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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깍지궁사회 7년
정 진 명(온깍지궁사회)
활쏘기는 지금 전환기를 맞고 있다. 사회 전체의 변화가 그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재편되는 것이 전환기의 의미라면 현재 한국사회는 전통이 살아있는 옛날에서 새로운 체제와 구조를 지닌 시대로 넘어가는 단계를 지나고 있다. 활쏘기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활은 옛날의 활량놀음이나 무기체계의 개념에서 스포츠로 전환되고 있고, 그것은 옛날의 풍토와 의식구조에 머물러있는 활터의 현실 속에 서 많은 문제점을 일으키고 있다. 우선 활터는 구성원들이나 그 구조가 조선시대의 모 습 그대로 머물러 있는데 활쏘기는 이미 꾸준히 스포츠 화하였다. 이것은 활터에 몸담 고 있는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동에 모순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경기방식은 철저히 스포츠를 추구하면서도 활터 생활에서는 궁도인 어쩌구 하면서 도사임을 자처 하는 것이다. 활쏘기가 여러 사람과 사회와 교류하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스포츠로 살아남을 수밖 에 없다. 현재 활을 사냥의 도구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입산 수행의 방편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기에 활은 너무도 불편할 뿐이다. 활이 아니라도 사냥 도구는 많고, 구도의 방법은 널려있다. 활은 오직 스포츠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 스포츠의 일환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밟아온 것이다. 이것은 대세이다.
그러나 활터는 단순히 활을 쏘아서 과녁을 맞히는 기능만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통의 문제이다. 활이 과녁을 쏘아서 맞히는 것임은 분명한 일이지만, 활터에 관계된모든 일은 오랜 세월 누적된 풍속 안에서 이루어진다. 하다못해 활 쏘는 동작까지도 그러한 전통의 산물이다. 따라서 활쏘기가 스포츠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피한 운명이라 고 하더라도 활터의 전통은 전통대로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 활쏘기 풍토를 살펴보면 스포츠로 나아갈 뿐, 이러한 전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수천 년 이어져 온 전통이 머지않아 단절될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전통을 제대로 잇지 않으면 우리 겨레의숨결이 살아있는 한 부문을 영원히 잃게 된다. 그것은 민족사의 관점에서 볼 때 그야말로 중대한 손실이 아닐 수 없다.바로 이 같은 점을 깊이 인식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가 온깍지궁사회이고, 이런 의식과 활동은 그 동안 국궁계에 뜻하지 않게 여러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 글에서는 온깍지궁사회가 생긴 과정과 걸어온 길, 그리고 그로 인해 국궁계 전체에 끼친영향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본다.
1. 설립 동기와 과정
활을 배운 지 3년째 되던 1996년 겨울에 나는 서울 황학정을 방문했다. 이유는 성낙인 선생을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성낙인 선생은 1928년에 출범한 조선궁술연구회의 초대회장 성문영 공의 외동아들이다.성문영 공은 무과가 폐지되기 전에 무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여 벼슬길로 나아갔고,고종의 후궁인 엄비와는 인척이었던 관계로 벼슬길이 순탄했으며, 나중에는 고종황제를 모시고 활을 쏘다가 황학정이 출범하는 데 앞장섰다. 이 인연은 그대로 조선궁술연구회로 이어진다. 원래 성문영 공은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였는데, 느즈막에 외동아들을 낳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 외동아들이 성낙인 선생이었고, 성 선생은 1941년 7월에 아버지가 준 활로 집궁을 하였다. 그래서 해방 전후의 황학정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분이었다.집궁 후에 여러 가지로 궁금증이 많았던 나는 이 분과 여러 차례 전화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찾아가서 그분의 궁체를 비디오에 담아오겠다고 결심하고 1996년 겨울에 황학정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방문에서 나는 묘한충격을 맛보아야 했다. 방문하기 전에 성낙인 선생은 나더러 활 연구도 많이 하고 하니, 궁체가 좋을 꺼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반깍지로 활을 쏘았기 때문이다. 이 예상은 정확이 맞아 떨어졌다.
다음 날 황학정에서 비디오 촬영을 하고 두 시간 가까이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성선생과 같이 사대에 서서 활을 한 순 냈다. 그런데 활을 쏘는 내내 내 궁체를 바라보는 성 선생의 표정은 굳어있었고, 활을 내고 난 뒤에도 궁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어제 전화를 할 때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틀림없이 내 궁체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침묵을 한다는 것은 말을 할 기본조차도 안 되었다는것을 의미한다. 그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서 나는 활을 더 낼 수 없었다. 작별인사를 마치고 황학정을 내려올 때까지 성낙인 선생은 나의 궁체에 대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으셨다. 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내내 나의 마음은 어둡고 울적했다. 그리고 이 고민은 마침내 궁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아주 중요한 유혹을 이겨야 했다. 당시 나는 단양 대성정소속으로, 도민체전에서 단양군 대표로 활동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시수에 대한 부담을 느꼈다. 군을 위해서 시수를 내주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당시 대성정은 활터가 없어서 여기저기 떠돌며 활을 내던 시절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군체육회의 관심을 끄는 방법은 도민체전의 성적을 올리는 일뿐이었다. 체전의 시수가 곧 활터 마련의지름길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궁체를 바꾸면 시수가 안 날 것은 분명하고 그런 모험을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위치에 내가 있었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3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궁체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생겼다.『한국의 활쏘기』출판이 그것이다.
1999년에 낸 『한국의 활쏘기』는 우리나라의 활쏘기에 관한 종합서적을 구상하고쓴 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보다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우리 활의 모습을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데 치중했다. 그래서 사법 역시 당시의 나는 반깍지로 쏘았지만, 책에는 발여호미형 사법으로 설명했다.그런데 그게 시중에 나가고 나면서 궁체에 대한 나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 책을 사볼 것이고, 나는 머지않아 그 책을 사본 사람들을 만날 것이며, 그때 내가 반깍지로 쏘고 있으면 그 책을 사본 사람들이 나에게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니 그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책에는 그렇게 하라고 써놓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너무 무책임한 처사가 아닌가? 결국 해답은 궁체를바꾸는 것이었다.『한국의 활쏘기』출판기념회가 끝난 1999년 8월 1일자로 나는 궁체를 바꾸었다. 8월 1일부터 뒷손을 크게 뻗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뒷손 빠지는 모양이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나는 성낙인 선생의 궁체를 찍어온 비디오를 보면서 그모양대로 궁체가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설명한 방향과 모양으로 궁체가펼쳐지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고, 궁체의 기준에서 아주중요한 결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통상 생각하듯이 반깍지와 온깍지가 같은 사법이라면, 반깍지 궁체에서 뒷손만 크게뻗으면 발여호미형 전통 궁체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뒷손이 벗깍지가 되든가, 골로 빠지든가, 해서 전통 발여호미형 궁체하고는 상당히 다르다. 그렇다면 반깍지 궁체와 전통 발여호미형 궁체는 완전히 다른 궁체라는 뜻이 된다. 결국 발여호미형 궁체에서 반깍지로는 갈 수 있어도 그 반대는 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법의 원뿌리가 무엇인가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전통사법의 정통은 뒷손을 크게 뻗는 것이며, 반깍지 사법은 그것의 변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은 『조선의 궁술』과 일치한다.
『조선의 궁술』에는 반깍지 사법을 ‘봉뒤’라고 해서 잘못된 궁체의 한 가지로 적고있다. 잘못된 ‘봉뒤’ 사법이 1999년 그 시점의 국궁계를 뒤덮고, 마치 정통 사법인 양군림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잘못된 관행을 아무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만난 모든 한량들은 그랬다. 집궁 30년이 넘어서 발여호미형으로 배운 한량들도 ‘뒷손을 크게 뻗으면 몸이 흔들려서 시수가 잘 안 난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반깍지 사법의 대세를 바꾸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그러나 100명이 그렇다고 해도 1,000명이 그렇다고 해도 틀린 건 틀린 것이다. 한동네에 애꾸눈이 99%라고 해서 성한 눈 한둘을 병신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더 큰 문제는 99%의 애꾸눈을 위해서 내가 한쪽 눈알을 뺄 수는 있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한쪽 눈알을 뺀다고 해도 나의 자식은 두 눈을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내 자식한테까지 눈알을 빼야 하는 운명을 넘겨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내 고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같은 정 사원들의 만류 속에서 혼자서 주살질을 하며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구례 봉덕정의 조영석 접장을 만났는데, 그는 드물게 발여호미형 사법으로 전국대회의 우승을 몇 차례나 하고 8단에 오른, 보기 드문 고수의 반열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일은 인연이 있고, 인연은 사람이 일부러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조 접장을 만난 곳은 내가 속한 단양 대성정이었다. 1999년에『한국의 활쏘기』를 내면서 나는 좀욕심을 부렸다. 전통의 한 분야를 총정리하는 이런 책을 다시 더 쓸 것 같지는 않고앞으로 그럴 기회도 올 것 같지 않아서 이왕이면 아는 분들을 초대해서 출판의 의미를함께 나누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9년 7월 31일(토), 단양관광호텔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날 축사를 한 사람 중의 하나가이건표 단양 군수였는데, 그 역시 대성정 창립 멤버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손님들 앞에서 이 군수는 계획에도 없던 전국대회를 개최하겠다고 선언했다. 단양에서 국궁과 관련한 특별한 책이 나온 것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관광 단양의 이미지를 국궁계에 홍보하자는 뜻으로 전국대회를 개최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계획에도 없던 전국대회가 두 달 뒤에 단양에서 열렸다. 바로 그 대회에 광주에 사는 조영석 접장이 참가한것이다.
궁체와 사법의 이론에 자신감이 차있던 조 접장은 단양에 오자마자 나를 찾았고, 나는 그가 대회에서 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확실히 뒷손이 제멋대로 뻗는 나의궁체하고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 그래서 활을 쏘고 난 뒤에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당시 사법보다는 이렇게 뒷손을 옛날사람처럼 뽑는 한량이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반갑고 즐거웠다. 이제 발여호미형 사법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그날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1999년 10월 29일에 제천에서 승단대회가 열렸다. 전날 광주에서 조 접장이 온다는 연락을 했고, 금요일 저녁에 나는 의림정에 놀러갔다. 다음 날있을 승단대회 때문에 연습하는 한량들 가운데 조 접장이 있었고, 우리는 두 번째 반가운 만남에 굳은 악수를 했다. 거기서 조 접장은 나에게 또 다른 한량을 소개했다.부산 사직정의 이석희 접장이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이 접장은『우리 활이야기』를 읽었기 때문에 나를 먼저 알아보았다. 그리고 의림정의 터줏대감인 강명운(康明雲) 명궁도 반가이 맞았다. 강 명궁은 사실상 나의 첫 번째 스승이다. 나에게 활을 권한 것도 그였고, 궁시를 직접 사준 것도 그였으며, 제천에서 단양으로 수시로 드
나들면서 사법을 가르쳐준 것도 그였다.우리 넷은 강 명궁의 안내로 제천 시내의 한 식당에 가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이중에서 나는 제일 애송이였다. 다들 오래 쏘았고, 몇 단의 관록을 갖고 있었다. 다만내가 이들 사이에 끼일 수 있었던 것은 어쭙잖은 활 개설서 한 권을 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저 듣기만 하는 처지였고,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조 접장이 사법에 대해 청산유수처럼 열변을 토했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모이면 시간도 금방 가는 법이다. 오리고기로 저녁을 먹었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10시가 넘었다. 그때 강 명궁은 갑상선 암 수술을 한 뒤여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어울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즐거운 자리였기 때문에 강 명궁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마땅히 갈 곳도 없을뿐더러 내일 대회를 치러야 할 사람이 둘이나 되었기 때문에 차나 한 잔 하고 그만 헤어지자고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이석희 접장이 예약한 여관으로 가서 짐을 풀고 차를 시켰다. 여기서 나는 많은 갈등을 했다.생각 같아서는 발여호미형 궁체를 갖춘 한량들의 모임을 만들어보자고 얘기를 꺼내고싶은데, 그 주제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둘이나 있는 것이다. 이석희 접장이나 강 명궁이나 모두 반깍지 궁사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조 접장을 다시 만날 기회가 쉽게 생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차를 마시며 전통사법을 보존하고, 아울러 활터 풍속까지 옛날 모습으로 보존하는 그런 모임을 한 번 만
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조 접장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 접장은 이런 내 뜻을 일축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조 접장은 소리 떼임인 반깍지 사법은 대리 떼임인 발여호미형 사법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뒷손을 크게 뻗다가 나중에 동작이 점점 작아지면 반깍지 사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발여호미형이나 반깍지나 사법의 바탕은 같은데, 그것을 분리시켜서 모임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주 명쾌한 분석이고 지극히 분명한 결론이었다. 나는 사법은 물론 활터의 풍속까지 염두에 둔 발상이었는데, 오로지 사법 이론에 모든 것을 걸고 있던 조 접장으로서는 사법만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발의는 무산되었다.
그런데 우리 둘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이석희 접장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지금 나온 얘기는 아주 중요한 것이니, 이 자리에서 끝내지 말고 한 번 더 모이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좋은 장소가 있으니 겨울에 한 번 수련도 할 겸해서 모이자고 제안하면서 경남 함양을 추천했다. 발의가 좌절된 기분에 그 말을 깊이듣지 않고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는데, 몇 달 뒤에 정말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 날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던 나에게 이석희 접장이 전화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2000년1월 24일의 모임이 이루어졌다.
광주에서는 조 접장과 함께 김병국 접장이 왔고, 충북에서는 나를 비롯하여 강명운,김조영 접장이 갔다. 그리고 거창의 아림정과 호연정 사원들까지 합하여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놀라운 것은 그 몇 달 사이에 이석희 접장의 궁체가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살대를 턱 밑에 대고 똑똑 끊어서 쏘던 궁체가 뒷손을 범의 꼬리처럼 길게 뻗는시원한 궁체로 바뀌었다. 숫깍지를 쓰는 이 접장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도궁체를 바꾸었고, 그런데도 시수가 나빠지거나 그러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는 온깍지 궁체로 승단을 하여 명궁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이 접장의 변화는 나로하여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이제 내가 아는 사람만 해도 발여호미형 궁체로 활을 쏘는 사람이 둘이 된 것이며, 셋이면 이제 상황이 아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 모임에서도 사법에 대한 이야기는 밤을 새워 했지만, 모임에 관한 진전은 거의 제자리걸음이었다. 조 접장의 신념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다만 전환기를 맞은 국궁계에 전통을 보존하는 단체가 필요하다는 최소한의 합의만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다음날 헤어지면서 이석희 접장은 이런 모임을 한 번 더 갖자는 제안을 했다. 모임이 성사되든 그렇지 못하든 이러한 논의는 국궁의 앞날에 도움이 될 것이므로 천천히진행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듬해쯤에 전국의 활터에서 발여호미형으로 쏘는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알아보고 그들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 취지로 모여보자는 뜻을전하기로 했다. 온깍지 한량들의 숫자 파악은 조영석 접장이 하기로 했고, 장소는 내가 속한 청주 우암정으로 정했다. 그리고 예비 모임에 대한 준비는 내가 맡기로 했다우암정에는 발여호미형으로 깍지손을 떼는 사람이 나 이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내가온깍지 사법의 필요성과 정통성을 강조하자 내 말에 동조를 하며 온깍지 사법으로 궁체를 굳힌 사람이 몇 있었다. 장창민 접장의 경우는 단양에서 활을 쏠 때 뒷손이 저절로 빠졌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로 알고 뒷손을 그 자리에 고정시키려고 한 사람이다. 그러니 원래부터 그런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뒷손을 뻗는 것은 그리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깍지손 회목의 힘을 빼고 중구미로 끌면 뒷손은 저절로 그렇게 빠진다.이태호 접장의 경우도 청주로 오면서 뒷손을 힘차게 빼는 동안 저절로 발여호미 형으로 마무리되었다. 뒷손을 크게 빼는 것이 옳은 사법이라는 생각을 굳히자마자 그대로온깍지 궁체가 되었다.
여기저기 활터에 온깍지 궁체로 쏘는 사람을 알아본 결과 2000년 현재 전국의 한량가운데 나이 칠순 이상의 노인들을 빼면 발여호미형으로 뒷손을 처리하는 사람은 30명이 채 안 되었다. 실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과 같은 관행이 계속되면 머지않아 멸종의 위기로 몰릴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다.
2000년 8월부터 나는 온깍지궁사회 홈페이지를 제작했다. 홈페이지 운영이라든가제작 기법을 막 배워가면서 만든 수준이기 때문에 전체의 모양은 보잘 것이 없는 단계였다. 다만 국궁의 자료를 공유하고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공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겉모양이야 어쨌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시범대회 날짜는 2001년 1월 6일로 잡았다. 그것은 그때가 한 겨울이어서 대회가없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을 사람들에게알렸다. 연락이 닿는 대로 온깍지 궁사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리고는 1월6일 청주로 사람들이 모였다. 그것이 온깍지궁사회의 출범 모습이었다. 이날 몇 십 년만의 유례없는 폭설을 뚫고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석희(부산 사직정), 이병국(광주 송무정), 조영석(구례 봉덕정), 이태호, 정진명, 장창민(청주 우암정), 윤득수(창원 강무정), 신해준(대구 팔공정), 이문옥(광양 백운정), 설동룡, 김진선(부산 수영정), 최예임(창원 강무정), 남상인(광양 마로정), 김종숙(부산 사직정)
세미나에서 온깍지궁사회의 성격을 규명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적, 그리고 행사의 시행방법까지 자세히 토의했다. 그 발제는 내가 했고, 대체로 큰 수정 없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이 날 중요하게 논의되었던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온깍지 사법의 원형을 지킨다.
- 전통을 계승하되, 그 기준은 1940년대 서울의 활쏘기로 한다.
- 온깍지 대회를 개최한다.
- 학술작업을 한다. 그 방법으로 국궁논문집을 간행하고 세미나를 연다.
- 기타 전통의 계승과 국궁의 발전에 필요한 사업을 한다.
이상의 내용은 이후 온깍지궁사회의 핵심 사업이 되었고, 실제로 활동을 마감한2007년까지 그대로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아울러 이 모임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도 모임의 이름을 무엇으로 해야 할 것인가가큰 고민거리였다. 전통사법보전회, 활터풍속보존회, 전통활쏘기회, 전통활쏘기보존회 발여호미궁사회, 학무회, 학무궁사회 같은 이름이 떠올랐지만, 앞서 말한 성격을 담아내기에는 무언가 한 가지씩 부족한 이름이었고, 의미가 너무 돌출하여 한 눈에 확 와닿는 느낌이 서지를 않는 말들이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조영석 접장으로부터 온깍지라는 말을 듣고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바로 그 말이라는 확신이 섰다의미로 보나 이미지로 보나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말이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가리키는 궁사를 덧붙이면 간단히 끝난다. 그래서 ‘온깍지궁사회’가 된 것이다.
2. 온깍지 대회
온깍지 대회의 필요성은 두 가지이다. 발여호미 형으로 깍짓손을 떼는 한량들이 소외당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활쏘기 행사의 모습을 1940년대의 그장면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즉 복장부터 장비는 물론 운영방식까지 일체를 1940년대의 서울 풍경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복에 두루마기까지 입고서 각궁에 죽시로 활을 쏘아보는 것이다.
우리의 활쏘기는 1940년대까지 별 다른 변화 없이 수천 년을 똑같은 모습으로 전해왔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대에는 활을 제대로 쏘기 못했고, 1960년대후반부터 활성화되다가 1970년대부터는 사법마저 변하여 이게 우리 전통 민속 활이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변한 것이 원래의 것더러 사이비라고 손가락질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온깍지 대회는 이러한 변화를 정확하게 보고 원래의 활쏘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지키기 위해 진행하는 행사이다. 따라서 1940년대와 맞지 않는 모든 것은 그 자리에 나타나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그 후에 생긴 개량궁이라든지, 카본살이라든지 하는 장비는 쓸 수 없게 된다. 대회 운영방식도 마찬가지이다.
1)온깍지활쏘기한마당
먼저 용어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궁도대회라고 하지 않고 활쏘기라고 한 것은 궁도라는 말이 우리가 써서는 절대로 안 될 말이기 때문이다. 모든 말은그것을 쓴 사람들이 붙이는 것이고, 그렇게 붙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궁도는 일본말이다. 메이지 유신 때 생긴 말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군국주의의 시작을 알리는신호탄이다. 이미 무기로서 생명을 잃은 격검(擊劍)과 궁술을 스포츠로 전환시키면서천황제라는 새로운 체제에 맞게 형식을 갖추어 천황제 하의 신민을 육성하는 한 방식으로 새롭게 재구성시킨 것이 검도와 궁도인 것이다.1) 궁도에서 요구하는 형식을 따르는 순간 그것은 군국주의의 이념을 암암리에 수용하고 복종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것은 1945년 일본 군국주의가 원자폭탄 두 발에 무릎을 꿇은 이후 중단되었지만, 1960년대 들어 일본의 부흥과 함께 일본 교육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궁도는 일본말로 ‘규도’이다. ‘弓道’라는 한자를 쓰면 우리는 ‘궁도’라고 읽지만, 일본활을 이미 아는 사람들은 ‘규도’라고 읽는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 활을 뜻한다. 그런데이미 일본 활은 세계화되었다. 전 세계, 특히 선진국에서 일본 활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弓道라는 말로 우리 활이 소개되면 외국인들은 일본 활의 한국지부를가리키는 말로 알아듣는다. 궁도라는 말을 쓰는 것은 국궁의 앞날에 스스로 무덤을 파는 길이다.
데리다나 라캉의 텍스트 이론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모든 말은 어떤 문맥 안에서해석된다는 것은 활쏘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궁도는 일본 군국주의와 일본의 국가 체육이라는 문맥을 빼놓고서는 읽을 수 없는 낱말이다. 그런데도 ‘도’(道)라는 말에탐닉한 일부 활량들이 일제 때의 관행을 아무런 반성 없이 이어받은 결과 전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활쏘기 대회가 궁도대회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이 글을 본다면 틀림없이‘한국에는 일본의 활쏘기가 아주 활성화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점을 인식한 우리 선배들은 1960년대에 이미 ‘활쏘기 대회’라는 말로 일본 활과 우리 활을 차별화 시켰다. 그런데도 얼마 안 가 이를 뒤집고 버젓이 ‘궁도대회’라는 말을 써서 이제는 한국활이 ‘궁도’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도를 닦으려면 산 속으로 들어갈 일이지 활터에 와서 각궁을 들고 일본 활의 도를 흉내를 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도 않거니와 우리 활의 전통으로 볼 때 여러 모로 이상스러운 일이다.2)
세계의 다른 활과 구별하여 우리 활의 정체성을 살리는 길은 ‘활쏘기’라는 우리말을쓰는 것이다. 활쏘기라는 말을 쓴 데는 이런 의미가 있다. 우리의 전통 활쏘기를 추구하는 온깍지궁사회에서 거기서 쓰이는 말까지 회복하려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대회 대신 ‘한마당’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이 날 활 쏘는 정순 경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활쏘기 전통을 살리기 위해서 예부터 내려오는 여러 가지 풍속을 재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순경기를 하는 한편, 다른 곳에서는 윷놀이도하고, 돈내기 활쏘기[錢射]도 하며, 투호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활과 관련된 모든 행사를 곁들여서 하게 된다. 그래서 마당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40년대의 서울 활쏘기 풍속을 고스란히 되살린정순 경기이다. 이때는 각궁 죽시만 참가할 수 있으며 모두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는다. 2001년 시범대회는 이러한 시작을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참가자들은 거의가 한복에 두루마기를 걸쳤으며, 유엽전 과녁 크기를 그대로 재서 만든 솔포를 걸고 활을쏘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날 행사에 참가한 성낙인 선생이다. 그날은 20년만의 폭설이 전국을 뒤덮어서 온통 빙판길이었다. 그런데도 성낙인 선생은 이 모임의 취지를 듣고는 서울서 9시에 출발하여 정오가 다 된 시각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회원들이 활을내는 동안 뒤에서 작대 명단에 일일이 볼펜으로 표시를 해가면서 한 순을 쏘고 나면일일이 궁체의 장단점을 지적해주었다. 실로 40년만에 서울 황학정의 활쏘기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궁체는 물론 획창법까지 배웠고, 대회 운영방식까지도 그대로 재현했다. 계속 내리는 눈비 때문에 비록 한 순밖에 못 쏘았지만, 그날의 감동은 영원히잊을 수 없는 것으로 회원들의 가슴에 남았다.
이 날부터 온깍지궁사회에는 이른바 ‘명무’라는 명예로운 명칭이 등장했다. 명궁은현재 5단 이상으로 과녁을 잘 맞히면 얻는 이름이다. 그러나 온깍지궁사회의 명무는시수가 아니라 궁체를 본다. 집궁 40년이 넘은 구사들을 초청하여 궁체가 가장 좋은사람을 선정해달라고 하고, 그렇게 결정된 사람에 대해 명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날, 성낙인 선생은 궁체 좋은 사람을 지정했고, 그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온다.
그날 오후에 내가 성낙인 선생에게 궁체가 좋은 사람을 지적해 달라고 하자 몸이 많이 돌아선 것만 고친다면 아주 좋은 궁체라고 하면서 둘을 가리켰다. 조영석과 남상인이 그들이다. 궁체상은 조영석과 남상인 둘이 받았다.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날 대회는 나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궁체상 수상자를 지정해달라는 내 요구에 앞의 두 분을 지적한 뒤에 잠시 후 성낙인 선생은 마지막으로 내 이름도 가리켰다. 나는 대회를 주관한 측인 데다가 성 선생하고 아주 잘 아는사이이니, 나는 상을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나까지 상을 받을 경우 대회 취지 전체를 퇴색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판단할 때도 이것은 성낙인 선생의개인감정이 개입된 것이 분명했다. 그때 나는 내가 보기에도 궁체가 어설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나를 지적한 것은 황학정에서 처음 만나서 같이 쏠 때와 달리 이제는 보기 흉하지 않을 만큼은 되었다는 격려의 뜻일 것이었다. 그때 황학정에서 살대를턱밑으로 대고 반깍지로 쏘던 나의 궁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신 것을 나는 똑똑히기억한다. 그것이 나에게는 채찍질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떨치기 위하여 나는 궁체를 바꾸었고, 몇 년 만에 성 선생은 우암정에서 내 궁체를 다시 본 것이다. 따라서 성선생의 지적은 그러한 나의 노력을 격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상을받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일이지 않는가! 그날의 지적은 성 선생이 내 궁체를 인가한일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뜻 깊은 일이었다.
이 시범대회가 모범이 되어 이후 매년 겨울이 되면 활쏘기한마당은 전국의 활터를돌아가면서 열렸다. 지금까지 실시한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범 2001. 1. 7. 청주 우암정 30여명 조영석, 남상인(성낙인)
1회 2002. 1. 6. 광주 송무정 70여명 성순경(김중원)
2회 2003. 1. 5. 곡성 반구정 50여명 이자윤(안태균)
3회 2004. 2. 29. 청주 우암정 40여명
4회 2005. 1. 30. 함양 호연정 20여명
5회 2006. 3. 12. 군산 진남정 30여명
6회 2007. 3. 10. 보은 보은정 20여명
2)온깍지복놀이한마당
이 복놀이 한마당은 실로 우연히 생긴 행사이다. 청주 우암정에서 시범대회를 마치고 내년을 기약하며 아쉬운 작별을 하는데, 그 아쉬움을 끝내 이기지 못한 한 회원이중간에 한 번 더 모여야지 지루해서 언제 내년 겨울까지 기다리느냐는 넋두리를 한 것이다. 이것이 말밥이 되어서 다른 회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간에 한 번 더 모이자고맞장구치고 나섰다. 아울러 한 해의 중간인 여름쯤에 한 번 더 모이자는 제안이 나왔다. 복놀이 대회는 그렇게 해서 갑자기 하게 된 것이었다. 이름이 복놀이인 것은 한여름 복더위 때 모여야 각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 일정을 비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겨울 대회가 우리 모임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아주 중요한 정식 대회로 운영했으니까, 여름 모임은 회원들끼리 간편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는 대회로 하자고 하였다.그래서 겨울대회처럼 엄격한 규정 없이 간단한 복장으로 모여서 친목을 돈독히 하는대회로 정착하였다. 역시 전날 모여서 세미나를 하고 다음 날 대회를 하는 방식이었다. 여태까지 행한 대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회 2001. 8. 5. 창녕 부곡정 50여명 류근원, 남상인(김향촌)
2회 2002. 8. 11. 울진 칠보정 50여명
3회 2003. 8. 3. 통영 한산정 60여명
4회 2004. 8. 22. 여수 무선정 30여명
5회 2005. 8. 14. 계룡 신도정 50여명
6회 2006. 10.18. 용인 법화정 30여명 없음(백남진)
3. 학술 사업
한국의 활쏘기는 오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없는 형편이다. 1929년에 나온『조선의 궁술』외에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기록이없다는 것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 가는데, 가장 큰 장애가 된다. 기록은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공유해야만 그를 바탕으로 더 좋은 생각이 나오는 법이다. 더 큰 문제는 국궁계 내에서 기록에 관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상태에서 것은 국궁의 발전은 공염불이거나 요원한 일이다.
기록은 이미 있는 현상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것들에 대한기록이 정리된 다음에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학설이 나오고 새로운 이론이 탄생되는것이다. 그런데 국궁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예컨대 몇 연도 어느 대회 때 우승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을 알아볼 도리가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 국궁계의 현실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미 있는 자료마저도 사라져가고 있다는 점이다. 각 활터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내력 또한 복잡하다. 그러한 내력을 전하는 글들이산재해있는데, 그것을 공유하지 않아서 그것을 소장한 활터나 임원이 그것을 분실하고나면 그날로 모든 기록과 역사가 끝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그런 소식들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지 않는 방법은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온깍지궁사회가 출범할당시부터 우리는 이런 문제점을 중요한 것으로 합의했고, 모임이 출범할 때 중요한 사업의 한 가지로 정했다. 그리고 힘이 닿는 대로 실천에 옮겼다.
1)국궁논문집
국궁논문집은 그러한 시책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두면서 시행한 것이다. 2001년부터매년 출판을 해서 2007년 제6집까지 나왔다. 논문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논문에대한 소양을 갖춘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에 적당한 주제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국궁계에서 정식 논문집을 낼 만한 능력을 갖춘 개인이나 단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화과정에서 국궁 역시 우리 사회의 주변 문화로 밀려났기 때문에 생긴 소외 현상이다.
이 점은 국궁논문집을 내는 과정에서도 역력히 드러났다. 논문이라는 체제를 갖추어서 글을 쓸 만한 필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학술 논문에 걸맞게 이론의 뒷받침을 바탕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것은 여태까지 나온 국궁논문집의 내용을 훑어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논문집이라는 체제를 고집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궁의 현실을기록으로 남길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아무리 주관이 섞인 글이라고 하더라도논문이라는 체제를 갖추어야만 자기 주관에 함몰되지 않고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할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궁논문집은 당분간 그 형식보다는 내용에 중점을 두어서현재의 상태를 문자로 남긴다는 최소한의 조건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각 활터의 정기(亭記)라든지 구사들의 대담 기록이라든지 하는, 정식 논문의 범주에 들지 않는 글들까지 실어서 뒷날 국궁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고육지책을 썼다.
여태까지 발행한 논문집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제1집 : 2001년
- 조선시대 편전과 통아(유세현)
- 육군사관학교의 국궁 활동 현황(김기훈)
- 디지털 시대의 국궁 운용(이건호)
- 목궁 백일장 연구(박동일)
- 발디딤과 몸통의 방향 연구(조영석)
- 비정비팔과 전통사법(최석규)
- 활을 보는 몇 가지 관점(정진명)
- 온깍지궁사회의 틀과 뜻(이석희)
- 선친, 성문영 공(성낙인)
- 전라도 지역의 해방 전 활쏘기 풍속(윤준혁)
② 제2집 : 2002년
- 덕유정의 사계 좌목 고찰(이건호)
- 덕유정의 연중 행사 고찰(한영국)
- 조선시대 향사당 연구(김신택)
- 목궁 백일장 계승 방안(박동일)
- 공군 내 국궁 활성화 방안(김용욱)
- 장호공업고등학교의 국궁부 활동(함영수)
- 사풍에 대한 고찰(정진명)
- 예천 활 제작 과정(권영구)
- 우리 활 구조와 형태의 이해(조영석)
- 우리 활 줌과 줌 쥐는 법(조영석)
- 자연류 궁체 갖추기(이병국)
- 들어당겨 짊어진 궁체 연구(최석규)
- 우리 활의 원리 고찰(장창민)
- 전남 지역의 해방 전 활쏘기 풍속(이종수)
- 석호정중수기
- 봉덕정기
③ 제3집 : 2003년
- 정간에 대한 설문 결과 고찰(이건호)
- 청주 지역의 정간 고찰(정진명)
- 덕유정의 편사 방법(한영국)
- 활과 단전호흡(박중보)
- 활쏘기의 마음가짐 고찰(김용준)
- 올바른 활쏘기 문화 정립을 위한 철학적 기초(정덕형)
- 백자철화수뉴문병에 담겨있는 우리 활의 곡선미(이용희)
- 소리화살과 그 원리(이자윤)
- 활과 태극(장창민)
- 오늬 먹이기와 깍지손 쥐는 법(조영석)
- 국궁사를 찾아서: 육일정과 남극재의 사계 좌목
- 반구정기
- 애기살복원방안
- 충남지역의 해방 전 활쏘기 풍속(박경규)
④ 제4집 : 2005년
- 국궁의 3대 장애 비판(정진명)
- 호남칠정의 제례 고찰(한영국)
- 군산 진남정의 어제와 오늘(윤백일)
- 국궁문화 계승을 위한 시지 제작(이자윤)
- 단전호흡에 대한 일반적 이해(박중보)
- 노자와 활Ⅰ (정진명)
- 활과 해부학(최병영)
- 중심점 형성과 이동(조영석)
- 국제 민속 활 축제 참가기(성순경)
- 전통의 여운, 마사법(정진명)
- 궁술종합목록(이건호)
- 개성 지역의 해방 전 활쏘기 풍속
⑤ 제5집 : 2006년
- 관덕의 원형을 찾아서(김기훈)
- 정간의 허상과 실체(이태호)
- 호남칠정궁술경기회와 가입 정에 관한 고찰(한영국)
- 발시 과정에서 줌손의 이동과 깍지손의 이동(조영석)
- <조선의 궁술> 사법토론(이자윤)
- 심담십사요의 재해석 1(이태호)
- 활터와 태껸(정진명)
- 기사법을 위한 몇 가지 단상(진경표)
- 초기 활의 설계 방식과 제작 방법(박현우)
- 충남지역의 해방 전 활쏘기 풍속 2(백남진)
⑥ 제6집 : 2007년
- 조선궁술연구회 창립 연도 고찰(이건호)
- 국궁사 시대 구분론(정진명)
- 태극기와 정간(김집)
- 죽시의 변천에 관한 소고(유세현)
- 각궁삼삼이의 구조와 원리 고찰(장창민)
- 세계 민족궁 축전 및 세미나의 성과와 문제점(김기훈)
- 비정비팔 흉허복실의 이해와 응용(조영석)
- 고대 활의 설계방식과 제작방법(박현우)
- 정읍 필야정 사계 좌목 발굴기(한영국)
- 필야정의 사계안 좌목 선생안 해의(윤백일)
- 인천지역의 편사놀이(정진명)
- 독일 하늘에 쏘아올린 한국 활(박현우)
- 관덕정서
- 고양 지역의 해방 전 활쏘기 풍속(이정천)
2)온깍지 세미나
국궁논문집이 학술화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세미나는 국궁계의 현안을 점검하고 토의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깍지궁사회가 전국조직이기 때문에 따로 회원들을 모이게 하기어려워서 겨울 대회와 여름 대회가 실시되는 전날 모여서 시행한다. 우총무가 회원들의 의견을 두루 수렴하여 문제가 될 만한 주제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발표자를 물색하여 미리 홈페이지에 내용을 공표한다. 그리고 발표 내용을 미리 복사하여 회원들에게돌린다. 그리고 당일 일정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세미나의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대개 토요일 오후에 회원들이 정해진 장소에 모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전국에서 다 오기 때문에 도착하는 시간이 일정치를 않아서 본행사를 시작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점을 감안해서 오후 세 시쯤부터는 활을 쏘면서 할 수 있는 행사를 한다. 예컨대, 전사, 똑떼기, 목궁백일장, 애기살이나 우는살 쏘아보기, 멀리 쏘기, 투호 같은 것이 그것이다. 모두 우리의 전통 활쏘기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저녁 무렵이 된다. 그러면 저녁을 먹고 정식세미나에 들어간다. 세미나의 내용은 다양해서 그때그때 달라진다. 세미나의 주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원로 구사들을 초청하여 옛날 활쏘기 풍속을 듣기.
- 구사들 초청하여 사법 강의 듣기
- 국궁계의 현안 토의하기
- 온깍지궁사회 각종 현안 보고와 문제 토의하기
- 온깍지궁사회 교장의 사법 강의
- 활쏘기 좌담
이런 행사를 진행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걸려서 한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개는다음날 대회가 열리는 활터에서 시작을 하지만 밤이 늦어지면 숙소인 여관이나 찜질방으로 옮겨서 새벽까지 논쟁이 이어지는 수가 많다. 여태까지 몇 차례 세미나를 했만새벽 두 시 이전에 끝난 적이 없고, 회원들 중에는 밤을 꼬박 새우는 사람도 있다.여태까지 실시한 세미나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1. 1. 6. 청주 우암정 20여명 온깍지궁사회의 체제와 운영 원리
2001. 4. 20. 말레이시아 20여명 성순경이 외국인들에게 우리 활 소개
2001. 8. 4. 창녕 부곡정 50여명 윤준혁 고문의 해방 전 활쏘기 풍속
2002. 1. 5. 광주 송무정 60여명 백인학 사두의 사법 이론
2002. 5. 11. 안동 하회마을 20여명 안동 하회마을 모래톱에서 활쏘기 시연
2002. 8. 10. 울진 칠보정 60여명 사법 토론
2003. 1. 4. 곡성 반구정 40여명 사수 취임식 절차 배우기
2003. 8. 2. 통영 열무정 40여명 선구제(先鞲祭) 시행 방안 논의
2004. 2. 29. 청주 우암정 30여명 임원 개편 및 겨울 대회 진행 요령
2004. 8. 21. 여수 무선정 30여명 전통 시지 제작 방법
2005. 1. 29. 함양 호연정 20여명 최병영 교수의 해부학 강의
2005. 8. 13. 계룡 신도정 20여명 논문집에 실린 내용 토의
2006. 3. 11. 군산 진남정 30여명 조선의 궁술 사법 토론
2006.10. 28. 용인 법화정 20여명 논문집에 실린 내용 토의
2007. 9. 8. 함양 호연정 10여명 온깍지궁사회 활동 중지 결정
3)온깍지 답사
세미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정한 주제를 공부하고 토의하는 것이지만, 국궁계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예를 들어 오랜 전통을 간직한 활터를 현장 방문하여 정리하는 것은 소수 인원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면서 자료를 정리하는 데 아주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회원들 몇몇이서 모여서 오래 전에 활을 쏜사람이라든가, 특별한 행사가 있다든가 하면 그런 곳을 찾아다녔다. 그런 정리 작업을온깍지 답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여태까지 답사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01. 1. 30. 경남 지역 이석희, 정진명, 윤득수 경남지역의 활터 방문과 구사 면담
2001. 4. 21. 경기도 포천 이석희 외 다수 경기 북부 지역의 목궁 백일장 조사
2001. 6. 24. 강경 덕유정 조영석 외 다수 강경 덕유정의 역사와 풍속 취재
2001. 8. 26. 경남 사천 온깍지궁사회원 다수 김향촌의 납궁례 실시
2002. 1. 25. 제주도 윤득수 외 다수 제주도 관광 및 활터 탐방
2002. 3. 17. 인천 성순경, 정진명 해방 전의 개성지역 활쏘기 취재
2002. 2. 5. 인천 남호정 성순경, 정진명, 이건호 인천 지역의 편사 풍속 취재
2002. 7. 25. 미국 성순경 미국의 국제 민속활 축제 참가
2003. 1. 25. 청주 우암정 우암정 회원 우암정의 정간을 뗀 과정
2005. 5. 28. 경남 마산 윤득수 외 다수 마산 구복 예술촌 구경
활터는 많은 풍속이 전해오기 때문에 학술계나 이론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없는내용들도 많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손쉽게 정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이러한 답사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런 것들이 누적되면 국궁을 이론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학술화를 위한 1차 자료를 모으는 방법으로는 이보다 더 간편하고 좋은 것이없다.
4. 모임의 운영 체계와 임원
온깍지궁사회는 전국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대의원 제도를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지역별로 회원 10명 대비 1명의 대의원을뽑아서 그들에게 임원 선출권을 부여한다.
운영을 위한 임원은 될수록 적은 인원을 선발하였다. 그리고 온깍지궁사회의 취지가옛것을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원을 가리키는 용어 또한 옛것을 살려 쓰는 방법을택하였다. 예를 들어 대표의 경우에는 사수라고 하는데, 이 사수라는 말은 30년 전만해도 전라도와 경상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대표 이름을 통일시킨다면서 모두 사두로 바꾸었다. 그 흐름을 따라서 이제는 찾아보기어려운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물론 국궁계의 다양화에 역행하는 불행한 조치이다.
지금은 사두라는 말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사두 이외에도 사장이나 사백이라는말을 쓰는 곳도 있다. 따라서 사수라는 말 역시 다시 살려 써도 좋은 말이다. 바로 이점을 착안하여 온깍지궁사회에서는 사수라는 말을 되살린 것이다.
사수는 명실 공히 온깍지궁사회를 대표하는 얼굴이다. 사수 밑에 모임을 실제로 운영하는 임원으로 행수와 교장을 두었다. 교장은 사법과 사풍의 문제를 담당하는 임원이고, 행수는 회원을 관리하고 모임의 운영을 통솔하는 직책이다. 행수나 교장 역시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옛날에는 활터에서 실제로 쓰였던 말이다. 행수 밑에는 총무를 둘 두어서 각기 일을 맡았다. 학술과 기획을 맡은 우총무와 운영의 실무를맡은 좌총무가 그것이다. 그리고 권무를 두어서 대회 진행을 맡아본다.이 모든 직책과 명칭은 옛것을 계승하는 온깍지궁사회의 취지에 따라 붙인 것이다.이들 임원에 대한 취임 방식 역시 옛날의 방식을 따른다. 그래서 초대 사수인 윤준혁의 취임식 때는 옛날 방식으로 악대를 동원하여 행사를 치렀다.
5. 온깍지 대회의 지향점
온깍지궁사회에서 주관하는 대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940년대의 서울 지역 활쏘기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옛 활쏘기를 재현해보는 것이 그것이다.첫 번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겨울 대회에 1940년대의 활쏘기를 실시한다. 한복에두루마기를 입고 각궁에 죽시로만 대회를 치른다. 경기 운영방식 또한 1940년대식으로 한다. 그 당시의 과녁 크기를 놓고 획창을 하면서 진행한다.
현재는 유엽전의 과녁을 놓고서 옛날에 시행한 방식을 시행하고 있다. 즉 10순 한획을 쏘아서 시수대로 소살판, 살판, 대살판, 시수꾼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1940년대 활쏘기 풍속의 절정은 터편사이다. 그런데 터편사는 한 띠가 15명이기 때문에 최소한 30명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참가자 30명이 넘는 시점부터는 서울 편사를 옛날과 똑같이 시행한다.
두 번째 목표인 옛 활쏘기 재현은 현재도 많이 진행되고 있다. 똑딱이도 했고, 목궁도 쏘았으며, 이제 전사도 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우는살을 복원하여 대회 때마다 쏘아볼 수 있게 하였고, 애기살도 복원하여 편전대회도 시행하였다.
6. 온깍지궁사회 활동의 결과와 영향
활쏘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과녁을 맞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국궁계는그 동안 오로지 맞추는 기능만을 향해 열심히 달려왔다. 자신의 궁체가 어떻게 변해갔으며 사법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하는 것은 활 쏘는 사람들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되지 않았다. 오직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에 맞아서 대회에서 1등을 하면 그것으로끝이었다. 복장을 어떤 것을 입든, 화살을 어느 방향으로 차든, 양궁의 장비로 팔소매를 묶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40년이 흘렀다. 그 결과, 이제는 국궁의 모습을 보면 굳이 국궁이라고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지경이다.
이런 분위기에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서 출범한 단체가 온깍지궁사회이다. 따라서 온깍지궁사회의 가정은 활쏘기에는 과녁 맞추는 것 이외에도 중요한 것이 있고,그것은 바로 전통 풍속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녁 맞추는 데 골몰한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복장이라든가 궁체라든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그리하여 옛날 모습은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돌이켜보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런 영향으로 국궁계에는 그 전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고 활을 쏘다 보니 30여 년 전에 사라진 팔찌가 나타났다. 팔찌는 옛날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장비였다. 한복은 소매가 늘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감아서 묶어야 하고, 그런 방법을 우리 조상들은 팔찌로 해결한 것이다. 팔찌라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조차 몇 안 되는 상황에서 온깍지궁사회에서 시범대회 때모두 팔찌를 차고 나오자 이제는 전국의 모든 한량들이 다 그러한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나아가 옛날에 팔찌를 써본 경험이 있는 구사들의 회고와 실천을 통해서 중요한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옛날에 팔찌를 잊고 안 가져왔을 경우에는 임시방편으로 대님을 풀어서 팔을 묶었던 것이다. 이것은 곡성 반구정에서 사수 취임식을 할 때 한복을단정하게 입은 윤준혁 사수가 그렇게 함으로써 알려진 것이다.
둘째, 솔포가 나타났다. 솔포는 헝겊으로 만든 과녁을 말한다. 솔포는 실제로 기록으로만 남았지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그런 것을 2001년 시범대회에서 처음 솔포가등장했고, 그것이 생생하게 인터넷을 통해서 전해지면서 이제는 전국 곳곳에서 볼 수있는 한 풍물로 정착했다. 물론 사정에 따라서 헝겊 과녁을 만들어서 들놀이 때 쓴 활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솔포라는 이름을 가진 물건이라는 것과 누구나 쉽게만들어서 쏠 수 있는 장비라는 인식이 보편화된 것은 온깍지궁사회의 활동 이후이다.
셋째, 애기살이 살아났다. 애기살은 조선의 비밀병기였다. 그래서 왜구나 여진족이배우지 못하도록 변경에서 교습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무과폐지 100년만에 우리의 주변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을 온전히 되살린 건 온깍지궁사회였다.활 쏘는 사람들이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세상에 널리 보급한 것이다.그리하여 그런 보급을 바탕으로 2003년 여름에는 제1회 편전대회까지 열었다.
네째, 우는살이 나타났다. 우는살 역시 기록으로만 전해오던 것을 실제로 활터에서쏘아서 누구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대중화한 것은 온깍지궁사회였다. 2002년 광주송무정 대회를 시작으로 이자윤 접장이 소리깍지를 완벽하게 복원하여 언제든지 쏠 수있도록 준비하였고, 대회 때면 언제나 누구든지 쏘아 보도록 하였다.3)
다섯째, 목궁이 살아났다. 목궁은 40년 전에 경기 북부에서 행해지던 거창한 경기였다. 그런데 개량궁의 등장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이미 잊혀진 이것을 연천까지 답사하여 현실 속으로 끄집어 낸 것이 온깍지궁사회이다. 광주 송무정에서 2002년에 목궁을 누구나 쏘아볼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언제든지 목궁을 만들어 쏠수 있다.
여섯째, 잊혀져가는 각종 행사가 살아났다. 납궁례라든가 사두 취임식이라는가 하는잊혀져가는 전통을 되살려서 영상으로 담았다. 그래서 언제든지 다시 시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곱째, 전통에 대한 사랑이 개인의 차원에서 조직의 차원으로 승화되었다. 사실 개인이 전통에 대해 관심을 갖고 혼자서 즐기는 것은 아무런 표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그런 사람이 모여서 단체가 되면 그 파급효과는 전혀 달라진다. 숫자가 문제가 아닌3) 원래는 다른 시장의 우는살을 사용하려고 접촉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그래서 이자윤 접장이 직접연구하여 만들었다. 우는살은 깍지의 상태에 따라 화살이 날아가는 지점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이것은 화살의 속도가 줄면서 깍지 속으로 유입되는 바람의 세기가 달라져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소리를 내는 깍지를 만드는 것이 진짜 기술이다. 이것을 이접장은 완벽하게 복원했다. 실제로 유영기가 복원한 우는살은 몇 차례 언론을 통해 선보였다.
여덟째, 국궁의 학술화와 논리화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지지부진하던 기록이 매년반복되는 논문집 발간과 세미나, 답사의 시행으로 눈부신 증가를 보였다. 국궁의 학술화에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을 온깍지궁사회는 꾸준히 해왔고, 그 영향은 다른 단체에도 끼쳤다.
아홉째, 전통에 대한 성찰이 뚜렷해졌다. 과연 올바른 전통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활량들 스스로 묻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궁계에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이 있고 근래에 생긴 관습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 전혀 알 수 없을 만큼 반성 없이 이어져왔다. 그러한 관행에 많은 부분 각성을 요하는 기능을 하였다. 예를 들면 정간 같은 경우가 그것이다. 정간은 근래에 생긴 것인데, 마치 옛날부터 있어온 것인 양 신사들에게 강요하다가 온깍지궁사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각 지역의 활터 풍속을 비교하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아울러정간은 구시대의 권위주의의 산물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는 일은왜곡된 활터 풍속을 바로잡는 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열째, 사법의 정통성을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깍지궁사회가 출범하기 전까지는사법의 전통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뒷손을 시원하게 뻗는 발여호미형 온깍지 사법이 정통이었는데, 시수에만 집착한 결과 어느 결에 반깍지 사법으로 대세가바뀌었고, 세월이 좀 흐르자 온깍지 사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온깍지 사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누구나 뒷손이 터지는 것을 경계했다. 혹시라도 뒷손을 뻗는 사람이 있으면 구사들은 그들을 불러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이런 상황에서 온깍지 사법을 고수하기는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온깍지궁사회가 뜨면서 구사들의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옛사법의 정통성 문제를 일깨웠으며, 그러한 인식이 온깍지궁사회의 활동과 인터넷을 통해서 국궁계에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이제는 온깍지 사법이 정통이되, 시수 때문에반깍지 사법으로 쏜다는 식의 인식에 이르렀다.
열한째, 현재의 풍속으로는 알 수 없었던 많은 의문들이 해소되었다. 예컨대, 지금은 화살깃의 방향이 옛날과 다르다. 이 의문을 풀 길이 없었는데, 두루마기를 입고서활을 쏘아보니 한복의 트임이 그 방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두루마기 안에 궁대를 매기 때문에 옷 밖으로 화살을 내밀기 위해서 화살의 방향을 그렇게 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많은 궁금증이 한복을 입고 사대에 서자 해소되었다.
열두째, 사라져가던 여러 가지 용어들이 되살아났다. 활터에는 활터에서만 쓰는 특수한 용어가 많다. 이런 것들이 본래의 뜻을 망각한 사람들 때문에 잘 쓰이지 않다가온깍지궁사회가 그런 용어들을 적극 활용하면서 다시 활발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사수, 행수, 교두, 접장, 좌총무, 우총무, 권무, 장무, 무사, 여무사, 명무, 소살판, 살판,대살판, 시수꾼, 온깍지, 반깍지, 벗깍지, 공깍지, 들깍지, 솔포, 덧살, 애기살 같은 것이 그런 것들이다. 이것은 사전에도 없는 말이어서 활터에서 안 쓰면 영원히 사라질말들이었고, 또 실제로 전통풍속에 관심이 적은 활터에서는 과녁 맞히기 열풍에 비례하여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적극 씀으로써 본래의 용어 회복을 통해서 활터의 주체성과 자부심을 되살린 것이다. 말의 임자들이 그 말을 쓴다는건 스스로 주인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영향이 나타났지만,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그 만큼 많은 변화가 그 사이에 일어났다.
7. 온깍지라는 말
온깍지궁사회가 출범한 후 가장 많이 받는 질문들 중 한 가지가 온깍지라는 말의 출처이다. 심지어는 옛날에 없던 말을 어떤 몇몇 사람이 만들어서 유포시켰다는 황당한의심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온깍지라는 말은 해방 전부터 써온 말이다. 이 점은 해방 전에 집궁한 분들이 고증해준 것이다. 윤준혁, 백남진, 이종수 같은 분들이 그런고증을 해주신 분들이다. 다만 해방 전에는 누구나 뒷손을 크게 뻗어서 쏘았기 때문에굳이 온깍지니 반깍지니 하는 표현을 쓸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서일부에서만 쓰이던 용어였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이 용어가 꼭 필요하게 된 것이다 만작의 우리말은 온작이다. 온작의 반대말은 반작이다. 반밖에 끌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쏘는 것을 ‘반작질 한다’고 한다. ‘반바닥’은 줌손을 미는 손바닥 부분을 말한다. 이 말의 반대말은 ‘온바닥’이다. 손바닥의 바깥 부분으로 미는 것을 반바닥, 손바닥의 복판으로 미는 것을 온바닥이라고 한다. 또 인천편사에서도 ‘반종띠’가 있고 ‘온종띠’가 있다. 두 편이 짝하여 두 차례 편사를 치르는데, 두 번 다 종띠를 서면 온종띠라고 하고, 한 번만 서면 반종띠라고 한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온’은 절반과 짝을 이루어 가득 찬 상태를 나타내는 뜻으로 쓰인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말은 우리말에서 부지기수다. 온통, 온누리, 온세상, 오늬,온점, 온음표, 오냐!, 온종일… 모두 다 채운다는 뜻이 들어있다.‘온’은 꽉 찬 것, 완전한 것을 가리키는 북방계 우리말이다. 북방 활의 성격이 강한우리 겨레의 활쏘기에 북방계의 언어가 많이 남아있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온깍지의 ‘온’에는 이와 같은 뜻이 담겨있다.
8. 사계
온깍지궁사회는 2007년 10월로 활동을 중지하였다. 7년간 활동을 해본 결과 몇 가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온깍지궁사회의 목표는 국궁계의 일부에 1940년대의 활쏘기 풍속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한복을 입어야하고 각궁과 죽시로 온깍지 사법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겨울 대회 때 편사를치를 수 있어야 한다.
처음 출범할 때의 주변 반응을 보면 머지않아 이런 꿈이 곧 실현될 듯했다. 그러나 년이 지나도록 이런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국궁계의 구성원들이자신들과 약간 다른 행동을 보이는 이들에 대해 묘한 적대감을 갖거나 애써 외면했다는 점이다. 이런 결과에 이르게 된 데는 안팎으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어떤 이유라하더라도 그것이 온깍지궁사회라는 존재의 부침을 통하여 국궁계의 현단계 의식수준을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의식 수준이 그러해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서운할지언정 네 탓 내 탓 가릴 것이 없는 법이다.
온깍지궁사회는 출범하면서 내건 목적이 있었습니다.
벌써 7년이 지난 지금, 처음 내건 목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현재의 상태로 보아 앞으로도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목표했던 취지마저 퇴색될 것을 우려하여, 많은 토의 끝에,
온깍지궁사회 활동을 이쯤에서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점 양해해주시기 바라면서, 괴롭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임원진의 결정을 존중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간 성원해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그동안 쌓인 정을 단칼에 끊기 어려워
초창기 멤버들을 중심으로 간혹 안부나 주고받는
오프라인 상의 작은 친목 모임으로 운영될 것입니다.
- 온깍지궁사회 사랑방 회원응접실의 글에서
이에 따라 2007년 11월 3일, 이자윤 교장의 발의로 진해에서 모여 국궁논문집 제6집을 결산하고, 회원간의 우의를 가장 중시하는 친목회인 사계로 전환한 것이다. 이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이석희(부산), 이자윤(진해), 윤득수(창원), 정진명(청주), 이건호(부산), 장창민(청주), 신해준(대구), 류근원(청주), 성순경(서울), 칼 짜일링거(독일)였다.
온깍지궁사회 사계는, 여러 가지 여건으로 활동을 중지했지만, 온깍지궁사회의 이념을 계승하며, 사계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사계의대표인 사장(射稧長)에 성순경을, 실무를 담당할 장무(掌務)에 이건호를 선출했다. 사장은 옛날에 사계와 활터가 공존하던 시절에 사계를 대표하는 직책이다. 이에 반해 활터를 대표하는 직책은 사두나 사수이다. 장무는 요즘의 총무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모두다 사계가 활터를 경영하던 시절의 고풍스런 직책이다.
이로써 지난 7년 동안 전통 보존을 기치로 수많은 담론을 주도했던 온깍지궁사회가국궁계 전체에 많은 숙제를 남기며 공식 활동을 마감했다.
9. 맺음말
풍속은 사람들 속에 살아있을 때 진정한 풍속이 되는 것이다. 죽은 풍속은 살릴 수 없거니와 살릴 필요도 없다. 온깍지궁사회는 이미 죽은 풍속을 무덤에서 꺼내자는모임이 아니다. 현재 살아있는 풍속이되 그대로 방치하면 머지않아 끊어져버릴 그런 풍속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자는 모임이다.활쏘기는 시대에 따라서 변하지만, 그 변화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일 수만은 없다.그렇기 때문에 이미 지나온 과거 풍속이라 할지라도 다양한 모습으로 국궁계의 일부에남아있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우리의 과거를 보존하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확보하는 일과 맞물려있다. 온깍지궁사회는 곧 과거가 될 현재의 일부 모습을 유지하는 소임을 자처하고 나선 모임이다. 더 정확히는, 그 시대를 1940년대에 맞춤으로써궁계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때 그 방향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단체로 남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활동을 중지하기로 결정한 2007년 9월 8일까지 처음 계획한 대로 부지런히 움직였고, 그 과정에서 의문에 싸였던 많은 궁금증이 해소되었다.이 글은 그런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를 한번 정리해본 것이다. 친목모임인 사계(射稧)로 전환하기까지 온깍지궁사회가 7년 동안 벌인 여러 가지 일들은 앞으로도 꼭 필요한 사업이다. 각기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하는 단체들이 나타나서 자기에게 알맞은목소리를 낼 때 전통 활쏘기의 세계도 다양해지고, 그 만큼 깊어질 것이다.(국궁논문집 제7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