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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에 떠도는 착각과 무지 6
-활쏘기의 오늘과 내일-
정진명(온깍지궁사회)
1.우리 활의 앞날을 죽이는 가장 좋은 방법
제가 뜻하지 않게 우리 활에 관한 책을 내고 보니, 자꾸 활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게 되고, 우리 활에 관해서 말하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보게 됩니다. 그런 글 중에서 가장 한심한 글이 뭐냐면 현재를 완벽한 것으로 놓고서 설명을 하려든 것들입니다. 과연 활터의 현재 모습이 완벽한 우리 활쏘기일까요? 그게 아니라는 건 한달 배기 신사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활터에 올라가서 활을 쏘면 그게 바로 전통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의 활터에서 행해지는 것을 옳다고 기정사실화 해놓고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면 활터의 과거도 사라지고 미래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풍속이나 전통의 문제라면 그것이 흘러온 과거를 정확히 살펴야 하고, 그런 다음 그것이 앞날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궤변으로 흘러 나중에는 자신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도 잘 모르고 떠들게 됩니다. 뒤따르는 사람들이 혼란만 겪게 만듭니다. 차라리 입을 아니 엶만 못한 일입니다.
오늘날 활터에서 겪는 갖가지 혼란은 이런 기초 사항을 무시한 채 논의를 하고 주장을 펴기 때문에 빚어진 참사입니다. 어떤 논란이 생기면 그 논란의 시발점이 된 사태의 과거는 어떠했는가를 먼저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논란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그러면 저절로 해결책도 나타납니다.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야지, 현재 상태를 정당화해놓고서 논의를 진행하면 현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만 난무합니다.
1929년 <조선의 궁술>이 나온 뒤로 활터는 많은 변화를 겪어서 우리의 전통이 아닌 것들도 상당수 활터에 들어와 있습니다. 오해로 인한 것도 있고, 무지로 인한 것도 있으며, 다른 조건의 변화로 인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문제로 떠오르면 그것이 발생한 환경과 조건을 살피고, 그것이 흘러온 과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현재를 정당화해놓고서 자기주장을 편다면 궤변으로 변하기 마련입니다. 잘못 꿰인 단추는 풀어서 다시 꿰는 방법밖엔 없습니다. 잘못 꿰인 것을 옳다고 주장하면 논의는 제자리에서 맴돌다가 진만 빼고 맙니다.
예컨대, 정간의 경우 전라도 일부 지역의 풍속이 1980년대 들어 전국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는, 그 전에는 없던 풍속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답사하여 밝혀낸 사실인데도 정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람들은 갖은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특히 구사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조작하기까지 하면서 해방 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해방 전에 활을 쏘던 사람들은 그런 거 없었다고 하는데, 겨우 30~40년 밖에 활을 안 쏜 사람들이 해방 전부터 정간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황당한 일이지요. 더 웃기는 건, 글을 쓰는 사람들조차도 해방 전에 집궁한 분들의 말은 무시하고 해방 후에 집궁한 분들의 말을 들으면서 정간이 해방 전에도 있었다는 주장을 한다는 겁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만 골라 들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내세웁니다. 이런 게 궤변이 아니라면 무엇을 궤변이라고 할까요?
복장의 경우 대한궁○도협회의 공문에 따르면 정구복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옷에 백의민족이라서 흰 옷을 좋아했다느니 하는 황당한 설명을 하면 그게 궤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법의 경우 자신이 전통에서 벗어난 사법을 구사하면서 온깍지 사법을 배우려는 신사들을 뜯어말리다 못해 핀잔을 주는 것이 궤변이 아니면 무엇이 궤변이겠습니까?
오늘날 전통이라고 믿는 활터의 관습 중에서 정확한 고증이나 확인을 거치지 않고 행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있어야 하는데 사라진 것들도 있고, 어디서 온 건지 분명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확인을 하여 전통에 맞는 것은 살려야 하고, 전통과 상관이 없는 것들은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활터의 미래를 밝히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현재를 완전한 것으로 정해놓고 하는 논의는 하나마나한 것입니다. 활터는 현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래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활터의 미래를 밝히는 것이면 가꾸고 다듬어야 하고, 활터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이면 걷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활에 관해 어떤 주장을 하는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2.활쏘기가 다른 스포츠와 다른 까닭
앞서 살펴보았듯이, 활쏘기는 다른 스포츠와 다릅니다. 활터를 단순히 체력단련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럴까요? 활쏘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종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스포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스포츠화 이전의 전통 무예 수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스포츠와 활쏘기는 다른 것이고 활터는 단순히 체력단련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활쏘기는 스포츠화의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국제화해야 할 필요도 있고, 경기방식이나 장비를 국제화 시대에 대비하여 정비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활쏘기의 운명은 현재가 완성형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활터의 현실을 정답으로 놓고 벌이는 논의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된 짓이라는 증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활쏘기의 미래를 위해 준비할 것이 많은데, 검증되지도 않고 확인되지도 않은 사이비 예절이나 관습을 정답으로 정해놓고서 논의하는 주장들은 활쏘기를 이만큼 가꾸어온 조상들에 대한 모독이요 활의 미래를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뜻입니다.
활쏘기는 국제화 시대를 맞이해서 새롭게 스포츠로 거듭날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딴죽 걸 사람은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활쏘기는 그런데, 활터는 어떠해야 할까요? 활쏘기가 국제화 시대를 맞이해서 스포츠로 거듭난다면, 활터도 거기에 맞춰 스포츠 체력 단련장으로 바뀌어야 할까요? 바로 이 부분이 활쏘기의 미래와 활터의 운명을 가를 중요한 핵심 쟁점입니다.
언뜻 보면 활쏘기의 스포츠화에 따라 활터도 그렇게 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활쏘기가 외국의 것이라면 외국에서 이미 만들어진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 활의 경우, 이미 정비된 제도가 있어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제도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종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활쏘기 자체의 제도화와 활터의 성격 규정에 간극이 생기는 것이고, 이 간극을 어떻게 메워서 슬기롭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을 얼렁뚱땅 넘어가면 활쏘기는 ‘전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이런 현상을 여러 분야에서 경험했습니다. 예컨대 씨름의 경우 스모와 비교하면 이런 현상을 또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씨름은 경기 중심으로 나가면서 1980년대의 전성기를 거쳐 2010년대에 접어든 지금은 추석과 설날에나 잠시 보는 운동이 돼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의 경우 스모는 한국의 씨름이 간 운명과 너무나 다릅니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이저 스포츠가 되었습니다. 씨름을 할 때 샅바만 매고 나와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스모는 일본의 축제행위를 압축한 것처럼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여 저것이 일본 문화이구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실제 스모 동작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우리 씨름의 화려한 기술에 비하면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스모에 열광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스모를 거론할 것도 없습니다. 궁도를 보십시오. 일본인들이 자신의 문화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자부심을 갖는지! 타산지석이 아니라 벤치마킹을 해야 할 판입니다.
씨름이 스포츠화에만 집중하여 동력을 스스로 상실해간 것과는 다르게 우리와 같은 전통 무예인 태껸에서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태껸도 3가지 문파로 갈라져 서로 으르렁거리기는 합니다만, 스포츠화 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전통의 의미를 살리려고 애씁니다. 복장부터 무사의 복장인 철릭을 원용하여 디자인한다든가, 아니면 결련태껸의 경우 아예 전통 한복을 입는 것으로 원칙을 정했습니다.
반면에 우리 전통 활의 몰골을 보십시오. 대회장에 가면 이게 양궁인지 국궁인지 구별도 안 가고 복장도 우리 전통과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활쏘기에는 ‘전통’의 요인이 거의 없습니다. 이대로 세계화할 경우 국적 없는 활쏘기로 전락할 것입니다.
우리 활이 국제화할 때 가장 강하게 내세울 것은, 양궁에는 없는 그 어떤 것들일 것입니다. 예컨대 양궁이 현대식 화공 재질로 만든 장비를 쓴다면, 우리는 그와 달리 옛 방식의 재질을 고수한다든지 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 활도 개량궁과 카본살의 등장으로 어려운 조건에 놓였음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꺼내어 논의하고 우리 활의 미래를 밝게 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내야 합니다.
3.활쏘기의 세계화와 활터의 의미
활쏘기의 미래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활쏘기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결국 활터로부터 국제화의 기준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활터는 체력단련장이 아니기 때문에 전통 문화가 살아 숨 쉽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전통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제도화를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기준에 맞추어 세계인들이 우리 활을 배워야지, 세계인들의 입맛에 맞춰 우리의 것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된장은 된장다워야지 거기에다가 MSG를 넣는 친절을 굳이 베풀 필요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세계인들이 자기네 집에서도 맛볼 수 있는 MSG를 체험하려고 된장국을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된장 본연의 맛을 보려고 찾아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활쏘기도 또한 같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오늘날 한 협회의 입김으로 시행되는 활쏘기의 모습은 지켜야 할 것보다는 고치고 걷어내야 할 것이 더 많습니다. 어느 하나 우리의 전통을 제대로 담아낸 것이 없다고 할 만큼 참담한 모습입니다.(되풀이해서 말씀드리지만, 이런 과격한 언사는 활쏘기의 오늘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임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오늘날의 모습으로 세계화가 진행된다면 우리 활을 위해서도, 우리 활의 진수를 맛보기 위해서 우리의 활터를 찾아올 외국인을 위해서도 큰 불행입니다. 거기에는 외국인들이 궁금해 할 ‘한국 전통’의 맛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량궁에 무슨 한국의 전통이 있으며, 배가지활로 변한 각궁에 무슨 전통이 있고, 반깍지로 변한 사법에 무슨 전통이 있으며, 흰 러닝셔츠 바지에 무슨 복장의 전통이 있다는 말입니까? 심하게 말하면 우리 활은 가서는 안 될 길만 골라서 지난 30여 년간 달려온 셈입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진행된다면 별 다른 처방이 없는 한 지금의 모습으로 국제화가 진행될 것은 분명합니다. 아직 우리 활을 배우는 외국인들이 많지 않아서 국제화라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기에 일단은 기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머지않아 우리가 맞닥뜨릴 문제입니다. 빤히 보이는 참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얼뜨기 짓입니다. 그런 얼뜨기들이 우리 활의 미래를 결정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 활의 미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4.활터에 남은 시간
많이 왜곡되기는 했지만, 활터에는 아직도 전통의 맥이 면면히 흐릅니다. 문제는 각 활터의 특성을 왜곡하고 죽이는 상위단체의 폭력입니다. 그 폭력은 상위단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상위단체의 지침이나 규정을 해석하는 활터 사람들 자신의 문제입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정 대회에서조차 상위단체의 규정을 들어 비공인 각궁을 썼다고 수상자에서 제외시키는 어리석은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것은, 활터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본분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활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해야 할 활터가 자신을 버리고 상위단체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는 한, 활터의 미래도 없고 우리 활의 미래도 없습니다.
아직 세계화가 진행되지 않았고, 이제 막 세계로 발을 뻗기 시작한 시점이기에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활터에는 과거의 시간이 여전히 흐르고, 활쏘기는 아직 세계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 사이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시간이 남아있습니다. 그 시간은 결코 길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만이 우리에게 남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태로는 그 시간마저 헛되이 보내게 될 것입니다. 활터 사람들 자신이 활터가 어떤 곳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상위단체의 눈치만 살피며 거기서 내려주는 헛된 영예와 욕망을 갈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활터의 현실이 아무리 참담하다 해도 이래야 한다는 얘기는 해야겠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활터의 좋은 전통을 세계화를 위한 모델로 정하여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하면 됩니다. 경기 운영방식, 장비, 복장, 사법, 예절 규칙 정도입니다.
(1)경기운영 방식
경기 운영방식은 지금의 대회 방식을 근간으로 하여 몇 가지를 추가하면 됩니다. 편사의 방식과 단체전 개인전의 방식으로 하면 됩니다. 다만 시수가 높아짐에 따라 과녁거리와 크기를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녁거리 145미터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원래 무과거리는 150미터였는데, 그것을 일본 자인 30,3cm로 산정하는 바람에 145미터로 줄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무식은, 시쳇말로 정말 쪽팔리는 일이고, 이대로 세계화할 경우 영원히 국제망신을 사는 일입니다.
유엽전 일색의 대회에서 벗어나 애기살 대회 같은 것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를 하면 됩니다.
(2) 장비
장비는 당연히 각궁 죽시가 주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를 이루면서 개량궁과 카본살을 허용하는 단계의 대회로 확장하면 됩니다. 각궁 죽시 우선은 당연시 되어야 하고, 15시 15중도 당여히 차별을 두어야 합니다. 각궁과 죽시가 월등하게 대접받는다는 인식이 형성될 정도로 규정을 강화해야 합니다.
또한 바가지활과 전통 각궁도 차별을 두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사법 부분에서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장비 중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죽시입니다. 모든 경기에서 죽시로 쏘게 하면 사법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죽시로 쏘면 개량궁이 불편하고 각궁이 훨씬 더 편합니다. 각궁이 더 편해지면 사법도 결국은 각궁 사법으로 갑니다. 각궁 사법이 우리의 전통 사법입니다. 그리고 개량궁에 걸어서 쏴도 충격이 훨씬 덜합니다. 죽시는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이것만 적용되면 활터의 여러 문제들이 절반은 해결됩니다.
(3)복장
활터의 복장은 제한하면 안 됩니다. 옛날부터 자유복이었고, 자유복을 통제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공개대회에서는 공식 복장을 규정하면 좋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안이 있습니다만 현재의 흰 러닝셔츠와 바지는 금지함이 마땅합니다.
당연히 가장 좋은 복장은 우리의 전통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 중에서 아직 살아있는 복장은 갓난아기들이 돌 때 입는 전복이 있습니다. 물론 전복을 공식복장으로 지정한 뒤에 전통 한복과 두루마기를 허용하는 방식입니다.
전복은 1960년대 처음 복장 통일 얘기가 나왔을 때 대한궁도협회에서도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수원에서 벌어진 1962년 '제5회 전국남녀 활쏘기 대회'에서 여무사들에게 전복을 입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978년에 문교부에서 간행한 <궁도 양궁>이라는 책에는 전복은 물론이고 전립까지 갖추어서 쓰고 궁체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런 좋은 전통을 두고서 흰 러닝셔츠에 흰 양복바지를 입은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한 번 이런 규정이 고착화되면 다른 창의력을 말려죽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람들의 창의력은 끝이 없고, 그것은 새로운 문화 창달의 원동력이 됩니다. 딱딱한 규정은 그러한 창의력을 죽여 활터를 참담한 획일화의 현장으로 만들고 맙니다. 예컨대, 제가 본 복장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한 10여년 전에 서울 황학정 분들이 입었던 옷입니다. 위아래 흰 옷을 입고 조끼까지 입었는데, 그것이 한복의 형태를 원용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참 신선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듬해 보니 황학정분들이 대회 때 입은 옷은 획일화된 정구복 디자인 그 옷이었습니다. 제 눈에 신선하게 비쳤던 그 옷은 불과 1년을 견디지 못하고 쫏겨났습니다.
이런 결과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2016년)에도 청주의 한 활터에서 입승단대회가 열렸는데, 승단대회에 관심이 없던 젊은 신사가 자정에서 하니 참가했는데, 거기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협회의 그 흰 옷을 입은 게 아니라 한복을 위아래 흰옷으로 맞춰입고 다리에 각반까지 차고 나선 것입니다. 결국 심판들의 회의 결과 그 옷을 벗기고 요즘의 그 대회복을 입게 했습니다.
신선한 창의력이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이미 있는 그릇된 모습이 새로운 발전을 막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우리는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그런 힘으로 넘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활터로 입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릇된 제도는 그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전락합니다.
(4) 사법
사법은 당연히 온깍지 사법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반깍지 사법은 우리의 전통사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괴상한 사법입니다. 양궁에서 건너온 사법이고, 양궁을 본뜬 사법입니다. 겉 모양을 그렇게 본뜨다 보니 나중에는 내면의 원리까지도 따라가서, 온깍지 사법 속에 서린 전통의 비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전통 사법의 비결을 잃어버린 결과는 참담합니다. 몸이 아프고 폐궁에 이릅니다. 반깍지로 명궁을 딴 분들께서는 솔직히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폐궁의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은, 그나마 각궁 죽시 때문입니다. 그 덕이 아니었다면 벌써 몸은 반병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사들은 자신들의 몸이 아픈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명궁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 길 끝이 어디인지 그들은 모르죠. 한때 전국대회를 휩쓸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면 몸이 망가져서 활을 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 참 많습니다.
(5)예절 및 규칙
예절이나 규칙은 대회 운영 방식에 따라서 저절로 추려집니다. 그러니 편법으로 운영하는 대회를 할 것이 아니라 옛날 방식으로 하는 대회와 그것을 변형한 방식으로 운영하는 대회를 동시에 추진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에 따라 국제경기에 적용되는 예절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전에 해야 할 것은, 활터에서 습사할 때 꼭 해야 하는 예절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5. 대한민국은 활의 종주국이다.
반깍지 사법이 활터를 점령한 지 벌써 3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 30년은 우리가 우리 활의 종주국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리는 시간에 불과했습니다. 우리의 전통인 온깍지 사법은 사라졌고, 명궁들은 사법의 어떤 부분이 전통인지 전통이 아닌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결국 맞추기 중심으로 가면서 양궁의 사법을 곁눈질하고 양궁의 이론으로 자신의 사법을 도배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전통 사법이라는 말입니까?
종주국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기준을 제시하는 나라입니다. 세계의 활 중에서 우리 활이 가장 짧고 가장 멀리 나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활의 종주국이라는 증거입니다. 일본활이 세계 활의 종주국이 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의 활이 우리의 활에 비해 불필요하게 길고 과녁거리도 짧기 때문에 활이라는 도구 자체가 갖는 경쟁력이 우리에게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뒤집으면 세계의 어느 민족이 쓰던 활도 우리 활을 능가할 활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활의 종주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활터에 무엇이 남아서 종주국의 증표가 될까요? 제가 보기엔 거의 없습니다. 활의 본질인 사법도 다 반깍지로 개종하여 전통을 잃은 지 오래고, 복장도 러닝서츠 바람에 양복 바지이니 국적불명이고, 활터에서는 기본예절도 지킬 줄 모르고, 출처도 알 수 없는 판자때기에 절이나 하고, 이런데 도대체 무엇으로 우리가 활의 종주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회복할 것은 종주국이라는 자부심과 그 실체를 찾는 일입니다.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우리 활의 미래는 없습니다. 우리 활의 미래를 되찾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간단한 것이 안 되는 데는 현실에 안주하는 활터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현실이 정답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그것을 이론화하는 온갖 궤변은 활터의 앞날에 먹장구름일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활의 종주국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첫댓글 글을 읽을때마다 복장이 터지려 합이다
(4)사법에서.
지금현재 활터 주류가 된 궁체를 반깍지로 이름하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입니다.
조선의 궁술에서 깍지손을 제자리 떼는 것을 봉뒤라 하고, 온깍지 궁사회에서 깍지손을 180도 떼는 것을 온깍지라 이름하므로 깍지손을 90도 절반만 떼는 것을 반깍지라고 이름해야 합당합니다.
지금 활터에서 쏘는 궁체는 양궁 리커브에서 차용한 것으로 조선의 궁술과 전혀 다른 사법체계이고, 조선의 궁술 같이 쏘면서 깍지손을 절반만 떼는 반깍지와 다르므로 “게발깍지”로 이름하는게 합당한 것입니다.
과녁을 신체정면에 두고 만작하는 조선의 궁술과, 과녁을 신체 옆면으로 두고 만작하는 리커브 사법은 족보가 엄연히 다른 사법체계입니다.
따라서 양궁사법을 차용하여 과녁 옆으로 서기로 만작하는 활터 주류 궁체인 “게발깍지”는 조선의 궁술과 아무 상관이 없는 활쏘기이고, 이것을 반깍지라 이름하는 것은 조선의 궁술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분류한 것이거나 아니면 게발깍지를 조선의 궁술 범주에 포함하는 오류에 해당합니다.
과녁을 신체정면으로 두고 만작을 하느냐, 아니면 신체 옆면에 두고 만작을 하느냐 두 길에서 조선의 궁술이 갈립니다.
그러므로 사법팔절등의 분류에서 제일처음 발디딤이 나올게 아니라
몸을 과녁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부분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 발디딤이 몸을 과녁과 마주하는 범주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정비팔을 논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기존의 사법논쟁에서 빠져있고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을 과녁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작하는 궁체가 조선의 궁술이 이야기 하는 핵심이고 몸이 과녁과 틀어지면 틀어질수록 조선의 궁술을 벗어나니, 과녁과 비스듬히 서고 만작하면서 몸이 휘휘 돌아가는 현재 활터 주류 궁체 게발깍지는 조선의 궁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쏘임인 것입니다.
@이정우 고견 감사합니다. 제가 보기엔 주관이 강한 견해로 보이는데, 이렇게 짤막하게 언급할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고견이 있으시면 논문 형태로 정리해서 발표해보시죠. 그래야 건전한 논의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 내용을 이렇게 도막글로 드러내면 자칫 구절에 얽매어 시비만 일어나는 수가 있습니다. 보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괴로운 일입니다. 고견 부탁드립니다.
진리는 말해지기 이전부터 진리인데 구지 논문형태로 발표 까지나요?
알아도 말로 글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고, 자기가 아는 것을 말로 글로 명쾌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설명을 하고 의문점을 즉시 해소하는 것이 합당한 방법입니다.
글은 뜻은 전달할 수 있겠지만 내밀한 느낌까지 전달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어떻하면 효율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정우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구절구절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