북한의 의중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살 어린애가 먹을 것 달라고 보채는 것 같잖아요.”
싱거운 답변이다. 금발의 여기자는 양어깨를 들썩이며 신나게 웃었다.
“그렇게 잘 알면서……”
나도 덩달아 소리 내어 웃었다.
단동시내에는 도시규모에 비해 이북식당이 여러 개 있다. 《삼천리》이북식당에서 점심으로 김치와 된장찌개 등을 시켰는데 그들은 녹두 부침을 더 잘 먹었다.
단동시내의 고미술품가게로 가는 나를 따라 그들도 차에 올랐다. 요령성에 속한 단동은 근거리에 접한 관전 현이 만주족의 자치구로 되어있어 소수민족으론 만주족 다음 조선족이 많은 곳이다. ‘바늘 가는데 실 간다.’ 는 속담처럼 조선족이 많아서인지 한국인도 많이 살고 있다. 그 중에 고미술품가게 하는 사람이 흔한데 이는 이북으로부터 고미술품의 밀반출이 성행하여 그렇단다. 좀 떨어져있긴 해도 고구려 환도성이 있었던 길림성의 집안 현에 광개토왕비와 능, 고분군 등 고구려의 유적이 많은 것도 이유 중에 하나리라. 단동시내 한복판에 쌍성대하라는 5층 건물이 있다. 공예품과 고미술품을 취급하는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그중 수십여 점포는 한국인이 주인이다. IMF환란 전까지는 수십여 억 원씩 벌었다며 그들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게 그 당시의 반에 반도 안 되는 싼 시세란다. 쌍성대하의 가게에는 우리와 중국의 고미술품들이 진품과 모작으로 공존하는 곳이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구입한 것들이 설령 진품일지라도 국내에서 구입하는 가격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우리의 고미술품이 잘 진열된 가게에 들러 그들에게 우리나라 고미술품을 눈여겨보게 하였다. 특히 이조백자의 선의 수수함과 고려청자의 그 기품을 설명하여도 그들은 관심이 없는 듯 지루해 하는 눈치여서 해주단지 소품을 하나씩 선물한 후 방송을 위한 녹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파트 구입하러 지난 5월에도 단동에 왔었다. 짬을 내 압록강 관광차 유람선에 우리 일행만이 탔다. 11시경 만조 때라 강물이 불어나 신의주 강둑에 불과 일 이십여 미터 앞까지 접근하였다. 북녘에서 싱그러운 봄바람이 불어왔다. 강변의 연초록 수양버들이 너울거린다. 2층으로 지어진 《압록강각》현판아래 손바닥만 하게 붉은 글씨로 경축 5·1절이라 써 붙여있었다. 노동절이다. 스피커에서는 인민을 위한 노래들이 따사한 햇살처럼 울려 퍼졌다. 경축일 휴일이라 강변엔 아이, 어른 꽤나 나와 상춘의 야유野遊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안녕하세요.”소리쳐보고 손을 흔들어 한민족임을 나타내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거의가 관심이 없다는 듯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강둑에 걸터앉은 또래의 네 소년은 집게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그들의 표현인양 무언의 익살(조용히 하세요?)을 보낸다.
군함모양 회색으로 칠해진 낡은 선체에서 작업하는 몇 명의 인부는 아예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분단 반세기가 넘는 이데올로기의 장막이 우리를 갈라놓았을까? 한겨레의 분단의 이질감은 막연히 밀물 썰물처럼 강물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날 압록강에서 신의주가 맞바라보이는 고층아파트를 구입하고자 계약했다. 또 이북에서 반출되었다는 도자기도 구입하였다. 내가 구입하는 한 점 한 점이 우리민족의 것이기도 해서다.
이번에는 아파트가 준공되어 입주에 필요한 절차를 마치고자 왔다. 핀란드 특집방송에 생각지도 않던 인터뷰를 하고 늦은 밤, 눈 내리는 압록강단교에 서서 나는 불현듯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래서 어머니의 일생을 되짚어보며 열정으로 썼던 그 글을 마무리하여 출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로 인해 묻힐 뻔했던 상주일기 『하늘진달래』는 어머니의 그리움 찾아 지금 다시 피어오르고 있다.
첫댓글 고향의 양지바른 산 허리에 빼꼼히 고개 내밀어 하늘 진달래는 이제 막 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