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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제의 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 폭이 62m, 동서로 길이가 230m에 이르는 1호갱의 지하군대는 돔형 건물로 덮여있다. |
ⓒ2007 조수영 |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 즉 테라코타를 말한다. 진시황제는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기 위해 병마용들을 만들었다. 진시황릉의 순장품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진시황제의 무덤 속이 아니라 진시황릉에서 2km 떨어진 곳에 있다.
2천 년 동안 역사에 묻혀 있었던 병마용들
병마용들은 2천 년을 지하에 묻혀 있다가 1974년 양지발이라는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비록 그때 정부로부터 받는 상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 병마용 박물관 안에서 클린턴과 찍은 사진을 뒤에 걸어놓고 사인을 해주며 돈을 벌고 있었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다. 8천여 개의 실물 크기 도용(陶俑)과 수백 필의 도마(陶馬), 1백 여승의 나무전차, 그리고 대량의 청동병기가 발굴되었다.
이곳은 얼마 전까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지금은 그러한 제한이 풀려서 카메라뿐만이 아니라 캠코더까지 촬영할 수 있어졌다.
▲ [왼쪽 사진] 360도 원형극장에서는 당시 병마용의 제작과정을 보여 준다. [오른쪽 사진] 1호갱의 입구. 반원형의 돔으로 싸여있다. |
ⓒ2007 조수영 |
여행 2일(8월 4일), 서안의 여름은 무더웠다. 40도가 족히 넘는 기온에 높은 습도 때문에 사우나가 따로 없었다.
용갱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원형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기로 했다. 영화 내용도 중요하고, 우선 더위를 좀 식히고자 하는 맘에서다. 360도 원형 스크린에 펼쳐진 장면들은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는 과정부터 병마용의 제작과정, 항우의 군대가 용갱을 불태우는 장면, 그 후 농부가 용갱을 발견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 제국전역에서 온 군사들이 서로 출신지가 다르다는 것은 저마다 다른 얼굴과 머리모양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생생한 표정은 실제 병사를 본뜬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
ⓒ2007 조수영 |
6천여 명의 보병으로 이루어진 1호갱
2천 년 전의 용병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을 안고 1호갱으로 들어섰다. 폭이 62m, 동서로 길이가 230m나 되는 지하군대는 돔형 건물로 덮여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실제 사람 크기의 도용들이 방대한 군영을 이루고 서 있는 모습에 압도당했다. 6천여 명의 보병과 전차와 말이 전시관의 뒤쪽까지 전투 대형으로 늘어서 있다. 대부분 동쪽을 향해 서 있으나 제일 왼쪽에 있는 한 줄의 군사들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쪽은 산이므로 한 줄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도용들은 그 모습이 너무 생생해서 개개의 실제 병사를 그대로 본뜬 것이라 생각될 정도다. 또 큰 대열을 이루고 있으나 그 각각의 모습은 조금씩 달랐다.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실물보다 약간 더 큰 병사는 제국 전역에서 차출한 여러 민족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 [위 사진] 견장을 단 장교는 그 표정에서 지휘관의 위엄이 느껴진다. [아랫사진] 생생한 표정이 실제 병사를 본뜬 것이라 생각될 정도이다. |
ⓒ2007 조수영 |
무기도 다양하다. 도용들은 손에 쇠뇌와 화살을 들고 있는 것, 긴 창을 들고 서 있는 것, 등에 화살집을 메고 있는 것도 있다. 발굴 당시에 화살집 안에는 청동화살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발굴된 쇠뇌, 화살촉, 창, 칼은 2천 년이 넘도록 부식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조사 결과 주석, 구리, 니켈과 같은 성분들을 13가지나 섞은 합금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진시황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한 청동검은 발굴 당시까지 종이뭉치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을 만큼 날이 정교했다고 한다.
▲ [위 사진] 진시황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한 청동검은 2천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종이뭉치를 단번에 잘라낼 수 있을 만큼 날이 정교했다고 한다. [아랫사진] 구리로 만든 극(戟). 진나라 시대의 무기로 한쪽에 “3년상방 여불위 조사공구”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2호갱에 전시되어 있으며 “여불위가 승상이 되고나서 3년째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부장품임이 증명되었다. |
ⓒ2007 조수영 |
용갱은 몸과 머리를 따로 만들어 구웠다. 각각의 발바닥에는 이를 만든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지금은 황갈색의 테라코타색이지만 원래는 모두 다 실물과 똑같이 채색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발굴 당시에만 해도 남아있던 색깔들은 출토 후 공기와 햇빛에 노출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발굴 당시 찍은 사진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궁노병은 앞코가 네모진 신발을 신고 있다. 오른쪽 신발의 밑창에는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장식용 못이 박혀있다. |
ⓒ2007 조수영 |
진시황제는 실물 크기 용병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며 사후세계에서 다시 이들이 적의 침략을 막아줄 것 같은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장인들은 가족과 떨어져 작업에 참여하였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두 처형되었다. 이곳은 잔인한 죽음의 현장이고 장인들의 혼이 묻힌 곳이기도 한 것이다.
항우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 병마용갱
병마용은 다른 무덤들처럼 도굴꾼에 의해서가 아니라 초나라 항우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항우의 군사들은 갱을 파고 들어와 병사들이 쥐고 있던 병기와 전차를 모두 빼앗아 갔고, 병사와 말들도 마구 부수고 불을 질렀다.
1호갱 중반 부분에는 아직도 복원이 완성되지 않은 깨진 용갱들이 황토에 묻혀 있었다. 병마용에서는 아직도 대대적이고도 정밀한 발굴과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발굴과 복원 작업을 할 때는 관광객이 없는 시간에 문을 닫아 놓고 두 시간씩 한다고 한다.
▲ 1호갱 중간 부분의 모습. 병마용에서는 아직도 발굴과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
ⓒ2007 조수영 |
궁노병과 전차부대인 2호갱
2호갱은 1호갱 전시관의 기초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두 용갱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했지만 각각 분리된 형태임이 증명되었다.
2호 용갱은 L자의 형태로 길이 96m, 너비는 84m, 깊이는 5m로 면적은 1호갱의 절반 수준이다. 발굴도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발굴하지 못한, 비닐로 덮어놓은 부분의 병마용에는 색이 조금 남아 있다고 한다.
퇴색을 우려해서인지 조명도 어두워 약간 으스스한 느낌도 든다. 갑자기 병마용 들이 그때 죽은 장인의 혼령같이 느껴져 섬뜩했다.
보병이 대부분인 1호갱과 달리 2호갱은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 등 네 부분의 서로 다른 병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의 가장자리에는 대체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병마용을 유리관에 넣어 따로 전시하고 있었다.
▲ 2호갱은 L자의 형태로 궁노병, 경차병, 차병, 기병 등 네 부분의 병과로 이루어져 있다. 퇴색을 우려해서인지 조명이 어두워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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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부의 군영인 3호갱
3호갱은 1호갱에서 25m 떨어진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凹모양으로 면적은 겨우 300㎡지만 68명의 지휘관이 있는 지휘부의 군영이었다. 용병들의 배열과 말의 배치, 무엇보다도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사슴뿔의 조각이 발굴됨에 따라 이곳이 고대 군진의 지휘부라는 것이 밝혀졌다. 장군용들은 머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조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3호갱은 凹모양으로 면적은 작지만 지휘부의 군영이었다. 장군들의 용갱은 심하게 부서지고 대부분 머리부분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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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용들은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서 있었다. 손 모양은 뭔가 쥐고 있는 모양이지만, 손에 든 것은 없었다. 군사토론을 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있을 거라고 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주변에서 진시황제 사망 당시에 미처 완성되지 않아 내부는 비어 있는 4호갱을 발굴했다고 한다.
진시황제의 영혼이 타는 동거마
병마용 박물관에는 발굴된 두 대의 대형 채색 동거마를 전시하고 있었다. 동마차는 진시황릉 서쪽 200미터 지점에서 발굴되었는데, 1, 2호 두 대의 마차는 발굴 당시 완전히 깨진 상태였다. 2천여 개에 달하는 조각들을 1980년부터 8년간에 걸쳐 복원하였다고 한다.
▲ [위 사진] 동거마 1호차. 마부와 탑승자가 모두 서는 형태이다. 동마의 얼굴을 살펴보면 크게 뜬 눈은 정면을 향하고, 약간 들창코인 콧구멍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있는 듯하다. [아랫사진] 동거마 2호차. 마부는 앞에 앉아 있고 탑승자는 실내에 앉아 있도록 되어 있다. 진시황제의 영혼이 타는 것이다. |
ⓒ2007 조수영 |
1호차는 길 안내용으로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햇빛을 가릴 수 있도록 우산이 꽂혀져 있는데 해변의 파라솔 모양이다. 우산은 해가 이동함에 따라 조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2호차가 진시황의 영혼이 타고 다닌다는 것인데, 1호차와 마찬가지로 네 마리의 말이 끌고, 마부 한 사람이 말을 이끌고, 진시황은 가마처럼 생긴 장막 안에 탄다. 바깥 장막을 두 겹으로 하고, 그 사이에 뜨거운 물이 흐르게 하여 난방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동마차, 동마, 마부 도용의 크기는 실물의 절반 정도였다. 두 대의 동거마 모두 장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으며 장식이 무척 화려하고 정교했다. 기원전 3세기에 이런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옆 진열실에는 또한 세계 각국의 정상급 인사들이 다녀가면서 선물한 기념품도 전시하고 있었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하여 남기고 간 봉황무늬 도자기 항아리도 있었다.
[펌]☞http://news.media.daum.net/culture/leisure/200702/01/ohmynews/v155795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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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media.daum.net/culture/leisure/200701/30/ohmynews/v15556870.html
아직도 밝히지 못한 진시황릉의 비밀
▲ 아직도 내부가 발굴되지 않은 진시황릉. 지금은 하나의 야산으로 보일 뿐이다. |
ⓒ2007 조수영 |
▲ 황릉 아래에는 진나라 병사들의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
ⓒ2007 조수영 |
▲ 왕릉 정상에서 내려본 모습. 왕릉으로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한 계단으로 되어있다. | |
ⓒ2007 조수영 |
▲ 왼쪽이 진시황릉과 궁궐이 있었던 터. 2km떨어진 곳에 병마용 박물관이 있다. 세계적인 병마용 박물관도 진시황릉의 부장품일 뿐이다.(직접 그림) |
ⓒ2007 조수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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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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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왕릉은 과연 진시왕릉인가?
중국당국은 왜 그렇게 비밀이 많아야 하는가?
진시황(B.C259~B.C210 ), BC246년 13세에 진왕에 즉위.BC221년 나이 39세 진시황 등극,
한,조,위,초,제,연 6국을 멸하고 천하통일한 때가 BC221년 39세,
자신의 덕이 삼황오제를 능가한다고 최초의 황제, 시황이라 칭한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11년 후인 BC210년 50세에 사망한다.
진왕의 전 통치기간 37년 중,천하통일후 11년 동안만 진시황으로 통치하였다.
그리고 둘째아들 호야가 뒤를 이었으나,천하통일한 진나라는 4년후 2대에서 망하고 만다.
그런데,
진시황을 살해하고 왕이 된 둘째아들 호야가,과연 아버지를 위해 4년간 아버지 무덤을 건설하였을까?
진시황이 즉위하자마자 11년 동안에 무덤건설을 준비하였고,아들 호야가 4년에 너머지 어마어마한 무덤을 완공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세상에서 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나 역사상 가장 권력이 강했던 황제를 둘만 꼽는다면, 진시황, 한무제다.
무수히 많았던 제왕 중 진의 시황, 한의 무제가 강력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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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http://k.daum.net/qna/view.html?
진나라
설명
1)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 성(姓)은 희(姬). 주나라 성왕(成王)의 동생 숙우(叔虞)가 당(唐;山西省翼城縣)의 제후로 봉해지면서 비롯되었으며, 아들 섭(燮) 때부터 진후(晉侯)라 부르게 되었다. 춘추시대 초 한때 나라가 분열 상태에 놓였으나 곡옥(曲沃:山西省曲沃縣)의 무공(武公)이 통일하였고, 아들 헌공(獻公) 때에는 강(絳;山西省 翼城縣 南東)으로 천도했으며 주위의 소국들을 병합하여 영토를 넓혔다. 그가 죽은 뒤 후사문제(後嗣問題)로 잠시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문공(文公)이 즉위하여 국력 배양에 힘썼고 성복의 싸움(BC 632)에서 초(楚)나라를 물리쳐 중원(中原)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 뒤부터 중원의 강국으로서 진(秦)나라·초나라·제(齊)나라와 계속 세력을 다투었으며, 경공(景公) 때에는 신전(新田;山西省侯馬市)으로 천도하고 영토도 산시성[山西省(산서성)] 외부까지 넓혔다. 그러나 춘추시대 말, 이성(異姓)의 신하를 중심으로 한 육경(六卿)이 점차 강대해져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전국시대 초, 유공(幽公) 때에는 한(韓)·위(魏)·조(趙) 삼가(三家)가 실질적으로 나라를 분할했고, 이어 삼가는 주왕(周王)에 의해 제후에 봉해졌다. BC 376년 삼가가 정공(靜公)을 폐위시킴으로써 멸망하였다.
2) 중국의 왕조. 서진(西晉, 265∼316)과 동진(東晉, 317∼420)으로 나누어지는데, 사마염(司馬炎;武帝)이 뤄양[洛陽(낙양)]에 도읍하여 서진을 세웠고 종실 사마예(司馬睿;元帝)는 건강(建康;南京)에 동진을 세웠다. 사마씨(司馬氏)는 하내군(河內郡;河南省)의 명문으로서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司馬懿) 이래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국정을 좌우하였고, 아버지 사마소(司馬昭)는 촉(蜀)나라의 평정에 공을 세워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나 급사하였기 때문에 사마염이 계승하여 선양혁명(禪讓革命)을 속행,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무제는 귀족의 특권을 인정하고, 동시에 황족분봉제(皇族分封制)를 시행하여 나라의 기반을 굳혔으며, 280년에 오(吳)나라를 평정해서 천하를 통일하고 점전법(占田法)·과전법(課田法)과 호조식(戶調式) 등 참신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여색에 빠져 실권을 외척에게 맡겼으며, 사회에도 사치와 붕당의 풍조가 번졌다. 그의 아들 혜제(惠帝)는 어리석어서 가황후(賈皇后) 일당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고 거기에 반발하여 300년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이 군사를 일으켜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을 계기로 한인(漢人)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왔던 비한민족인 오호(五胡;흉노·갈·선비·지·강)가 자립운동을 벌임으로써 영가(永嘉)의 난이 일어났고, 남흉노(南匈奴)의 유총(劉聰)이 311년 뤄양을 공략하여 회제(懷帝)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아들 유요(劉曜)도 316년에 민제(愍帝)를 붙잡아, 진나라(西晉)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서 화베이[華北(화북)]의 혼란을 피해 건강으로 옮긴 낭야왕(琅邪王) 사마예가 명족 왕도(王導)의 활약에 힘입어 망명귀족과 강남호족의 지지를 모아 317년 동진을 세웠다.
그러나 권력이 미약해서 처음에는 군벌 왕돈(王敦)의 난과 소준(蘇峻)의 난이 잇따라 일어났고, 371년에도 환온(桓溫)이 황제를 폐립하며 찬탈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오호의 압박에 고통을 받다가 명신 사안(謝安)이 383년 페이수의 싸움에서 전진(前秦) 부견(符堅)의 침략을 격퇴시켜 잠시 국세를 회복시켰지만 제 9 대 효무제(孝武帝)의 동생 사마도자(司馬道子)가 정치를 어지럽혀 권문의 토지점거와 도망호(逃亡戶)의 은닉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399년 도교계통의 민중반란인 손은(孫恩)의 난이 일어났고, 또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이 사마도자에 대항해서 세력을 키워 제10대 안제(安帝)에게 제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초(楚)나라(403∼404)를 세움으로써 왕통이 끊어졌다. 이에 대항하여 무장 유유(劉裕;송나라 武帝)가 환현을 치고 안제를 복벽시켰으나, 남연(南燕)과 후진(後秦)을 멸망시키는 등 내외로 공로가 많은 유유는 곧 안제의 동생 공제(恭帝)에게 선양을 강요, 동진은 11대를 끝으로 멸망하였다.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 가문본위로 운용되었고 귀족제도가 발전하였으며 귀족들 사이에서는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 자연애호 기풍이 번졌고 청담(淸談)과 은일(隱逸)이 유행하였으며 산수시(山水詩)가 시작되는 등 문학·서예·회화가 성행하였다. 또 동진시대 화베이로부터 인구가 몰려들어 강남지방의 개발이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설명
1) 중국 춘추시대 제후국의 하나(?∼BC 478). BC 11세기 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순(舜)의 자손 규만을 완구(宛丘;지금의 河南省 淮陽縣)에 봉한 나라이다. 춘추시대에는 12명의 유력제후 중 하나로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BC 7세기 이후 후위상속(侯位相續)을 둘러싼 내란이 종종 일어났고 더욱이 초(楚)나라와 제(齊)나라·진(晉)나라 사이에 끼어 많은 고통을 받다가, BC 531년 초나라의 영왕(靈王)에게 멸망당하였다. 영왕 사후, 나라의 재건이 허락되기는 하였으나 그 뒤에도 초나라의 세력 아래에 있었고 때로는 오(吳)나라의 공격도 받았으며 마침내 BC 478년 초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2) 중국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557∼589). 오흥군(吳興郡;浙江省) 사람 진패선(陳覇先;武帝)이 세웠다. 진패선은 신분이 낮은 군인이었으나 양(梁)나라 말기 후경(侯景)의 난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세력을 구축하고, 양나라 원제(元帝)가 강릉(江陵)에서 서위(西魏)의 습격으로 죽자 경제(敬帝)를 세웠으며 이윽고 경제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즉위, 건강(建康;南京)에 왕조를 열었다. 그가 죽은 뒤 형 자문제(子文帝)가 계승하였고 이어서 폐제(廢帝)·선제(宣帝)로 이어졌으나 제 5 대 후주(後主) 때 수(隋)나라 문제(文帝)에게 멸망당하였다. 영역은 양쯔강[揚子江(양자강)] 중·하류 이남과 선제 때에 북제(北齊)로부터 빼앗은 회남(淮南) 일대를 차지하였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남조의 귀족은 후경의 난을 경계로 하여 많이 몰락하였고 정치의 중추에 남아 있던 자는 무장 출신과 신분이 낮은 한인(寒人)들이었는데 이것이 다른 남조와는 구분되는 특수성이었다. 멸망하였을 때 수나라에 들어간 인구가 200만이었다고 한다.
주나라 제후국으로서의 진
신화와 전설에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이행기(移行期)는 비자(非子)의 기록이 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주나라의 효왕(孝王)은 대구(大丘)에 있었던 비자에게 목축을 시켰고 진나라의 땅을 주며 성을 영씨라고 부르도록 하였다. 양공(襄公)은 주나라의 내란 때 평왕(平王)을 도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제후에 임명되었고 기산(岐山;지금의 陝西省岐山縣北東) 서쪽의 땅을 주어 진공(秦公)이라고 하였다(BC 771). 이때 산짐승으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은 서융(西戌)의 습속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문공(文公) 때 웨이수이[渭水(위수)]와 견수의 합류점 부근으로 도읍을 옮겼고 <삼족죄(三族罪)>를 정하였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까지도 연좌하는 법률로 군주권의 신장을 나타냄과 동시에 융적(戎翟)의 관습을 법제화한 것이다. 영공(寧公) 2년(BC 714)에 도읍을 평양(平陽;지금의 陝西省鳳翔縣南西)으로 옮겼다. 그 뒤 무공(武公) 10년(BC 688)에 규와 기(冀)를 토벌하였고 여기에 처음으로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두(杜)와 정(鄭)을 현으로 만들었다. 덕공(德公) 때에 옹(雍;지금의 陝西省鳳翔縣)에 도읍하였으며 목공 때에 비약적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목공은 백리해(百里奚)와 유여(由余)를 등용하였다. 본래 백리해는 우(虞)의 대부(大夫)였다가 목공의 부름을 받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유여는 진(晉)나라 사람이지만 당시에는 융왕(戎王)의 밑에 있었는데 책략을 써서 신하로 삼았다. 이와 같이 객신(客臣)을 이용하여 군주의 지도력을 강화하는 방침은 진나라의 전통이 되었다. 유여는 예악법도(禮樂法度)를 물리치고 상하일체의 융적사회를 본받도록 목공에게 권하였다. 이는 군주권을 억제하는 종족(宗族)과 귀족세력을 약화시키는 길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강대해진 진나라는 하서(河西)의 땅을 차지하고 서융의 땅을 쳤기 때문에 영토가 사방천리(四方千里)에 이르렀다고 한다. 목공이 죽었을 때 따라서 죽은 신하가 많았으며 이것은 생전에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군주가 부하를 사신(私臣)으로 마음대로 다루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진나라 군자(君子)들로부터 이에 대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것도 신장(伸張)된 군주권의 한 표시였다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서의 진
진나라는 그 뒤에 나라 안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더 이상 동쪽으로 나아갈 힘이 없었다. 그러나 BC 403년 진(晉)나라가 한(韓)·위(魏)·조(趙)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헌공(獻公)은 약양(지금의 陝西省臨潼縣東)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방경략(東方經略)을 꾀하였다. 그의 아들 효공(孝公)은 제후였으나 융적이라 하여 멸시당하고 동방의 회맹(會盟)에 가담하지 못하자 동방제후들에게 힘을 보여주기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려 하였다. 위(魏)나라로부터 위(衛)나라의 공족출신(公族出身)인 공손앙이 찾아와 제왕(帝王)의 길과 왕도(王道), 그리고 패도(覇道) 등에 대해 효공에게 말하였는데 앞의 2가지는 효공이 채택하지 않았지만 패도에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상앙은 패도를 실행하는 것이 장차 제왕의 길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효공에게 발탁된 상앙은 상과 벌을 엄중히 하여 농업과 전투의 결과에 따라 작위를 주고 작위를 가진 사람만이 평가받는 신분제사회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인(隣)=오가(伍家)라는 공동체(小宗族的) 단위를 기초로 하여 국가에 협력한다는 체제를 십오제(什伍制)라고 하여 이를 시행하였다. 이것은 군주가 <오(伍)>를 파악하는 것으로서, 중간 세력을 억제하고 가부장적 권력의 신장을 꾀한 것이었다. <오>를 단위로 하여 취(聚)를 만들었으며 그 위에 향(鄕)과 현이 행정단위로서 성립되었다. 천맥제(阡陌制)를 시작한 것도 상앙인데, 이것은 소단위가족의 창설정책인 <분이법(分異法)>에 의해서 나왔고, 들을 농토로 개척한 자제의 토지를 정리하기 위해서 설치한 동서토지구획선으로 추측되지만 정설은 없다. 상앙변법은 1·2차에 걸쳐서 시행되었으며 제 2 차변법은 도읍을 센양[咸陽(함양)]으로 옮긴 뒤에 시행되었다. 센양은 그 뒤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효공은 변법으로 강해진 국력으로 동정(東征)을 전개하였고 위(魏)나라로부터 하서(河西)를 탈환하였다. 위나라는 패전의 결과, 도읍을 안읍(安邑;山西省候馬)에서 대량(大梁;河南省開封)으로 옮겨야만 했다(BC 340). 진나라의 동정은 동쪽 여러 나라에 큰 위협이 되었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등이 내세운 유명한 합종연횡(合縱連衡)의 타협책과 대항책은 모두 진나라의 중심 외교정책이었다. 한편 효공이 죽은 뒤에 진나라에서는 혜문왕(惠文王)이 뒤를 이었는데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상앙을 주살(誅殺)하였으나 정책의 기본이 되는 군주권의 신장이라는 방침만은 답습하였다. 그리고 국력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 파촉(巴蜀;지금의 四川省)을 제압하고 초(楚)나라에 속했던 한중(漢中)을 차지하였다(BC 312). 또 소왕(昭王) 때에는 양쯔강[揚子江(양자강)]을 따라 남하한 장군 백기(白起)가 초나라의 수도 영(지금의 湖北省江陵縣)을 함락시켰다. 동쪽으로는 위나라의 하동지방(河東地方)을 병합하였고 범수로 하여금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구사하게 하면서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BC 260). 소왕은 뒤에 서주(西周)를 멸망시켰고 동주군(東周君)도 진나라의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에 의해서 멸망되었다(BC 249).
시황제의 등장과 중국통일
장양왕 자초의 아들이 진왕(秦王) 정(政)이다. 그는 어려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태후(太后)와 승상 여불위(呂不韋)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의 애인인 노애를 제거하고(BC 238) 그를 태후에게 추천했던 여불위도 권좌에서 추방하였으며 마침내 자신이 친정(親政)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승상에 이사(李斯)를 기용하고 법가주의적(法家主義的) 정책을 채택하여 종실과 귀족세력을 억제하면서 전제적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이때에 왕전 등의 장군을 파견하여 정복을 계속하였다. 진나라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BC 230년이며 이때부터 10년 동안 다른 5나라도 차례로 진나라의 위력 앞에 굴복하여 진나라는 마침내 중국 전역을 통일하게 되었다(BC 221). 그는 진나라가 영원하기를 희망하여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하였고 만세에 이르도록 건재하기를 원했다. 그는 승상과 태위(太尉)·어사대부(御史大夫)를 배치하여 행정과 군사 양면으로 황제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국가의 통치형태는 봉건제가 아니라 상앙 이래의 군현제를 채택하여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었으며 군에는 수(守)·위(尉)·감(監)을, 현에는 영(令)·장(長) 등을 두었고 군사는 현위(縣尉)에게 맡겼다. 전국을 집권화하기 위하여 도량형과 화폐 그리고 서체(書體) 등을 통일시켰다. 또한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무기를 모아서 녹여 금속상(金屬像)을 만들었다. 북쪽의 흉노를 막기 위하여 장성(長城)을 쌓았고 남쪽으로는 화난[華南(화남)]까지 세력을 뻗쳤다. 사상의 통제를 위해서 일으킨 분서갱유(焚書坑儒)는, 농예(農藝)·의약(醫藥)·점복(占卜) 등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태웠으나 관청에 보관된 유가의 경전 등 제자백가의 문헌은 남겼다. 분서의 주된 목적은 서적이 개인적으로 유포되어 진나라의 정책을 비난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갱유도 시황제를 비방한 방사(方士;道士)들과 거기에 관련된 유생들만을 처벌한 것으로 유가의 말살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 광대한 제국은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규모였으며 진(秦)이라는 이름이 널리 서양에까지 전파되었다. 차이나(China)라는 호칭의 기원이 진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법가적 위압은 더욱 강한 세력을 가진 귀족과 소종족을 기초로 한 농민층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황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능묘와 궁전의 건축에 소요된 막대한 노동력은 그 부담이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2세 황제 호해(胡亥)도 조고(趙高)로 하여금 같은 정책을 취하게 하였다. 조고는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군주권의 강화를 꾀하였으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때에 진승(陳勝)·오광(吳廣) 등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이것에 촉발되어 귀족과 호걸들도 반진(反秦) 깃발을 높이 들었다. 호해의 후계공자(後繼公子) 영이 항우(項羽)의 부장(部將)이었던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에게 항복하면서 전국옥새(傳國玉璽)를 바침으로써 3대 15년의 치세로 멸망하였다(BC 207).
연표
BC 771 진(秦)나라,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됨
714 평양(平陽;陜西)으로 도읍을 옮김
660 목공(繆公) 즉위. 백리해(百里奚)·건숙(蹇叔) 이 보좌
627 진(晉)나라 양공(襄公), 목공을 무찌름
623 목공, 서융(西戎) 제패 선포
578 진(晉)나라, 제(齊)·송(宋) 등의 제후와 함께 진(秦) 나라를 침
408 위(魏)나라, 진(秦)나라의 하서(河西)지방을 빼앗음
364 한(韓)·위·조(趙)나라를 석문(石門;陝西)에서 대파
359 상앙의 제1차변법(變法) 시행
350 이 무렵부터 강국이 됨. 셴양[咸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현제(縣制) 시행. 상앙의 제2차변법 시행
338 효공(孝公) 죽음. 상앙, 실각 후 주살됨
333 소진(蘇秦), 합종책(合縱策)을 주장하고 6국의 재상이 됨
330 위나라를 침. 위나라, 하서 땅을 진(秦)나라에게 줌
328 장의(張儀), 진(秦)나라 제상이 되어 합종책을 무너뜨림
325 혜문왕(惠文王), 처음으로 왕호 사용
310 장의의 연횡책(連衡策)이 시행됨
288 진(秦)나라가 서제(西帝), 제(齊)나라가 동제(東帝)라고 칭함
259 정(政;뒤의 始皇帝) 태어남
256 주(東周)를 멸함. 주나라의 왕통이 끊김
249 여불위(呂不韋), 진(秦)나라의 상국(相國)이 됨
247 진왕(秦王) 정 즉위 246 정국거(鄭國渠) 개통
237 여불위를 물리치고 친정(親政) 시작, 이사(李斯) 중용
233 한비자(韓非子)를 붙잡아 자살하게 함
230 한나라를 멸함 228 조나라를 멸함
227 자객 형가(荊軻)의 암살 미수 사건 일어남
225 위나라를 멸함 223 초(楚)나라를 멸함
222 연(燕)나라를 멸함
221 제나라를 멸하여 중국 통일 완성.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전국적으로 시행. 병기를 몰수하고 도량형·화폐·문자를 통일
220 시황제, 북순(北巡)함
219 시황제, 동순(東巡)하고 태산(泰山)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
215 장군 몽염(蒙恬), 흉노(匈奴) 토벌
214 이사, 승상이 됨. 만리장성 축조 시작. 남월(南越)을 쳐서 광둥[廣東]·광시[廣西] 지배
213 분서갱유(焚書坑儒)(~212)
212 아방궁(阿房宮)·여산릉(驪山陵)의 조영 착수
210 시황제 죽음. 조고(趙高)·이사, 2세 황제로 호해(胡亥) 옹립
209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 일어남. 항우(項羽)·유방(劉邦) 등, 군사를 일으킴
208 이사 살해됨. 조고, 승상이 됨
207 조고, 2세 황제를 죽이고 공자(公子) 영을 세움. 공자 영, 조고를 죽이고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 멸망함
[펌]☞http://k.daum.net/qna/view.html?boardid=QNJ&qid=0Dy0p&q=%C1%F8%B3%AA%B6%F3+%BF%AC%C7%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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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始皇帝, Shih Huangti]
(병)Shi Huangdi (웨)Shih Huangti. BC 259~210/209.
중국 진(秦)나라의 황제.
[초기생애]
[중국의 황제]
[펌]☞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do?articleID=b13s233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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