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돌아가신 신지식 선생님.
저는 그 분의 작품을 읽고 자랐지만, 안타깝게도 생전에 한 번도 만나뵙지 못했습니다.
추억이나 인연은 없지만,
그 분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신지식 선생님을 기리며....
(아래 ppt는 임정진 동화작가가 만든 것임)
‘감이 익을 무렵’과 함께 끝나버린 첫사랑
동화작가 안선모
새로 생긴 B여자중학교는 들판 한가운데에 건물 한 동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보아도 보이는 건 논과 밭뿐이었다. 나는 빨간 구슬을 뽑아서 B여자중학교에 배정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모험 그 자체였다. 논과 밭 사이로 이제 막 생긴 끝도 안 보이는 길을 따라 등하교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자주 학생들을 동원해 일을 시키곤 했다. 지금으로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학교 다니는 게 너무 즐거워서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운동장에 흙을 날라 평평하도록 흙을 다졌고 그 위에서 뛰어놀았다.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 환경정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먹구름이 뒤통수에서 몰려오더니 와르르 비가 쏟아졌다. 허허벌판이기 때문에 비를 피할 곳은 없었다. 나는 학교를 돌아보았다. 학교로 돌아가기에는 꽤 먼 길이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달려갈까? 달린다고 해도 비를 피할 수는 없어.’
이렇게 결정하고 터덜터덜 걷는데 앞에서 자전거 한 대가 나타났다. 국어 선생님이었다. 속으로만 엄청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다.
“뒤에 타!”
나는 고민할 새도 없이 자전거 뒤에 탔고 선생님은 학교로 냅다 달렸다.
교무실에는 비 때문에 퇴근을 미루고 있는 선생님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달아 선생님, 왜 돌아오셨어요?”
영어 선생님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달아’는 국어 선생님의 별명이었다. 맨날 결혼해서 딸을 낳으면 이름을 ‘달아’라고 지을 거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국어 선생님이 씨익 웃으며 책상 위를 가리켰다.
“저걸 두고 갔잖아요.”
내 눈이 선생님의 손가락을 따라 절로 움직였다.
<감이 익을 무렵>
앞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눈 속으로 들어가 계속 눈을 비비면서도 나는 책 제목을 눈여겨보았다.
“저것 때문에 이 빗속을 뚫고 돌아왔다고요?”
영어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요 쪼끄만 애가 온몸으로 비와 싸우고 걸어가고 있잖아요.”
요 쪼끄만 애는 바로 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내 몸이 찌르르 떨려왔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온 몸을 헤집고 지나갔다.
‘이제부터 국어선생님을 속으로만 좋아하지 않겠어. 겉으로도 나타낼 거야.’
그날부터 내 모든 신경은 국어 선생님에게 쏠려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려는 열망으로 온몸이 달떠 있었다. 처음으로 국어 공부를 죽어라 했다. 선생님이 추천하는 책은 모조리 다 읽었다.
그때 책상 위에서 내 눈길을 끌었던 책, <감이 익을 무렵>을 읽으면서 신지식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세계적인 문호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나에게 신지식 선생님은 신선한 샘물과도 같은 존재로 다가왔다. 나의 어머니와 동갑이라는 사실도 괜히 기뻤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내 어머니의 언어는 어느 작가 못지않게 문학적이었다. 게다가 <감이 익을 무렵>은 내가 태어난 해에 나온 작품이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는 신지식 선생님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게 되었다. 신지식 선생님의 글은 사춘기 청소년들의 미묘한 심리 갈등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중학교 1학년 소녀의 가슴을 떨리게 했고, 소심하고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 같아 공감하며 함께 가슴 아파 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내 가슴 속에는 작은 꿈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었다. 나약하고 여린 주인공보다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씩씩하고 용감하게 헤쳐 나가는 아이를 주인공을 내세워야지 했던 생각.
<감이 익을 무렵>을 읽고 또 읽고 서너 번 읽었을 즈음, 나의 첫사랑 국어 선생님이 영어 선생님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감이 익을 무렵>에 나오는 소녀가 마치 나라고 상상하며 국어 선생님에 대한 사모의 정을 키워가고 있던 나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책 속의 주인공은 결혼을 한 선생님을 마중하러 나가서 사모님 손에 든 주홍색 감을 보게 되고 주홍색 감의 의미를 알게 된다. 주홍색 감은 완전히 무르익은 가을 열매의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소녀는 선생님과 결혼을 한 그 분이 바로 주홍색 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감이 익을 무렵>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주홍색 무르익은 감이 아니라, 이제 갓 피어난 감꽃이다. 향기로운 감꽃이다. 그러니 무엇을 못하랴. 그래, 나는 유명한 작가가 될 거야. 신지식 선생님처럼은 아니어도 그만큼 멋진 작가가 되어야지.
나의 첫사랑 국어선생님은 영어선생님과 결혼해 딸을 낳았고 소원대로 이름을 ‘달아’라고 지었다. 그리고 나는, 주홍색 감 같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감나무 작가가 되어 있다.(끝)
첫댓글 훌륭하신 선생님이 셧는데 ....
잘 알고 계신가 봐요.
저는 중딩 때는 갓 졸업하고 오신 여자수학샘을, 고딩 때는 단벌 양복에 구부정한 아저씨 국어샘을 좋아했어요.
근데 그 샘들을 다른 아이들은 다들 싫어하더라고요. ㅎㅎㅎ
그 샘을 좋아한다 그러면 으악 너 디게 이상하다! 그런 소리 들었어요.
추모글이 멋집니다. 사연조차 달과 감이니 더욱 서정적이고요~~잘 익은 추모글이 천국의 신지식 선생님을 달 뜨게 하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