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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에서 말을 생각하다
정진명(온깍지궁사회)
1.높임말과 낮춤말
우리 사회는 조선시대에 사농공상이라는 네 계층으로 오랜 세월 살아왔기 때문에 그에 따른 다양한 호칭이 발생했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말을 배울 때 가장 힘겨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 높임말과 낮춤말입니다. 활터도 조선시대의 여러 계층이 쓴 장소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아주 잘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회 전체가 높임말과 낮춤말을 혼동하고, 그 결과 특히나 우리말을 피하려는 허영기가 뚜렷해졌습니다. 예컨대, 몇 년 전에 특정 대기업에서 '손님'이라는 말을 버리고 '고객님'이라고 호칭하면서 손님이란 말은 잘 안 쓰는 말이 되었고, 심지어는 손님이라는 말이 고객님이라는 말에 비해 낮은 느낌까지 주고 있습니다. ‘손님’을 꺼리고 ‘고객님’을 적극 쓴다는 사실이 그것을 반증합니다. 고객님이라고 하면 듣는 사람이 좋아할 것이라는 믿음은, 일부 사업체가 저지른 오류지만, 그것이 널리 공유됨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물론 이러한 편견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1)이빨의 추억
이런 현상은 사회 전분야로 확산되는 중입니다. 특히 전문용어를 비롯하여 우리말을 잘 못 배운 사람들이 우리말을 쓰지 않는 쪽을 택함으로써 이런 증상이 심해지는 중입니다. 환갑을 코앞에 둔 저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 첫 희생양은 '이빨'이었습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이빨이 아파서 군의관에게 갔다가 쪼인트를 까인 적이 있습니다. 짐승의 이가 이빨이고 사람의 이는 치아라고 한다며 군홧발로 훈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저는 충남의 한 시골마을에서 농사짓는 가족에서 태어났고, 그 당시는 드물게 군 단위에서 대학생이 한두 명 나오던 시절에 우리 아버지 항렬에서는 대학생이 넷이나 나와서 마을마다 회자되곤 하는, 나름대로 ‘있는 집안’ 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쓰는 이빨이라는 말이 쪼인트 까일 만큼 상스런 말이 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네 모든 사람들이 상놈이 되기 때문입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조선시대의 4계급 중에서 2번째입니다. 평범한 사람인 것이죠. 그래서 <常놈>인 것입니다.(참고로, 놈이 욕인 된 것은 국어사에서 지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그 밑으로 공인과 상인이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제가 제 말을 쓰는데 그게 쪼인트 까일 일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박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제가 대학에서 국어를 전공한 이후였습니다. 저는 국어교육을 전공하면서 이런 체험 때문에 우리말의 어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살펴봤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에 이미 <한국어어원사전>을 탈고하여 책으로 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저에게 활쏘기 책을 꾸준히 내준 학민사의 만류로 불발에 그치기는 바람에 그 원고는 아직도 제 컴퓨터에서 잠자는 중입니다. 그 뒤로 어원사전이 2권이나 나왔으니, 이 원고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잠자게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빨로 돌아가서, '이빨'은 <이+ㅅ+발>의 구조입니다. ㅅ은 사이시옷으로, 우리말이 결합할 때 끼어드는 것입니다. 시내와 물이 붙으면 시냇물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죠. 이는 당연히 어금니 옴니암니 할 때의 그 이입니다. 발은 무엇일까요? 발은 같은 것들이 나란히 선 모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릿발은 아시죠? 흙 속에서 얼음이 얼어서 흙을 밀고 올라온 자잘한 얼음기둥들을 말하는 겁니다. 글월은 글발에서 온 말인데, 세로로 글을 쓰는 동양사회의 특성 때문에 글을 주욱 이어서 쓴 모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글들이 위에서 밑으로 줄줄이 드리워졌죠. ‘글발’의 비읍(ㅂ)이 순경음화(ㅸ) 되었다가 <ㅜ>로 바뀌면서 글월이 된 것입니다. 중국집 입구에 드리운 발도 이 발과 같은 것입니다. 끗발이 좋다고 할 때의 이 '발'도 이 발이 연장입니다. 말발의 '발'도 마찬가지죠.
그렇다면 왜 이에는 이 <발>이 붙었을까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이들이 나란히 붙어서 한 입술 속에 조로록 나타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런 말을, 내용도 모르고서 체면치레하려고 내치는 중이니, 이빨 대신 치아라고 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허영심을 어찌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사람의 이도 이빨이고 짐승의 이도 이빨입니다. 이걸 구별한다고 해서 사람이 짐승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을 억지 의미 부여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참 안타깝고 한심한 것입니다.(그런데 더욱 암담한 일은 사전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이빨이 이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하여 여기에도 교양이 도배되었다는 것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이러고 있으니 제가 태어나 살던 시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런 일이 진행되는 중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많은 생각을 하고 관찰을 해본 결과 1980년대 접어들면서부터 일상화된 텔레비전의 영향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주로 방송에서 쓰는 말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거꾸로 영향을 미치는 증상이 뚜렷해졌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보니 이것을 더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그런데 방송작가들이 대부분 학교 졸업하고 나서 입문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쓰던 말과 배운 말을 많이 씁니다. 게다가 공중파에서는 비속어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조금이라도 나면 다른 말로 바꾸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라디오스타를 보는데 김국진의 이빨 빠진 얘기가 나왔는데, 그걸 또 유치라고 말하더군요. 젖니를 유치라고 하면 그게 문화 수준이 높아지는 겁니까? 오히려 삼둥이 아빠 송일국이 아이들에게 이를 닦게 하면서 "애들아, 이빨 닦자!"라고 하는 걸 보고 속으로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문화에 대한 오해나 착각 때문에 무언가 수준 있는 말을 써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이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런 부담감이 사람들로 하여금 실수를 줄여야 한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그런 착각을 할수록 그런 혐의가 있는 우리말을 쓰지 않으려는 관성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상황 모면용 편법으로 자꾸 외국어를 갖다 붙이곤 합니다. 한자어를 대용하여 영어를 갖다 쓰는 요즘 세태가 그것을 반영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을 당하는 것이 우리말입니다.
방송에서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고객님-손님>은 둘째 치고, 몇 년 전부터는 치어라는 말이 방송에서 나오더군요. 치어라는 말은 옛날에 쓰이지도 않던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연어 새끼가 남대천에서 자란다고 해야 하는데, 이 새끼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욕을 닮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공중파에서 치어라는 학술용어를 차용한 것입니다.
이런 자발성 자국어 학대는 이미 일상화되었음을 '저렴하다'에서 또 느낍니다. 우리가 자랄 때, 그리고 얼마 전까지도 우리는 값싸다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렴하다로 바뀌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몇 년 전부터 공중파에서 그렇게 하기 시작한 후로 생긴 일들입니다. ‘값싸다’와 ‘저렴하다’를 보면 사람들의 언어 허영심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3음절과 4음절인데, 오히려 긴 말을 쓰면서 지켜야 할 그 어떤 것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언어를 통해 지키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허영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말을 지키지 않으려는 모든 백성들과 싸워야 하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옛날에는 남의 계층에서 쓰는 언어를 부러워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쓰는 언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층사회였기 때문에 어차피 넘나들 수 없음을 아주 잘 알아서 자신들만의 언어를 써왔던 것입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신분제가 비로소 없어집니다. 그리고 1933년에야 비로소 우리말의 규칙이 생깁니다. 이 표준어 규정에서 '표준어는 서울의 오늘날 교양 있는 사람들이 쓰는 것으로 한다.'는 원칙을 삼습니다. 문제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가 문제인 것이죠. 이 문제 때문에 오늘날 우리말은 큰 혼란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서울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쓰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조선시대에는 한문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을, 해방 후에는 영어를 쓴 사람들이죠. 그들은 그렇게 살아오면서 우리나라의 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엄밀히 말해 서울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란, 중산층이 아니라 지배층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문화가 우리말의 중심으로 선 것이고, 시골의 교양 있는 집안 출신인 제가 주변부로 밀려난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군대 군의관에게 이빨로 쪼인트를 까인 원인이 된 지난 100년의 사연입니다.
저는 아직도 이 상황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교양 있는 서울 사람의 말이 기준이라고 했는데, 그 교양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상류층이자 지배층인 강남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의 뼈대를 지난 5천 년 간 이루었던 사람들이 교양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들을 저는 농사꾼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사꾼들의 평범하고 쉬운 말이 우리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조차 자신의 말을 버리고 남의 말을 갖다 씁니다. 단체명을 보면 농사꾼이 아니라 농업인입니다. 농사꾼마저 자신의 언어를 버린 것입니다. 농사꾼이 언제부터 농업인이 되었단 말입니까? 농사꾼 두레가 언제부터 농협이 되었단 말입니까?
2)조심해야 할 존칭어
앞서 사농공상 얘기도 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어른에 대한 공경 문화는 오래 되었고 뿌리가 깊어서 말들도 그런 경향을 많이 반영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범하기 쉬운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어른들과 어울릴 때 어른에게 쓰는 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 실수를 가장 많이 하는 것을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술입니다. 술은 어른에게 약주라고 해야 합니다. "선생님, 약주 한 잔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술 올린다고 하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어른에게는 특별히 약주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우리가 어른들과 말할 때 흔히 범하는 실수 중에 집도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말할 때는 집이라고 하지 않고 댁이라고 합니다. "선생님 댁은 어디신가요?" 이렇게 묻는 겁니다.
잘 보면 약주나 댁은,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따라서 친구나 동료들처럼 친한 사이에서는 쓰는 말이 아닙니다. 격식이 있고 상대하기 어려운 어른들에게 쓰는 존칭어죠. 제가 이빨이 비칭이 아니라고 말하니까 이에 반발을 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특히 강남 대치동에서 살다가 전학 온 학생이 이빨을 짐승의 이에 쓰는 말이니 사람에게 쓰면 안 된다고 했다며 저의 설명에 토를 답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빨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 이런 존칭어에 대한 오해로부터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강남의 점잖은 집안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면 그 또한 틀린 것입니다. 네이버 사전에도 이빨은 이(치아)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풀었는데, 한 마디로 국립국어원을 폐지해야 할 근거를 만든 짓이라고 봅니다. 굳이 치아를 존칭어로 올려놓으려면 약주나 댁처럼 어른들에게 쓰면 실례가 되는 말이라고 해야 합니다. 어른들에게 쓰면 실례가 되는 말이 비칭(낮잡아 이르는 말)인가요? 이건 무식해도 너무 무식한 겁니다. 이 경우 존칭어의 반대말은 비칭어가 아니라 일상어입니다. 술이나 집은 비칭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존칭이 약주이고 댁일 뿐이죠. 이걸 혼동하는 사람들이 사전을 만들고 있으니, 우리 말글의 앞날이 어둡습니다. 국립국어원을 갈아엎지 않으면 우리말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사전에만 남은 화석 언어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집안에서 이빨이 아니라 치아라고 써온 사람이 있다면 그때도 잘 골라 써야 합니다. 즉 친구에게 "야, 약주 한 잔 해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약주가 어른에게 하는 존댓말이기 때문에 친구나 손아래사람에게 쓰면 안 되는 겁니다. 더더욱 자신에게 쓰면 안 되는 말이죠. 이걸 보면 치아도 어른에 대한 존칭어이기 때문에 자신이나 친구, 또는 손아래사람에게 쓰면 안 되는 말입니다. 틀리는 말이죠. "치아 닦으러 가야지.", "애들아, 치아 닦자."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건 "얘야 약주 한잔 하자."라거나, "네 댁이 어디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러니 이런 굴욕을 겪을 위험이 다분한 '치아'라는 말을 왜 자꾸 쓰려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상하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말입니다.
이나 이빨은 치아의 낮춤말이 아닙니다. 그냥 이이고 이빨일 뿐입니다. 강남의 몇몇 집안에서 쓰는 그 우아한 '치아'는 밥이나 술의 존칭과 같다고 본다면 그것 때문에 이나 이빨이 낮춤말이 된다는 것은 착각이자 무지일 뿐입니다. 치아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이나 이빨은 온 백성이 쓰는 말입니다. 이걸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정책을 결정한다면 나라의 망신이고, 곧 언어의 자기학대일 뿐입니다.
4)활터 용어와 호칭
이런 언어상의 혼란이 여실히 일어나는 곳이 우리가 활터에서 쓰는 호칭입니다. 몇 년 전에 성낙인 옹을 종로3가 <지중해 다방>에서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성 옹이 일본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즉 일본에서는 호칭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선생'이라는 호칭은 교사와 의사 빼고서는 함부로 안 쓴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이라고 한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씨'가 되겠죠. 그러면서 또렷한 기준이 없이 혼란스러운 우리 호칭을 아쉬워한 적이 있습니다. 성낙인 옹이야말로 표준어 규정에 해당하는 토박이 서울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국어를 전공한 사람이라서 성 옹이 겪는 불편함과 이상함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충분히 공감한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로 대접받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계층이 바로 교수입니다. 그래서 대학에 몸을 담았다는 낌새만 있으면 교수라는 말을 성 뒤에 붙여서 부릅니다. 그러나 무식도 이런 무식이 없습니다. 교수는 호칭이 아니라 직책명입니다. 직책과 호칭은 다릅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관습에서 내려온 우리 사회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당상관과 당하관은 정삼품에서 나뉘는데, 당하관은 나으리라고 불렀고, 당상관부터 영감이라고 불렀습니다. 영감의 위는 대감이고, 대감의 위는 상감입니다. 따라서 정이품을 영감이라고 불렀다가는 당장 곤장 감입니다. 대감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이토록 엄정했습니다.
교수는 호칭이 아니라 직책명입니다. 호칭은 '선생'입니다. 제가 다닌 국어교육과에서는 모든 교수님들이 우리더러 자신을 교수라고 부르지 말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저희는 대학 4년 내내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학과에 교양 과목 들으러 가서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할 때 '선생님'이라고 할 때 이를 지적하는 교수님도 있었는데, 저희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학과장님이 교수가 틀린 호칭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과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저는 평생토록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 싸움을 활터에서도 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교수는 대학에 몸담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교사는 초등과 중등에 근무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김 교사님, 이 교사님.’이라고 호칭하지 않는 이유는 교사가 틀린 말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생이라는 호칭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을 두고 교수라고 부른다면, 중학교에서 선생님을 김 교사님 이 교사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그렇게 불러주는 분들에게 실례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그런 실례를 해달라고 교수들이 요구합니다. 이런 무식한 자들이 대학에 몸담고서 이 세상을 호령하고 학생들을 부립니다. 옛날 같으면 곤장을 맞을 짓입니다.
예절과 계층에 민감한 조선시대의 풍속이 살아있는 활터에서는 어떨까요? 활터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하면 됩니다. 활터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말로 '사말'이라고 했습니다. 남에 대한 높임말로는 '접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남을 부를 때 김 접장님이라고 하고, 자신을 말할 때는 사말이라고 하면 됩니다. 그렇게 몇 백 년을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접장이 옛날 보부상들이 쓰던 용어라면서 활터에서 쓰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우암정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 논리에게 감화된 몇몇 사람이 자신을 접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해서 '나를 접장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는 황당한 요구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우암정에서는 접장이라는 말을 회피하는 경향이 한 동안 뚜렷했습니다. 결국 우암정에서 사범을 맡은 류근원 접장이 <국궁논문집9>에 접장이 옛날부터 활터에서 씌어온 용임을 입증하는 논문을 쓰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사두나 부사두는 직책명입니다. 옛날에 벼슬 있는 사람들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벼슬에 해당하는 호칭을 불러주면 되었습니다. 정삼품 당상관이면 영감님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성문영 정삼품 통정대부였기 때문에 영감님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사두님이라는 호칭은 직책 명으로 불린 것이어서 활터에서 임원회를 한다든지 할 때 쓰는 말입니다. 특별히 그 말이 쓰일 때를 빼고는 안 쓰인 것입니다. 예컨대 교수도 그가 교수임을 나타내야 할 상황에서는 호칭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대학교 ○○과 김 교수님을 소개한다든지 하는 상황 말입니다. 사실은 정확히 말하면 ‘○○대학교 ○○과 교수 김○○ 선생님’이라고 해야죠.
이랬던 활터 용어가 근대로 들어오면서 호칭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는 활터에서도 사두님 총무님 하는 특정 직책을 부르기도 합니다.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린다고 해서 그것을 호칭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두나 총무가 호칭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의 임기가 끝나면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교사가 정년퇴임을 하면 여전히 호칭인 선생님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를 교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호칭과 직책 명은 이렇게 다릅니다. 직책은 그가 그 직임에 있을 때만 붙는 것입니다.
따라서 활터에서도 직책명은 사두이지만, 호칭은 접장입니다. 접장으로 불러야 마땅하나, 그가 그런 직책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두를 호칭 대용으로 쓰는 것입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원칙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접장이라는 말은, 접장이 되지 못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붙은 말입니다. 아직 몰기를 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몰기를 한 사람에게 예우해주기 위해서 '접장'이라는 말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접장이 보부상들이나 쓰던 용어라며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 사람의 무의식에는 접장보다 더 좋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명궁입니다. ‘명궁님, 명궁님!’ 해주니까 접장보다 더 나은 말이라는 착각을 한 것이죠. 실제로 1980년대 들어 명궁이 생기고 1990년대 들어 명궁이 대량생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명궁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니까 같은 접장 중에서도 그냥 접장이 있고, 명궁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명궁이 된 사람은 자신이 접장과 분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이죠. 그래서 명궁이라고 불러달라는 무언의 압력을 '접장'에게 한 것입니다. 즉 접장을 낮춤말로 만들면 저절로 자신이 높아진다고 착각한 것이죠. 그래서 보부상 어쩌고 하면서 궤변을 퍼뜨린 것입니다. 순진하고 무식한 몇몇은 거기에 부화뇌동하여 자신을 접장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 활터에서 활쏘는 타정 사람들끼리 만나면 제일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일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헐!
명궁은 호칭이 아닙니다. 대한궁○협회에서 제도화하면서 만들어낸 말입니다. 원래 있던 명궁이라는 말은, 말만 있었지 실제로는 있지 않았던 말입니다. 더더구나 자기 입으로 할 말은 아닙니다. '아, 그 사람 참 명궁이지.'라는 말은 실제로 그 사람이 명궁이라는 말이 아니라 명궁처럼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한 경지를 이루어서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인정한 한량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부끄러워서 그런 말을 못 붙이는 말이죠. 누가 나를 명궁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정말 철면피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 명궁이란 주몽이나 이성계처럼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여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극존칭이었습니다. 이 극존칭을 일반존칭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 바로 대한궁○협회의 명궁 제도입니다. 그래서 누가 명궁이라고 하면 활을 쏘지 않는 일반인들은 이렇게 반응하죠.
"그럼 멧돼지도 잡고, 꿩도 잡을 수 있어?"
이건 사람들이 무식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명궁이란 게 원래 그랬던 겁니다. 그러니 대한궁○협회에서 명궁이라는 말의 수준을 얼마나 한심한 수준으로 끌어내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단 제도가 있는 일본에서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단 별로 범사 연사 총사라는 이름을 두어서 수준을 달리 나타내는 말을 썼습니다. 그들에게 명궁이란 우리의 옛 풍속과 같아서 활을 완성한 사람에게만 붙일 수 있는 극존칭이었습니다. 죽어서 신이 된 사람에게나 붙일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리 제도가 멋대로 만드는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고민을 좀 하면서 만들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놓으면 그 뒤로 긴 세월을 두고 왜곡이 일어납니다. 고생하는 것은, 그런 말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신궁이라는 말을 쓰기까지 한다네요. 저는 아직 그런 미친놈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디 갔더니 그런 말을 쓰더라면서 풍문처럼 날아드는 소문을 가끔 듣습니다. 신궁이 하향 평준화되면 이제는 무슨 말을 써야 할까요? 그때는 무슨 말을 또 만들어낼지 한 번 지켜볼 일입니다.
말은, 생기고 쓰이고 죽는 생명체지만, 많은 사람들의 고민과 합의가 거기에는 있습니다. 활터는 그렇게 만들어진 말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말들이 지금까지 있던 자리에서 영롱히 빛나게 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할 일입니다.
2.말들의 물구나무
1991년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고르바초프가 추진하던 페레스트로이카(개방정책)에 불만을 품은 공산당 일부 세력과 군부가 일으킨 쿠데타였습니다. 그때 러시아 연방 대통령이었던 옐친이 이를 진압하였고, 고르바초프는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이 붕괴하면서 보리스 옐친이 대통령이 됨으로써 소련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연방들은 각자 독립국가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지도가 형성되었죠.
이 당시 공산당 세력의 쿠데타는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남의 나라 얘기여서 저도 무슨 영화나 되나 싶은 마음으로 구경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시 그것을 보도하는 기자들의 언어가 좀 이상했습니다. 원래 진보와 보수라는 말은 프랑스 양당체제에서 온 말이고 진보파가 왼쪽에 앉아서 좌익, 보수파가 오른쪽에 앉아서 우익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근대사를 보면 공산주의는 그 전의 역사에서 볼 수 없는 엄청난 진보이론이고 사회변혁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장이어서 그 발생 때부터 좌익사상으로 간주된 것이었습니다. 즉 공산주의는 진보사상이고 공산당은 좌익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의 쿠데타에 대해 보도하는 서방의 언론들은 이 개념을 완전히 거꾸로 썼습니다. 옐친은 공산당을 부인하고 서방의 민주주의를 자신의 정당 이념으로 내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진보가 되고 쿠데타를 일으킨 공산당이 보수가 되었습니다. 기자들은 진보와 보수를 완전히 거꾸로 쓴 것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쓰다 보니 이제는 진보와 보수의 의미가 완전히 뒤섞여버린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언어를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때 벌어진 말들의 물구나무 현상에 대해서 또렷이 기억합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가, 했더니 몇 년 뒤에 어떤 사회학자가 이 상황을 정확히 짚어서 저도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앞서 정리한 개념을 정확히 지적하며 신문에 칼럼을 쓴 학자의 글을 읽으며 세상 사람들이 정말 자기 편한 대로 말을 사용하는구나 하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탄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앞뒤가 뒤집힌 말을 쓰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더 신기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라는 말을 완전히 거꾸로 쓰고 있었습니다. 언어학의 전문 용어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프랑스어에서 온 말)라고 하는데 겉말과 속뜻이 완전히 뒤집힌 상태로 사람들은 기사를 쓰고 말을 했습니다.
몇 년 뒤 저는 활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또 몇 년 뒤 저는 앞서 말한 말들의 물구나무를 또 한 번 겪어야 했습니다. 바로 전통의 문제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제가 집궁하던 1994년 무렵에는 온 세상이 반깍지였습니다. 그렇지만 반깍지로 쏘는 그들은 모두 전통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의 행동이나 말, 활터에서 벌어지는 사풍이 2018년을 맞이한 지금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연궁중시라는 말을 모두 존중했습니다. 센 활을 쓰는 사람이 50호 정도였고, 활을 배울 때는 누구나 43호 정도로 배웠습니다. 저는 집궁 때부터 대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제가 속한 활터에 사원이 적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도내 대회는 거의 매번 나갔습니다. 거기서 만나는 150여명의 궁사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처럼 강궁바람이 불기 전이었고, 전통에 대한 존중감이 있었으며, 모두 배우려는 태도로 마치 한 가족처럼 어울렸습니다.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겸손했습니다. 특히 구사들을 존경하는 태도가 뚜렷했고, 구사들은 배우려는 마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 말까지 저는 행복한 활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상황은 반깍지 사법으로 쏘는 상태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전통으로 알고 있던 것인데, 실제는 전통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법이 전통에서 벗어난 것임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사풍은 대체로 전통의 범주에 머물렀지만, 사법은 벌써 전통에서 많이 벗어난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활에 대해 어떤 말을 하고 기록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대로 전통을 말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1996년 <우리 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전통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999년에 <한국의 활쏘기>를 냈습니다. 그 사이에 찾아낸 전통을 글로 엮은 것입니다. 비록 3년 밖에 안 된 기간이지만, 전통을 찾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사법이 약간 전통에서 벗어났을 뿐 다른 모든 부문은 그대로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찾아서 그것을 정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해방 전후에 집궁한 구사들이 전국에 많이 살아 계셨고, 그들이 반깍지로 개종은 했을지언정 그들의 반깍지 궁체 속에 온깍지 궁체의 대부분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깍지로 개종한 구사들에게 그전의 온깍지 궁체를 물으면 다 답이 나왔습니다. <한국의 활쏘기>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책입니다. 그 책 속에는 저의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구사들에게서 들은 것을 제 생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 재구성 과정에서 제가 소화는 했을지언정 될수록 제 개인 생각은 넣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1998년에 이건호 접장이 처음 개인 국궁 사이트를 만들기 시작해서 우후죽순으로 많은 사이트가 생겼습니다. 그러자 전국의 활터상황이 실시간에 가깝게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현상을 아주 좋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초기 몇 년 간은 실제로 그렇게 운영되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실전 활쏘기를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활들이 소개되고 그것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게다가 생활체육에서 세계 민족궁 대회가 실시되면서 전 세계의 궁사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자국의 민속궁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곧 우리 사회에도 밀려들었습니다. 활터와 상관없이 들판에서 자유롭게 활을 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나아가 말 타고 활 쏘는 사람들도 생기고 활로 사냥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지나자 뜻밖의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을 표방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당시까지 저는 '전통'이라는 말이 『조선의 궁술』을 뜻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집궁한 1990년대 초반까지 활터에 내려온 상황을 보면 사법만 반깍지로 바뀌었지 전통이라고 해도 크게 문제될 만한 것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의 궁술』에 묘사된 사풍이 거의 그대로 간직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궁술』을 모르는 사람도 활터에 전해오는 분위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조선의 궁술』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 일치하는 공통성을 간직한 채 그것을 존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사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반깍지로 바뀐 사법이긴 하지만 온깍지와 상당히 닮은 형태를 많이 간직한 편이었습니다. 요즘의 일그러진 반깍지 사법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음을 저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민족궁 대회가 몇 차례 치러지고, 2010년을 지나면서 상황은 정말 뜻밖의 곳으로 펼쳐졌습니다. 각종 문헌이 공개되고 세계의 모든 활쏘기가 인터넷을 통해 소개되면서, 이것들이 뒤섞인 상태의 어떤 활쏘기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뭐, 이런 현상을 굳이 나쁘게 볼 것도 아닙니다. 동호인들이 모여서 비슷한 생각으로 활쏘기를 즐기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 정말 경계해야 할 줄기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즉 그것은 1990년대까지 이어져온 활쏘기를 넘어서 조선시대의 활쏘기를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1990년대까지 이어져온 활쏘기는 『조선의 궁술』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부분에서 원판과는 조금 달라졌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 원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정도의 변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만 수정을 가하면 원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온깍지궁사회 활동을 통해서 그 원판 회복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었습니다. 세상 활터는 1990년대 이후 딴 세상으로 갔지만, 온깍지궁사회는 시계 바늘을 1940년대로 돌려 지금도 그때처럼 활쏘기를 합니다. 1990년대 말까지 벌어진 활터의 활쏘기가 1940년대의 연장이었음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10년 무렵의 '전통' 담론은 다릅니다. 예컨대 조선시대에는 활쏘기가 전쟁에 사용되었고, 말 타고 쏘았으며, 사냥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흔적들이 많습니다. 책으로도 정리되었고, 그림으로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1940년대의 전통을 지닌 우리 활쏘기에서 만들어진 사법으로 조선시대의 그러한 활쏘기를 해볼 수도 있겠지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한 것을 두고 과연 '전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전통은 1940년대 무렵(1990년대 집궁회갑을 맞은 구사들의 활동시대)에서 흘러온 활쏘기인데, 그 활쏘기로 그 이전의 조선시대 모습을 흉내내본 것에 대해 과연 전통 활쏘기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말들의 물구나무가 발생합니다.
핵심은 그것입니다. 『조선의 궁술』은 조선시대의 많은 활쏘기 중에서 유엽전 활쏘기라는 것이고, 그러니 그 전의 자료를 통해서 보면 유엽전 활쏘기만이 아닌 다른 활쏘기도 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 조상들이 했던 활쏘기를 하겠다는데, 그게 전통이 아니라면 무엇이 전통이냐는 논리입니다. 말 타고 활쏘기도 전통 활쏘기이고, 육량전 쏘기도 전통 활쏘기이고, 편전도 전통 활쏘기이고, 실전 활쏘기도 전통 활쏘기이고, 나무 활로 쏘는 것도 전통 활쏘기이고, 사냥하는 것도 전통 활쏘기이다!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죠.
과연 이런 주장이 맞을까요? 문제는 조선시대의 무관들이 말 타고 활을 쏠 때 지금 기사법을 하는 사람들과 과연 똑같이 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똑같다고 믿고 싶겠지만, 설령 똑같다고 해도 지금 하는 그 동작이 조선시대의 동작은 아닙니다. 저는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이 노력한 만큼 충분히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조선시대 무관들이 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설사 똑같은 동작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창작에 불과합니다. '전통'은 창작된 것에 붙을 수 없는 말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다릅니다.
그런데도 지금 전통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40년대를 전통 활쏘기의 기준으로 한다고 선언한 온깍지궁사회에 대고, 그것은 온깍지궁사회만의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전통을 우리시대의 연장선이 아니라 조선시대로부터 찾는 것입니다. 1940년대의 원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법으로 조선 시대의 어떤 사법을 재구성하고 거기에 '전통'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 수많은 전통 가운데 온깍지궁사회의 주장도 '한 전통'으로 자리 잡힙니다. 온깍지궁사회를 그렇게 자리 지워 놓아야만 자신들도 '전통'의 한 귀퉁이에 비집고 들어와 낑겨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불안한 상태를 위안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그런 일그러진 욕심 때문에 정작 망가지는 것은 전통이라는 사실을 애써 눈감죠. 이것이 2018년에 맞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면 과연 여기서 말하는 '전통'이 전통일까요? 전통이 아니란다고 해서 전통이 아니 되고, 전통이란다고 해서 그게 전통이 될까요?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이제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1991년 소련의 쿠데타를 두고 서방 언론들이 벌인 말글의 물구나무 세우기가 2010년 대한민국의 국궁계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이 저는 믿기지 않습니다. 이 말장난을 그치지 않으면 우리는 아예 전통이라는 말을 잃게 됩니다. 전통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사이비 전통입니다. 우리 활에서 전통은 딱 1개뿐입니다. 하나가 전통이라면 나머지는 사이비입니다. 사이비를 진짜라고 우기면 세상이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러니 전통이 아니거들랑 전통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나의 활쏘기라고 하십시오. 그것이 전통을 일그러뜨리지 않는 유일한 처신입니다. 전통 흉내 함부로 내면 전통이 망가집니다.
3.거울
2000년은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예수가 태어난 지 20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환경이 그 전의 세기와 달라진다는 의미가 첨가되면서 인터넷이 가져온 변화가 전 세계의 틀을 바꾸는 세기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말하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기술혁신이 가져온 변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서 그 변화의 봉우리에 선 한국에서는 10년만 흘러도 세대 간 소통이 잘 안 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2000년은 국궁계에도 큰 소용돌이가 일어 18년이 지난 지금에 돌이켜보면 그 여파가 이렇게 커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소용돌이란 다름이 아니라 온깍지궁사회입니다. 출범 당시 온깍지궁사회의 고민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가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중이고, 그 영향이 활터에도 밀려들어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무엇이 정답인지를 알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소박한 질문을 하는 모임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통의 정체성으로 삼아야 할 기준으로 우리는 깍짓손 동작을 중요시 했고, 그것을 가리킬 말로 '온깍지'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그래서 모임 이름도 온깍지궁사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등장하자마자 눈 깜짝 할 사이에 국궁계는 판이 갈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사법이 온깍지냐 아니냐가 최대 관심거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극소수가 된 온깍지 궁사들 빼고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활터에서 선배들이 가르쳐줘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어느 날 갑자기 반깍지 궁사가 된 것입니다. 온깍지라는 말 때문에 졸지에 반깍지가 된 이 황당한 상황은, 그렇지만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 가지 독특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온깍지 이론을 뚜렷이 비판하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온깍지궁사회의 출현으로 인해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 표현을 하든 안 하든, 우리 활의 전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일이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반깍지 궁사들은 현실의 목적이 분명한 까닭에 전통에 대한 '실험'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른바 대회나 승단이라는 눈앞의 목표 때문에 무엇이 전통인가를 몸으로 겪어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깍짓손을 크게 뻗는 순간 시수가 뚝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깍지 사법은 시수가 나지 않는 옛날 사법'이라는 근거 없는 막연한 추정으로 자신의 전통 콤플렉스를 덮었습니다.
온깍지궁사회는 2001년부터 딱 7년 공개 활동을 했습니다. 온깍지궁사회는 지금까지 전통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을 실시간에 가깝게 공개했고, 굳이 어떤 답을 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7년 활동을 접고 사계로 전환할 무렵에 『조선의 궁술』이 우리 전통 활의 답이다, 라는 사계원간의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각자 그렇게 알고 수련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 모여서 만남을 갖는 정도입니다. 그렇게 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온깍지궁사회는 잔잔한 호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기 와서 들여다봅니다. 거기 얼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그것을 온깍지궁사회의 얼굴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얼비친 대상을 향해 무어라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온깍지궁사회를 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드는 것입니다. 어느덧 온깍지궁사회가 거울이 된 것입니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 같지만, 사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여줍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아가씨에게 거울은 무슨 말을 해줍니다. 턱이 너무 각졌네, 깎아야겠어! 저런, 눈이 무꺼풀이네, 쌍커풀 수술을 해야겠어!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속삭이죠. 아니라고 부인을 하다가 결국은 수많은 아가씨들이 정형외과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비슷비슷한 얼굴이 되어 거리를 활보하죠. 이와 똑같은 일들이 온깍지궁사회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2007년 공개활동을 접은 온깍지궁사회가 하는 일이란, 비공개 친목 모임을 하는 것이고, 그런 얘기 중에 무언가 정리할 게 있으면 국궁논문집을 내는 일 정도입니다. 그것도 비공개로 합니다. 결과는 공개되지만 과정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공개할 필요가 없는 사사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온깍지궁사회를 들여다보면서 사람들은 수많은 말들을 합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 우리에게 들리는 말은, 가만히 들어보면, 거울이 하는 말들입니다. 우리에게 전통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조선의 궁술』이라고 분명히 답을 했는데도 『조선의 궁술』에 대해 묻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귓속으로 들려오는 말을 우리가 한 대답이라고 믿습니다.
인터넷을 보면 온깍지 얘기가 꽤 많습니다. 소란을 일으켜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들일수록 온깍지 어쩌고 많이 떠듭니다. 정작 당사자인 온깍지궁사회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고, 그렇다더라는 논조로 자신들의 주장을 떠벌입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모두 거울과 대화한 것들입니다. 우리 온깍지궁사회의 얘기가 아니라, 자신들이 우리에게서 들었으면 하는 그런 이야기죠. 자신들의 얘기를, 온깍지궁사회와 대화한 양 말하는 것인데, 가만히 들어보면, 거의 독백 수준입니다. 말이 좋아서 독백수준이지, 어찌 들으면 미친 놈 잠꼬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절박하게 만든 것일까요? 그들은 무엇에 그토록 쫓기는 것일까요?
거울은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는 거울 속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일은, 거울 탓이기보다는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탓이 큽니다. 온깍지궁사회는 어떤 결론을 내린 적도 없습니다. 다만 질문 한 가지를 하였을 뿐입니다. 우리 활쏘기에서 전통이란 무엇인가?
4. 말귀
'말귀'란 말은 참 희한합니다. 말이란 귀로 듣는 것인데, 말귀라니요? 말에 귀가 달렸다는 뜻인가요? 말에 귀가 달리면 어떻게 될까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귓구멍은 있는데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말에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못 알아듣는 말이 있음을 구별하려고 만든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릴까요?
귀는 사람의 말만을 듣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말 이외에도 수많은 소리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소리 중에는 뜻이 있는 것이 없고 뜻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람소리나 새소리는 뜻이 없지만 귀로 들어와서 사람이 그 소리를 인식합니다. 그렇지만 귓구멍으로 들어오는 모든 소리를 사람이 듣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들을 생각이 있을 때만 듣습니다. 선생님의 강의 소리는 자장가 같습니다. 점심 먹은 뒤의 5교시 수업은 자장가와 같아서 선생님은 분명히 뜻있는 소리를 보내지만, 듣는 사람은 자장가 소리로 듣습니다. 듣는 사람에게 그 뜻 있는 소리를 구별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웅웅거리며 자장가 흉내를 냅니다.
이와 같이 듣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해석하려는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나아가 그럴 의지가 있다고 해도 이해력이 떨어지면 또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철학책을 읽다보면 눈으로는 읽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듣기는 하는 데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은 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들을 귀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을 귀가 있고 없는 것을 나타내려고 말귀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답답한 것은, 빤히 알 수 있는 내용도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을 떠나서 알아들을 마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분명히 앞사람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놈들 때문에 마침내 화가 벌컥 난 예수는 한 마디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인 사람들이 고호처럼 제 귀를 잘라낸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들 귀가 있습니다. 귀 없는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한 것은, 실제의 귀가 아니라 말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번역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있으나마나 한 귀를 달고 사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마음이 떠난 귀에는 말귀가 없습니다. 그냥 멋으로 뚫린 구멍일 뿐입니다. 귀청이 찢어진 상태의 귀와 다를 것이 없어서 안경다리를 걸치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 활에서 전통을 얘기하다 보면 꼭 이런 상황을 맞닥뜨립니다. 그래서 예수처럼 저도 한 마디 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뭐, 그렇다고 제가 예수 같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냥 말이 그러다는 거죠. 흑!
그렇지만 '말귀'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굳이 예수가 아니라도 우리 조상님들은 모두 이런 고민을 했던 모양입니다. 어리석은 중생 하나가 활을 쏘다가 말귀에 막혀 답답해 할 것을 알고 오래 전에 누군가 '말귀'라는 말을 만들어 한글사전에 등록을 한 것 같습니다. '말귀'가 막힌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마다, 그래서 제 '말문'이 턱턱 막힐 때마다, 말귀를 만들어 사전에 등록해주신 그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귀'가 뚫릴 때까지 '문'을 닫아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게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고질병입니다.
저는 그래도 한 세월 활을 쏘다 보니 내가 한 말 중에서 무엇이 실수인지를 가늠할 줄 압니다. 그러나 요즘 신사 중에는,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며 저지를까 말까 한 엄청난 양의 실수를 집궁 몇 달, 또는 몇 년만에 다 저질러놓는 사람도 많습니다. 특히 생각에 뜸 들일 시간을 주지 않는 인터넷의 즉시성은 겉똑똑이 신사들에게 평생 지고 갈 마음의 짐을 실컷 저질러놓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게 해줍니다. 퍼 담을 길 없는 그런 말들이 인터넷을 도배합니다. 돌에 새긴 습사무언이 무색합니다. 생각하면 돌에 새긴 문구들은,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이 그렇게 하라고 알려주는 표지석처럼 느껴집니다. 습사무언의 뜻은, 떠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너희는 실컷 떠들어도 된다는 뜻으로 변했습니다. 정심정기는 원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라는 뜻이지만, 너희들은 몸과 마음을 꽈배기처럼 비비 틀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흑흑!
5.활터의 말
말 얘기가 나온 김에 말 얘기를 조금 더 하겠습니다. 말은 원래 수렵 채집 시대에 생긴 정보전달 수단입니다. 인류가 200만년 동안 진화해온 동물이니, 그 과정은 먹이를 찾아 떠돌던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정보를 서로 전달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말이라는 수단입니다. 그래서 말의 원래 기능은 정보와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겨울이 왔다(죽을지도 모른다), 봄이 왔다(이제 살았다)부터 시작해서 어디에 가면 무슨 과일이 있고, 어느 골짜기에 무슨 동물이 살고 있으며, 어디에 가면 물이 있고, 동굴이 있다. 이런 식입니다.
따라서 말의 첫 번째 기능은 사실과 정보를 남에게 전달하는 기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인구가 늘어나고 생활환경이 조금씩 바뀌면서 말도 여러 가지 기능을 나타내도록 분화됩니다. 예컨대 갑골문에 나타난 문자는 사실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신의 뜻을 물으면서 그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기대하던 신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신이 없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갑골에 나타나는 지표를 보고 사실이라고 생각을 했겠지요. 그렇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발달과정에서 보면 그것은 정보전달의 기능이 아니라 판단과 신성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의 기능은 그것을 쓰는 주체에 따라서도 많이 달라집니다. 주체의 성별을 나누면 이런 언어의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나죠. 특히 활터에서 느끼는 점이기도 합니다. 즉, 남자들은 과장의 말을 쓰고, 여자들은 위안의 말을 씁니다. 이래서 여자와 남자는 같은 말을 쓰면서도 전혀 다른 뜻으로 쓰는 것이고,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큰 오해가 일어나고 싸움이 생깁니다.
남자들은 우리 전통 사회에서 익힌 관습에 따라 자기 과시에 능합니다. 허풍을 치고 과장을 하여 자기가 힘이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어쩌면 닭이나 동물들의 경우 겉모양이 암컷보다는 수컷이 더 화려한데, 사람에게는 말에 그 화려한 자취가 남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런 식의 남성 중심 사회가 5천년간 이어져왔고, 그런 사회에서 약자이던 여자들은 결국 위안 받고 싶어하는 상황에 맞닥뜨립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쓰는 말들은 대부분 위안의 말입니다. 그래서 감성에 기대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문학이나 예술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남자들은 자신을 확대하기 위한 방법에 골몰하여 대부분 정치의 언어를 구사합니다. 남을 지배하려 들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합니다. 허영기 가득한 과장을 하죠.
그래서 수렵채집이 끝난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크게 과장의 말과 위안의 말이 공존합니다. 그렇지만 그 말들의 시작은 사실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습니다. 그리고 정보전달의 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쓰면서도 자주 잊고 사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런 말들이 과정의 말과 위안의 말에 파묻혀 정작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오늘 날씨 추워? 라고 묻는 아내의 말은 실제로 춥느냐의 정보를 요구하는 것도 같지만, 옷을 사달라는 위안의 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눈치가 빨라야 사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사실 말로 하는 것보다는 어떤 말이 암시하는 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생존 전략이자 비법이 되었습니다. 말은 정보전달을 위한 도구로부터 멀찌감치 떠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활터에서 쓰이는 말은 어떨까요? 활터에서 쓰이는 말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온깍지, 반깍지, 깍짓손, 흘려쥐기, 반바닥, 하삼지, 보궁, 한오금, 고자, 시위...... 조금만 살펴보아도 감정으로 받아들일 말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화살을 목표물에 맞추어야 하는 기술과 연관된 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의 감정이나 자기 과시를 위해 쓰일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활터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술 관련 부분에서는 거의 다 그렇습니다. 자칫 잘못 받아들였다가는 자신이 망하는 상황에 이르기 때문에 그 말이 전하고자 하는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됩니다. 이것이 활터에서 마주치는 말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전통은 오래도록 잘 지켜져 왔습니다. 조선 시대 내내 활을 잘 쏘면 그가 어떤 지위에 있든 능력을 인정받았고, 그를 토대로 입신양명 했습니다. 이런 것은 최근에 국궁신문에 소개된 조선무관 김수정 장군이 육량전으로 벼슬 생활에서 승승장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근대 스포츠로 체질을 개선한 이후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이런 정보전달의 말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납니다. 즉 정보전달의 말을 자기과시의 말이나 위안의 말로 쓰려는 성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접장에 대한 용어를 시비 삼아서 쓰면 안 된다느니 하는 허황된 주장들이 그렇습니다. 접장이라는 용어가 실제로 활터에서 쓰인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제 수준에 맞추어 보부상들이 쓰는 말이니 활터에서는 쓰면 안 된다는 주장들은 체면치레용 자기과시의 말로 쓰인 경우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또 명궁이라는 말이 갑자기 등장해서 남자들의 자기과시욕을 한껏 부추기는 뜻으로 쓰입니다. 정보전달과 사실의 말에서 '명궁'이란 현실에 존재하기 힘든 것입니다. 따라서 명궁이란 사실의 말이 아니라 과장의 말에 해당합니다.
어느 한 분야가 발전하려면 현실을 직시하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하고, 현실 직시는 허위의식부터 걷어내는 데서 시작합니다. 활터에서는 사실의 말이 가장 중요하고 그것 중심으로 담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될수록 사실의 말을 쓰려고 하고 , 그러다보니 가끔 날선 말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때로 과장의 말도 위안의 말도 필요한 법이지만, 그런 말들로 뒤덮어서는 안 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영역에서 무언가를 말할 때입니다.
활터에서 사실이란 2가지를 말합니다. 활 쏘는 기술과 관련된 부분이 그 하나이고, 전통과 관련된 부분이 그 하나입니다. 이중에서 가장 민감하고 착각하기 쉬운 부분이 전통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활쏘기의 전통은 실체가 있는 부분입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분명한 뼈대가 있는 영역입니다. 이런 사실이 있는 부분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넣어서 위안의 말로 덮는 순간 전통에 대한 왜곡이 이루어집니다. 전통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협의 대상이 아니고 협상의 대상도 아닙니다.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과장'이나 '위안'의 말을 덮여봤자, 혼란만 부추길 따름입니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사실은 100년이 흘러도 그대로 사실입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사실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감정으로 덮어야 아무런 득이 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혼란만 일어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실의 말을 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과장의 말이나 위안의 말은 활터의 전통을 제대로 지키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정치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개량궁의 등장과 더불어 불과 30년 밖에 안 되었는데도 전통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바로 잡는 일은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한국의 활쏘기>와 <이야기 활 풍속사>를 집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더는 활에 관한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뜻과는 상관없이 자꾸 글을 쓰는 일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그 덕에 지금까지도 이 짓을 하는 중입니다. 자괴감이 듭니다.
최근에 온깍지궁사회를 향해서 쏟아진 도발성 글들은 저의 이런 생각을 무색케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한 어떤 결론을 '창작'해놓고는 거기에다가 온깍지궁사회의 주장을 갖다 맞추려고 하고, 맞지 않으면 왜 맞지 않느냐고 따지는 일들을 당하면서 언어의 문제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된 것이고, 그 결과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이렇게 하는 중입니다. 이 끝없는 소모전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그저 대략난감할 뿐입니다.
지금 활터에 필요한 말은, '과장'이나 '위안'의 말이 아니라 '사실'의 말입니다.
-온깍지 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