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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전통, 애기살[片箭]
정진명(온깍지궁사회)
1) 머리말
2000년대 들어 한국을 대표하는 한 가지 문화현상이 활터에서 떠올랐다. ‘애기살’이라고 불리던 조선의 비밀병기 편전이 그것이다. 그 첫걸음은 활터에서 시작되었지만, 민간으로 퍼지면서 방송을 몇 차례 타더니, 바야흐로 한국 전통 문화의 간판스타로 자리 잡았다. 1999년『한국의 활쏘기』에 처음 기록 정리된 이후, 2002년 공중파에서는 처음으로 KBS ‘역사스페셜’(제169회) 「최후의 만주수복전쟁, 공민왕의 북벌」, 역사스페셜 제169회[2002.10.05]에 나온 것을 시작으로, 교양 오락프로그램인 ‘스펀지’에서 조선의 비밀병기로 소개되어 별 다섯 개를 받으며 큰 관심을 모으더니,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가장 무섭고 비밀스런 무기로 등장하였다. 뒤이어 역사 드라마에서는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추노”, “기황후”) 방송 매체와 인터넷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 어린 아이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한국의 전통 유산으로 떠올랐다. 한 번 끊어진 전통은 되살리기 어렵고, 되살려도 생명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일인데 이 애기살만큼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큰 관심꺼리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애기살이 한국 사회에 등장한 과정과 배경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
2) 애기살 또는 편전
‘애기살’은 조선의 병사들이 부르던 이름이고, 『국조오례의』나 『경국대전』, 『무과총요』, 『융원필비』 같은 공식 기록에는 편전(片箭)으로 나온다. <애기살>은 입말이기 때문에 문자로는 <편전>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심지어 소리를 따서 변전(邊箭)이라고도 적고, 애기살을 의역하여 동전(童箭)이라고도 적었다. 이것은 조선의 중요한 무기였는데도 1894년 갑오경장 때 활쏘기가 무기체계에서 제외되면서 불과 100년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세상에 처음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0년대였다. 육군박물관의 유물 발굴 팀에서 통아인 덧살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였고, 그것을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궁시장인 유영기가 복원했다. 1994년에 집궁하여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던 나는 활 관련 자료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사람 만나는 일이었다. 애기살에 관한 이런 이야기도 1998년 궁시장 이수자인 유세현 접장을 방문했을 때 불광동 자택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유영기와 유세현은 덧살을 받고서 똑같은 모양으로 복원을 하고 관련 문헌을 찾아서 쏘는 법까지 정리하여 파주 인근의 활터에 보급하려고 무상으로 제공하였지만, 애기살을 몇 번 쏘아본 사람들의 반응이 의외로 냉담하여 보급이 무산되었다. 시위가 덧살을 훑고 나가는 소리가 상당히 날카로워서 두려움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과녁 맞추는 당장의 재미 때문에 한량들의 관심이 이런 사라진 전통을 되살리자는 데까지 미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방문한 것이었고, 유세현 접장으로부터 애기살 3발과 덧살을 하나 얻어서 단양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단양 대성정에서 애기살 쏘기 실험에 들어갔다. 덧살만 있으면 애기살은 얼마든지 스스로 만들어 쏠 수 있다. 부러진 죽시에서 살촉을 빼내어 잘라낸 살대에 끼우면 되기 때문이다. 유세현 접장은 활을 쏘는 사람이 아니라 화살을 만드는 시장이기 때문에 활을 쏠 시간이 거의 없다. 게다가 박물관을 직접 운영하는 처지이다 보니 애기살을 쏘아서 사법을 재구성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고충을 듣고 직접 활을 쏘는 나로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같이 연구하는 차원에서 애기살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1년간 연구한 사법을 바탕으로 애기살 사법을 정리하고, 애기살의 제원과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여 1999년 발행한 『한국의 활쏘기』에 실었다. 이것이 애기살에 관하여 정리한 근대 이후 최초의 글이 되었다.
3)애기살 사법
1년 간 사법을 연구해본 결과 예상대로 애기살의 문제는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애기살이 덧살을 벗어나는 순간 자칫하면 줌손을 찍게 된다. 그렇게 되면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활의 속성상 큰 부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애기살이 실수로 덧살을 벗어나서 내 줌손을 찍은 적이 있는데, 엄지와 검지 사이를 찍고 손바닥으로 뚫고 나왔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고 감쪽같이 나았지만, 조금만 방향이 달라지면 손의 뼈들이 산산조각 날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손을 찍지 않는 최소한의 방책을 마련하는 기준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정리된 것이 2002년 『국궁논문집』에 실린 ‘애기살 사법’이다.(「애기살 쏘기 복원방안」, 『국궁논문집』 제3집, 온깍지궁사회, 2003)
뜻밖의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기살의 길이이다. 만작을 했을 때 애기살이 덧살에 잘 안겼는가 아니면 벗어났는가 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짧은 길이가 50cm 정도이다. 이보다 짧아지면 만작하고서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물론 경국대전의 무과 조항에 규정된 포백척 8촌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37.5cm 정도가 된다. 그렇지만 연습용으로 쓸 때는 안전이 우선이므로 굳이 이렇게 짧게 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부산에서 이석희 행수가 발견한 <진주 명 애기살> 살대의 길이는 50cm가량이어서 부산의 궁방에서 애기살 유물이 두 점 발견되었다. 깃간에는 깨알 같은 붓글씨로 진주(晋州)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래서 일단 <진주 명 애기살>이라고 부른다. 옛 사람들도 똑같은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애기살 사법을 연구할 때 길이를 아주 다양하게 쏘아 보았다. 가장 짧은 것은 10cm도 쏘았고, 긴 것은 그냥 보통 유엽전 화살을 그대로 덧살에 넣어서도 쏴보았다. 그렇지만 느낌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긴 화살로 충분히 연습한 다음에 짧은 화살을 쓰면 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따라서 처음 애기살을 쏠 때는 덧살에 애기살을 끼울 것이 아니라 보통 때 쓰는 긴 살을 끼워서 연습하면 안전하다. 이렇게 하여 숙달된 다음에 짧은 애기살을 쓰는 것이 좋다.
조준하는 방법이나 쏘는 방법은 유엽전 사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오늬를 끼우는 높이가 유엽전보다 조금 더 낮아야 시위가 덧살을 훑는 면적이 적어서 소리가 덜 났고, 그런 까닭에 조준점을 더 낮추어야만 하는 것 정도였다. 유엽전과 똑같은 곳을 조준하면 대부분 살이 넘어가므로 과녁 한 폭 정도는 낮추어 조준해야 한다.
4)애기살 보급
2001년에 온깍지궁사회가 출범하고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에 광주 송무정에서 ‘제1회 온깍지 활쏘기 한 마당’이 열렸고, 송화선 접장과 내가 애기살 시범을 보였다. 송 접장은 1999년 겨울에 단양으로 찾아와서 나에게 애기살과 덧살을 받아가서 나름대로 연습한 한량이다. 그날 60여 명이 모였는데, 온깍지궁사회 모임은 전통을 올바르게 계승한다는 기치로 활동한 단체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회원들이 전통에 굉장한 애착을 지닌 분들이어서 그랬는지, 처음 간단히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실시한 이 시범에 대한 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우는살이며 포천 목궁 시범도 함께 보였는데, 애기살은 단연코 사람들의 눈길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사로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시범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설명을 듣고 쏘아 보기까지 했다. 이 굉장한 관심을 도외시할 수가 없어서 나는 청주 집으로 돌아온 직후 시누대를 구하여 덧살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말려 불로 바로잡은 시누대의 한쪽 면을 칼로 따낸 다음 마디를 파내어서 홈을 매끄럽게 만들고 손목에 걸 끈을 매는 방식이다. 40여 개를 만들어서 여름 울진 칠보정에서 열린 ‘제2회 온깍지 복놀이 한 마당’에 가져갔다. 거기서 쏘는 요령을 알려주고 실습을 시킨 다음 사람들에게 덧살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조영석 교장은 그 이듬해까지 전국대회에서 몇 차례 애기살 시범을 보였다. 이런 과정 때문에 애기살은 순식간에 전국의 활터로 퍼졌다.
5)애기살 여파
보수성이 강한 활터에서는 애기살을 불편하게 느끼는 활량이 의외로 많다. 과녁 맞추기 에 골몰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엉뚱한 짓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덧살을 훑는 시위소리가 아주 날카롭기 때문에 보통 시위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선 소리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전국의 활터에서는 온깍지궁사회의 시범으로 관심을 몇 차례 끈 이후에 애기살 쏜다는 얘기가 별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애기살로 인하여 갈등이 생기는 사태도 일어났다. 애기살을 쏘려는 사람들과 딴 데 가서 쏘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생겨 내분으로 비화하기까지 한 것이다. 실제로 성순경 명무는 자신이 속한 활터로부터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시발점이 바로 애기살로 인해 촉발된 사원들 간의 갈등이었다. 성 명무는 입산할 때까지도 이 점에 대해 상당히 유감스러워 했다. 그러다보니 활터에서 애기살 쏘는 일은 영 거북살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렇게 애기살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뜻밖의 곳에서 변수가 생겼다.
디지털 국궁신문은 활 관련 소식을 전하는 곳인데, 일반인들도 많이 드나든다. 국궁신문에는 전통을 살리고 계승하려는 온깍지궁사회의 활동이 소상하게 소개되는 편이었고, 애기살 역시 기사화되어 몇 차례 신문에 올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 조회 수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른 기사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결국 활량이 아닌 일반인들이 애기살에 관심을 보인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곧 다른 곳에서 뜻밖의 결과를 나타냈다. 즉, 합기도를 비롯하여 검도, 태권도, 태껸 같은 무술도장의 사범들이 어린 학생들 교육 차원에서 활쏘기를 가르치거나 시범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애기살이 아이들의 관심을 아주 강렬하게 잡아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활터에서 애기살 열기가 식어갈 무렵에 뜻밖에 일반 도장에서 시범이 이루어지는 일이 잦았고, 결국은 그것이 스펀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락 교양 프로그램인 스펀지에서는 애기살 위력을 실험하고 원리까지 자세하게 정리하여 방송했다. 그 여파는 즉각 나타났고, 순식간에 애기살을 유명한 전통 무기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런 관심을 적극 수용한 것이 영화와 드라마였고, 몇몇 무술을 다루는 영상 작품에서는 예외 없이 애기살이 등장했다.
6) 되살아난 전통문화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끊어진 전통을 되살려서 활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럴 경우 대부분 비판에 직면하기 쉽고, 또 실제로 대중에게 확산되기보다는 현상 유지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그런 상황에서 2000년대 들어 나타난 애기살은 아주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끊어진 것이 되살아난 경우인데, 사람들의 수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꾸준히 사회 각 분야로 퍼져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TV 같은 매체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았고, 활터가 아닌 곳에서 활쏘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해보아야 하는 관심꺼리로 등장했다. 실제로 애기살에 관한 체험기나 글들이 인터넷에서는 엄청나게 많이 발견된다. 이런 것들은 이미 애기살이 단순한 복원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한 문화로 뿌리내렸음을 의미한다.
이런 관심은 저절로 애기살의 성능이나 기능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전문가들의 실험도 잇달아 진행되었다. 파주 영집궁시박물관에서 추진한 일련의 실험이 그런 것들이다. 특히 멀리 쏘기 실험은 그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일이다. 2011년 가을걷이가 끝난 파주 들판에서 유세현 접장의 주관으로 애기살 멀리 쏘기 실험이 추진되었고, 온깍지궁사회에서 참관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조건을 바꿔가며 실험했다. 이밖에도 강판 뚫기 실험도 몇 차례 열렸고, 그 결과가 텔레비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런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사는 온깍지궁사회에서 주관한 ‘제1회 편전 대회’였다. 애기살이 되살아난 이후에 처음으로 2003년 8월 3일 통영의 열무정에서 대회를 치렀다. 물론 온깍지궁사회 복놀이 한 마당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에 참여인원은 소수였지만, 의미는 큰 대회였다. 대회 방식은 모두 3순 경기로 1각 순마다 점수에 차등을 두어 다음 순으로 올라갈수록 점수를 더 부여하는 방식이다. 솔포로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나온 무과 크기로 만들어서 세워놓고 대회를 진행했다. 실로 무과가 사라진지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애기살 과녁이 등장한 것이었다.
그리고 온깍지활쏘기학교에서도 이 분위기를 계승하여 2017년 1월 21일(토)에 제2회 편전대회를 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덧살을 보급하는 일인데, 이를 위하여 증평 도안의 유필무 붓 방에서 덧살 감 시누대를 50여개 구하여, 먼저 청주의 남일면 쌍수리 활터에서 사람들에게 졸잡는 시범을 보였다. 이것저것 장비를 다 갖출 수 없어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켜놓고서 거기에 시누대를 불보여 궁창에서 잡는 방식이다. 간단히 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누구나 충분히 할 수 있고 오히려 간편한 장점도 있다. 이 시범을 바탕으로 평택 들판에서 열린 제2회 편전대회에서도 시범을 보였고, 거기에 참여한 한량들은 스스로 덧살을 만들었다.
‘제1회 들녘 전통 활쏘기 한마당’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제2회 편전대회는 2003년의 제1회 대회에 이어 14년만의 대회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날 대회는 제1회 대회 때의 운영 원칙 그대로 시행되었다. 즉 3순 경기로 순을 거듭할수록 점수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실시한 결과 이연수 접장이 1위를 차지했고, 김대현 접장이 2위를, 이상열 강중원 접장이 각기 3위를 했다.
이날은 한 겨울이어서 눈발까지 날렸는데, 가을걷이 끝난 논에 우뚝 선 애기살 솔포는 허허벌판에 멋진 광경을 펼쳐놓아 참여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놀라움을 나타냈다. 애기살 쏘기 풍속은 단순히 과녁을 맞히는 것이 그치지 않고, 풍속 면에서 새로운 가치를 충분히 낳을 수 있는 영역임을 재확인하였다.
애기살은 100년 전에 끊어졌다가 되살아난 무기이지만, 불과 몇 년 만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상징이 되었다.
7)조금씩 밝혀지는 애기살의 비밀
앞서 살펴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험을 실시한 결과, 애기살만의 특징이 몇 가지 드러났다.
2002년 KBS-TV 역사스페셜 팀과 총기류 탄약을 생산하는 한 군수공장의 탄도 실험장에서 실험한 결과 애기살의 초기 속도가 유엽전의 초기 속도보다 초속 10미터 이상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유엽전의 초기속도는 초속 59.9미터였고, 애기살은 71.8미터였다. 애기살이 초속 11.9미터 더 빠르다. 물론 유엽전 7돈짜리와 그것의 절반을 잘라 만든 애기살을 단순 비교한 것이기 때문에 완벽한 정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현재로서는 이 정도의 결과만으로도 애기살의 성능을 막연히 상상하던 것과 비교하면 충분히 값진 성과 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살에서 초기 속도 문제는 날아가는 거리와 파괴력과 관련 있다. 특히 파괴력은 속도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애기살의 초기속도가 보통 살보다 초속 10미터 이상 빠르다는 것은 그만큼 파괴력에서도 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애기살이 갑옷을 뚫었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닌 것이다. 애기살이 다른 화살보다 더 빠른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화살은 공기 속을 뚫고 날아가기 때문에 마치 잉어가 물살을 헤엄치듯이 날아간다. 이것을 뱀춤현상(아처리파라독스)이라고 하는데(『한국의 활쏘기』(2013) 269쪽), 화살이 날아가면서 살대 옆에 공기 소용돌이를 만들게 되는 것을 말한다. 흐르는 물에 말뚝을 박으면 그 둘레에 소용돌이가 생기듯이 화살 주변에 공기와 마찰이 생겨 화살의 속도를 늦춘다. 그런데 애기살은 짧고 가늘기 때문에 보통 화살보다 이 소용돌이가 작다. 그만큼 공기의 마찰 저항을 덜 받는다는 말이다. 「무와 예를 담은 활 각궁」, YTN사이언스(2013.08.29.)
애기살의 사거리는 2011년 파주 영집궁시박물관에서 주관한 실험에서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다. 애기살을 멀리 쏘려고 할 때 어떤 조건이 중요한가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다. 무게, 살대 길이, 깃의 크기, 무게 중심 같은 것들 중에서 어떤 요인이 멀리 날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세현 접장이 살대 길이는 같게 하고 무게를 각기 다르게 만들어서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서 먼장질을 해보았다. 3차례 실험했는데 날아가는 거리는 거의 비슷했다. 대부분 350미터 내외에 걸쳐서 최고 거리를 나타냈다. 이것은 2002년도 역사스페셜 팀과 청원군의 생명과학단지 벌판에서 해본 것과 비슷한 수치이다. 당시 유엽전은 250미터 정도 나갔고, 애기살은 350미터 정도 나갔다. 그때도 유세현 접장이 만든 애기살과 덧살로 쏘았다.
무게에 따른 차이가 크게 나지 않고, 거리도 매번 일정하게 나타나자, 고민이 깊어졌다. 멀리 쏘기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결과이기 때문에 더욱 아쉬웠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내가 제안을 했다. 즉 깃털을 아주 짧고 낮게 깎아서 바람의 저항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석에서 유세현 접장이 가위로 깃털을 깎았고, 다시 한 번 실험을 진행했다. 결과는 날아가는 거리가 훨씬 멀게 나타났다. 이날의 최고 기록은 429미터였다. 여러 가지 제한 사항 때문에 이렇게 나왔지만, 실험을 조금 더 진행하면 500미터는 충분히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참고로, 세계 민족궁 대회 때 단양에서 멀리쏘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외국인 궁사의 화살이 400미터를 넘었다. 풀숲으로 떨어져서 화살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는데, 그 화살은 깃이 작기도 했지만, 화살의 가운데 부분을 도톰하게 만들었다. 즉 유선형으로 된 화살이었다. 이것은 당시 현장에 참가했던 이처준(청주 구룡정), 권성옥(경산 삼성현정) 두 분한테서 들은 이야기이다.
아마도 이것은 허릿심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바람의 저항을 덜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애기살에도 이런 방식을 응용하여 만들면 날아가는 거리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아쉬운 점은 애기살의 길이와 무게를 다양하게 하지 못한 점이다.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나 살찌는 살의 길이나 무게와 연관이 많다. 활터에서 활을 쏴보면 굵기에 따라 살찌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변화 요인을 실험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애기살 실험은 이와 같이 특별한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좀처럼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더욱이 멀리 쏘기는 화살이 흩어지고, 날아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아주 제한된 상황에서 급조하여 진행한 결과이기 때문에 이런 단순한 결과에 만족할 수는 없다. 좀 더 많은 실험이 진행된 다음에 결론을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개인의 관심을 넘어서 학술 연구 차원으로 실험이 승화되어야 한다.
8)맺음말
『조선의 궁술』에는 지금 활터에 전하는 유엽전 이외에도 다양한 활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불과 100년도 채 안 되어 유엽전 이외의 것은 모두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단절은 문화유산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큰 문제이다. 유물이 발굴된다고 해도 쓰임이나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 연구자들을 위해서도 큰 불행이다.
애기살은 문헌 근거도 분명하고, 실물 자료도 분명하여, 활 쏘는 당사자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어렵지 않게 되살릴 수 있는 것이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애기살은 활터에서 밀려나 활터 밖에서 관심을 끄는 형편이다. 활터가 전통문화의 곳간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과녁 맞추는 기능만 존재하는 곳이 된다면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계속될 것이고, 결국 활터는 자신의 전통을 활터 밖으로 내다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을 애기살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활터는 과녁을 맞히는 장소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천년 우리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공간임을 자각하여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다는 의식이 중요하다. 그런 관심 속에서 수많은 우리의 활 전통이 새로운 숨결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애기살은 그런 가능성을 아주 잘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하여 앞으로 우리의 전통 문화를 활량들이 적극 되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최근에 『정사론』이라는 사법 이론서가 발굴되었는데, (「정사론」, 『학예지15』, 육군박물관, 2008) 그것은 조선시대의 무인들이 쓴 글이어서 정량궁 사법의 비밀이 담겼다. 그것을 풀 수 있는 것은 활터 사람들이다. 이 또한 활터의 성격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되살리기 어려운 전통이다.
[활쏘기의 어제와 오늘]에서
첫댓글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