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줄 아는 사람
곽 흥 렬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면 그에 따라 자연히 느는 것이 많다. 눈가에 잔주름이 늘고, 머리에 백발이 늘고, 밤중에 화장실 드나드는 횟수가 늘고, 일상사에 잔소리가 또 는다. 울어야 할 일이 잦아지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인가 한다. 주위의 가까운 이들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서도 울고, 누군가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듣고서도 운다. 내 스스로의 사람살이가 답답하고 고달파서 울기도 한다. 어쩌다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우는 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내밀한 속울음이다.
세상이 날로 각박해져 가기 때문일까, 마땅히 울어야 할 일에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널려 있는 시대인 것 같다. 대신 걸핏하면 웃기를 잘한다. 그다지 웃을 만한 일이 아님에도 억지웃음으로 포장까지 하려 든다. 길들여진 처세술은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득이 됨을 예민한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차린다.
울어야 할 때 울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차가운 사람이다. 비정한 사람이다. 아니 무서운 사람이다. 어쩌면 그는 희로애락에 초탈한 부처 같은 성인이거나, 아니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도척盜蹠 같은 위인일지도 모른다.
울음을 속되다고 치부했던 까닭에서이리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반가班家의 후예는 눈물이 너무 흔하면 못쓴다는 엄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특히나 남아는 일생 동안 꼭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배웠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울고, 부모가 죽었을 때 울고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 울고, 그 외에 눈물을 보이는 것은 사나이답지 못하다고 일렀다. 이러한 가르침이 은연중 솔직한 감정 표현을 억눌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마땅히 울 일에 일부러 울음을 참는다는 건 너무 억지스럽다. 심지어 웃어야 할 때에도 도리어 눈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사람살이 아니던가. 노인대학이나 복지관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몸짓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려 한다. 그들이 얼마 뒤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는 슬픈 종족인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 어찌 연민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랴. 보육원 같은 불우시설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장애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내 가슴이 아려 온다. 앞으로 그들에게 지워질 세상살이의 짐이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이다. 그러니 어찌 애처로운 감정이 솟아나지 않으랴.
어렸을 적에는 그저 웃을 일만 많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걸핏하면 까르르 까르르 웃음보가 터지곤 했다. 어리숭한 친구 골려 먹느라 웃고, 선생님 별명을 불러대며 웃고, 엄마를 속여 놓고서 또 웃었다.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개가 그랬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철이 없었을까 싶을 만큼 참 치기 어린 행동이었던 것 같다. 이제 한 해 두 해 나이테가 감겨 갈수록 웃을 일은 줄어들고, 그 대신 울어야 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
어저께도 O대학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금 울고 왔다. 아직은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나이임에도 먼저 세상을 등진 죽마고우와의 영원한 별리 앞에서 어찌 한 방울의 눈물이 없을 것인가. 어떨 때는 남의 눈을 봐서 그저 우는 척 시늉이나 하고 말지만, 이럴 때는 정말 감정이 북받쳐서 저절로 울음이 나온다.
사람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우는 연습에 길들여지는 일이다. 흐르는 세월 따라 삶의 무게 중심이 차츰 웃음 쪽에서 울음 쪽으로 기운다, 웃음의 귀착점은 마침내 울음이므로. 아이들도 너무 웃으면 종당엔 일쑤 울음으로 끝이 나지 않던가. 그래서 어른들은 지나친 웃음을 경계하여 “저놈이 저러다가 결국 울고 말지”라는 말로 염려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마라도 맞대고서 같이 울어 주고 싶다. 피붙이를 대하는 마음으로 따뜻이 보듬어 주고 싶다. 그들은 세상살이라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쓴잔을 마신 약자들이기에, 그 쓰라린 가슴을 보듬어 주며 아픔을 함께하고 싶다. 슬픔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고 했으니, 아무리 큰 불행일지라도 더불어 울어 줄 이가 있다면 이겨 내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아서이다.
심화心火의 병으로 고통 받는 이에게는 울음이 최고의 치유제가 된다. 웃음은 스트레스를 날려 주지만 울음은 카타르시스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이리라, 많이 웃고 나면 마음속이 허전해지는 데 반해 실컷 울고 나면 가슴속이 후련해진다. 이것이 울음의 본질적인 속성이며 가치가 아닌가 한다. 웃음이 엔도르핀을 자아낸다고 하지만 울음이 생성해 내는 엔도르핀 수치에는 까마득히 미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울음의 엔도르핀은 웃음의 엔도르핀과는 아예 그 성분 자체부터가 다른 성싶기도 하다. 환희심이 밀려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는 엔도르핀의 사천 배가 넘는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하지 않는가.
천박스러운 웃음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그만큼 세상이 진중함을 잃고서 부박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텔레비전 앞에 죽치고 앉아 ‘웃음천국’이니 ‘폭소대작전’이니 하는 따위의, 억지웃음으로 인기를 끌려는 코미디 프로에 넋을 놓고 있는 사람들, 이들이 오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증거한다. 각다분해진 세상이 평소 얼마나 육신을 혹사하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면, 그들은 이런 데서 휴식을 찾고 지친 마음을 위로 받으려 드는 것일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칠 때면 적이 우울해진다.
우리 조상들은 치자다소癡者多笑라고 하여 실없는 웃음을 경계했었다. 웃음이 지나치면 어쩐지 사람이 경망스러워 보인다. 도무지 믿음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기야 웃음도 웃음 나름이겠지만, 어떤 웃음 뒤에는 음충맞은 꿍꿍이수작이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래서 그런 웃음과 대면할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의 더듬이를 곧추세우게 된다.
눈물이 흔한 사람은 그만큼 마음에 때가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의 소유자임이 분명할 것 같다. 나는 때때로 진실한 울음에서 가슴을 녹여내는 순정한 인간상을 만나곤 한다. 분별없이 웃음이 헤픈 사람치고 생을 진지하게 사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나이 들면서 눈물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생에 대한 진정성이 높아 간다는 방증일 터이다.
울어야 할 때는 마음 놓고 실컷 울어 볼 일이다, 울고 있는 모습처럼 인간적인 것이 없기에.
<'한국산문' 202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