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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시의 만남
정진명
1. 시는 영혼이 우주와 소통하는 형식
시는 인간의 영혼이 우주와 소통하는 형식이다.
우주는, 인간의 이지가 이루어놓은 '세계'와 달라서 그 세계를 둘러싼 미지의 세계까지도 아우른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생활세계 바깥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영역까지도 우주에 포함된다. 그런데 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은 인간의 내부에도 있고, 외부에도 있다. 외부는 인간의 이성이 과학에서 말하는 갖가지 관념과 도구를 사용하여 알아낼 수 없는 천체 바깥을 말한다. 그것까지를 포함하여 우리는 옛날부터 우주라고 해왔다.
그런데 자신의 내부로 눈을 돌려도 미지의 세계는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생활세계의 주인장인 이성은 인간을 이루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성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그 어떤 존재들을 알아내기 위하여 심리학, 병리학, 의학, 신화학, 사회학 같은 이름의 그물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인간 내부의 극히 일부만을 잡아낼 수 있을 따름이다.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세계 바깥의 영역까지 포함하여 우주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내부에 있는 또 다른 어떤 영역까지 포함하여 소우주라고 해왔다. 인간이 소우주라고 하는 믿음은 바로 이런 부분까지도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를 과감하게 뒤집으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 우주의 바깥을 내다보는 일은 같은 일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문학에는 그러한 경계를 알고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해 소통하는 갈래가 존재한다. 시가 바로 그것이다.
시는 언어이다. 그러나 다른 갈래와 달리 언어 이전의 세계와 직접 부딪는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언어라는 그릇에 담는 형식화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어떤 인식의 방법을 토대로 하여 미지의 세계를 유추하고 추리해내는 방법까지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인식과 유추의 근거에는 관찰이라는 아주 중요한 작용이 전제되어 있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일은 자신의 내면에 깃든 영혼의 존재 형태를 간파하는 일이 된다. 자신의 내면에 깃든 세계를 보는 것은 자신을 감싼 사회의 이성 작용과 인간이 아직은 알 수 없는 우주 바깥의 신호까지도 잡아내는 일이 된다.
이렇게 한 인간이 자신의 영혼이 근거한 내면과 자신의 삶이 놓여있는 세계, 나아가 그 세계 바깥의 신만이 알 수 있는 영역까지도 감성의 안테나를 뻗어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시만이 지닌 유일한 영역이자 장점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소우주와 대우주의 비밀을 해독하고 계시한다. 소우주와 대우주는 인간의 영혼 안에서 동일하며 그 동일성 위에 설 때 나를 중심으로 범아일여라는 뜻밖의 차원을 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시는 인간의 영혼이 우주와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2.활은 몸이 우주와 소통하는 형식
올바른 활쏘기는 몸이 우주와 소통하는 형식이 된다.
인간이 우주와 소통하는 방식은 숨쉬기이다. 인간은 땅이 주는 곡식과 하늘이 주는 공기를 에너지로 삼아 목숨을 유지한다. 그런데 사람의 섭생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그것은 자연이 주는 법칙이다. 그 법칙을 따르면 제 명을 누리지만, 그 법칙을 어기면 제 명을 누리지 못한다. 땅이 주는 법칙은 그 지역에 오랜 세월 전해오는 밥상 차림의 전통에 잘 살아있으니, 그리 걱정할 것이 못 된다. 그 밥상의 질서를 지키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장수의 비결이다.
그러나 숨쉬기는 그렇지 않다. 옛날부터 숨쉬기를 공론화하여 가르친 곳은 없다. 그냥 주어진 대로 숨쉬다 갔을 뿐이다. 하지만 활에는 숨쉬기의 공식이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 겨레의 오랜 경험이 축적된 결과이다. 따라서 그 공식에 충실해야만 그 공식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 공식이란 정통 사법을 말한다. 정통 사법에 따라 연마를 하면 각 단계마다 특이한 체험을 한다. 그것은 일상 생활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현상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활을 당긴 채로 서있는 순간에는 모든 것을 잊고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다. 나를 매개로 해서 내 안의 우주와 바깥의 우주가 하나가 된다.
일상생활에서 몸은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나'가 '세계'를 인지하고 세계를 상대로 어떤 행위를 도모한다. 그것을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와 나는 본디 그렇게 엄밀하게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 행동이 세계를 이루는 한 요소가 되고, 그러한 요소들이 다시 작용하여 나의 존재를 규정한다. 이 순환론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없다. 짧은 시각으로 볼 때 그런 단절이 일어나지 큰 안목으로 세계의 흐름과 우주의 이법을 관찰하면 이런 단절은 전체를 이루는 한 구성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절박한 눈앞의 욕망에 붙잡혀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거의 잊고 산다.
활을 쏘면 우주와 내가 일체라는 점을 몸으로 체험한다. 어느 순간 과녁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그때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냥 '우주'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우주와 내가 일체가 되어 분리되지 않는 순간이 활을 쏘면 종종 나타난다. 그때가 되면 몸은 아주 편해지고, 마음은 평화로워지며, 숨은 배꼽 아래까지 깊숙이 들어온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의 상태와 거의 흡사하다.
이것은 정신이 한 곳으로 골똘히 집중하여 몸 본래의 질서를 지배하는 기의 흐름이 우주를 향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안내하는 형식이 활쏘기이고, 원리가 정통 사법이다. 따라서 올바른 사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며, 그 올바른 방법에 따라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 몸은 우주를 향해 활짝 열린다. 그럴 때 활은 몸이 우주와 소통하는 형식인 것이다.
3.활과 시의 만남
활과 시는 분명 다르다. 활은 몸의 문제이고, 시는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바탕은 같다. 몸을 떠난 마음은 존재할 수 없기에 몸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의 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몸이 망가진 사람은 정신도 함께 망가지면서 그런 상태의 시를 쏟아놓는다. 몸이 건강한 사람이 영혼만이 황폐하여 황폐한 내면을 드러내는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은 시늉일 뿐, 그것이 영혼을 울리는 깊은 시가 되지는 못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지성의 작용이다. 지성은 세계와 소통하는 기본 조건이다. 그리고 그런 조건은 대개 약속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교통법규를 지켜야 하는 것은 신의 명령이 아니다. 사람들의 약속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한테 불편해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런 부문을 강화하는 것이 이성의 작용이다. 그런데 이 이성의 작용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강화된다. 더 정교해지고 더욱 강렬해지며 구속력이 점점 더 강화된다. 따라서 현대인은 지성의 기능이 가장 강화된 세계 속에서 산다. 그런데 이 지성의 작용은 머리에서 이루어진다. 판단은 머리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은 머리의 몫이지만,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작용은 대개 감정의 공유로 이루어진다. 공유된 감정이 상호작용할 때 사람들의 만남이 열린다. 이 부분을 맡는 곳은 가슴이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이 배려의 부분은 머리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을 사람과 나누는 것은 그 머리만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감정이 살아있는 마음으로 내려와서 그곳에서 시작된다. 시가 이루어지는 영역이 바로 이곳이다. 시는 머리로 판단하는 이성의 영역과 가슴으로 감싸안는 감성의 영역이 합쳐진 부분이다. 굳이 강조하자면 머리보다는 가슴 쪽이다. 심금을 울리는 시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이성의 판단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공간을 건드려 울림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머리의 영역이지만, 감성을 다루는 시는 가슴의 영역이다.
우리가 아는 문학의 영역에서는 바로 이 두 부분만을 다룬다. 지성을 맡는 머리와 감성을 맡는 가슴의 상호작용이 문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그리고 이 둘은 어느 한쪽의 주종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등한 상호작용을 이룬다. 세상을 보는 이성의 작용이 강하게 발달하면 감성이 거기에 따라가고 이성이 폭력을 행사하면 감성은 거기에 반발한다. 이성이 현실에서 좌절을 겪으면 감성의 영역 또한 황폐해져 우울하고 파괴본능에 시달리는 작품을 낳는다. 게다가 현실은 자본의 완고하고 숨막히는 지배 하에 놓여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은 피폐해지며 쉽게 파괴당한다. 그러면 파괴당한 정신의 지배 하에 놓인 감정의 세계는 우울하고 자학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고독과 분노, 절망에 시달리는 시를 낳는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머리와 가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성과 감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을 밑바탕에서 떠받쳐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생명력이다. 삶에 대한 의지이다. 태어난 존재가 갖는 본래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삶의 본원은 인간의 이성이 판단하는 영역 밖에 있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이 절망 속에서 현실을 포기하든 말든 인간은 숨을 쉬고 우주가 자신에게 부여해준 생명을 유지하려고 한다. 이것은 우주의 명령이다. 그것은 거의 무의식의 상태에서 이루어지기에 문학에서는 점점 잊혀지고 있는 부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런 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은 어디인가? 불거름이다. 불거름은 한자말로 단전이라고 하는 부분이다. 배꼽 밑 두 치 되는 부분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정확하지는 않고 대체로 남녀의 생식기능이 이루어지는 아랫배를 뭉뚱그려 말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실제의 장기는 아니다.
이곳은 숨쉬기를 통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오로지 태어날 무렵의 깊은 숨쉬기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면서 숨의 밑바닥이 점점 위로 올라온다. 단전 밑에서 시작되어 배, 가슴을 거쳐 목으로 올라간다. 숨이 목에 걸려 간당간당 하다가 그것마저 놓치면 '숨이 끊어진다'. 죽은 것을 '숨넘어갔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력의 활기 여부는 바로 숨쉬기에 달려있고, 건강은 숨의 깊이에 딸려있다. 그런데 이 생명력의 활기는 바로 위에 있는 가슴과 머리의 활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따라서 이 생명력이 활기를 띠고 있으면 감성은 풍부해지며 이성은 더욱 활발히 작용하여 세계를 다스리는 주체로 자신을 세운다. 그런 사람한테서 나오는 시의 정신은 건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활력이 넘치고 생명력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왕성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한테서 우울한 절망의 시가 나올 까닭이 없다. 오직 건강한 정신과 생명력만이 현실을 뚫고 우주의 본질까지 가 닿을 수 있다. 바로 이 점을 우리 문학론은 놓치고 있다.
그런데 이 생명력의 원천인 불거름까지 호흡을 되돌리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우리의 전통 문화에서는 활쏘기인 것이다. 물론 태껸, 풍물, 춤 같은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리는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활쏘기는 갖추었다. 정통사법을 올바로 배우면 사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1년 안에 그런 단계에 도달하기도 한다.
배꼽 밑에 생명의 기운이 충실한 사람이 쓰는 시와 그렇지 못한 사람이 쓰는 시는 같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생명력에 대한 인식과 수련은 인류의 가장 오랜 과제이면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관념을 세우는 지배자들의 사상에서도 실현된다. 조선의 선비들이 성리학을 통하여 통치이념을 구축했지만, 그들 개인에게는 명상이라는 수련법이 주어졌다. 깊이 파고 들어가면 송대 성리학의 원리는 선불교의 원리와 흡사하지만, 자신들 나름대로 올바른 사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심성수련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의 단련만이 아니라 우주가 소우주인 인간에게 준 생명의 본질을 잘 보존하는 양생술까지도 포함된다. 이황이 평상시 건강 관리 차원에서 도인체조인 활인심방을 수련했음은 이런 사실의 한 측면이다.
따라서 선비들의 시는 이러한 수련법이 일반화되었던 세계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 시들의 밑바탕에는 감성과 이성 이외의 또 다른 요건인 생명력의 작용이 깔려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생명력은 그들 세계의 밑바탕에서 거대한 잠력으로 작용하여 알게 모르게 문학에 영향을 끼친다.
서구 이론으로 무장한 현대인들은 이런 개념에 아주 낯설지만, 이런 것들이 동양의 이론으로는 하나도 낯설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인체의 작용을 설명하는 양생술 이론 가운데 단전호흡론이 그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단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곳이 생명을 주관하는 생명력이 깃들어있는 곳이고, 우주와 인간이 기로 유통하는 부분이다. 호흡을 통하여 교류한다. 머리에서 단전으로 기혈이 유통하면서 생명을 관장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단전은 작용에 따라 다시 셋으로 나눈다.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이 그것이다. 지성이 작용하는 머리는 상단전이고, 감정이 작용하는 마음은 중단전이며, 생명이 뿌리박은 아랫배는 하단전이다. 이 세 단전이 원활하게 교류하면서 인간은 건전한 삶을 유지하게 된다. 그리고 충실한 생명이 밀어올린 감성과 지성의 형식을 시로 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통이 살아있는 사회의 시와 그렇지 못한 상태의 시가 어떻게 다를 것인가? 그것이 아주 잘 드러나는 지점을 나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의 우리 문학이라고 본다. 다른 자리에서 해방 전후의 시기를 전후하여 작품의 질이 달라졌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분명히 해방 전의 작품들이 이룬 세계는 그 이후의 작품들이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랐다. 운율은 김소월한테서 거의 완성됐고, 절제된 이미지 묘사는 정지용이 완성하다시피 했으며, 형식 실험은 이상에서 거의 다 실험되었고, 사랑의 깊은 원리는 한용운의 시에서 농익었으며, 정신의 고결한 세계는 이육사의 시에서 무지개처럼 빛났다.
이들이 전례가 없는 가운데서 피워 올린 절정의 꽃 밑에는 그들도 알 수 없는, 그들의 선배들이 물려준 보이지 않는 유산이 작용한 까닭이다. 이것은 그의 후배들이 그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현실에서 반증된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과 형식 바꾸기의 문제가 아니라 한 시대에서 전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생긴 정신의 단절 문제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단순히 이성의 기능만 작용해서는 어려운 일이며 한 세계관의 거대한 교체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더욱이 1980년대에 거칠게 치밀었던 노동문학 이후에 그 반동으로 전개된 고독 울궈먹기, 허무 새 포장하기, 환멸 부풀리기, 도사 흉내내기의 잔망스런 시들을 보면 사라진 세계관을 대체할 만한 어떤 새로운 정신을 찾지 못한 채 황무지에 내던져진 시인들이 개인의 상상력으로 이룰 수 있는 높이가 얼마나 맹랑한 수준인가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 시는 우주의 비밀을 찾아서 세계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작용을 멈추고 슬픔이나 고독의 거품을 한껏 부풀려 사람들을 절망의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노릇을 자처하고 있어 우주가 인간에게 부여한 생명의 본질에 역행하는 것을 가장 시다운 것으로 착각하는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러나 시는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절망을 과대 포장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주와 소통하여 새로운 세계의 정신을 여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런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정신은 물론 육체 또한 건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은 본래 한 덩어리이고, 그 둘은 서로 상호 작용을 하면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기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이 우주로 통하는 길은 시에 있으며 몸이 우주로 통하는 길은 활에 있어 이 둘이 만날 때 가장 아름다운 시가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물론 활은 그냥 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활이 아니라 활이 드러내는, 잃어버린, 그리고 계속 잃어버리고 있는, 어떤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다. 그 세계관의 비밀은 불거름에 있고, 그것은 오로지 숨쉬기를 통해서만 열리며, 그것이 열릴 때 그곳에서 차 오르는 건강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시 또한 한 단계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의 새로운 길을 여는 일은 그곳과 무관하지 않다.
4. 활터에 남은 정신의 흔적
한국의 활쏘기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심오한 경지까지 올라갔다. 단순한 동작을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양생의 단계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이것은 활이 방어 수성 중심이던 우리 민족사의 전쟁무기로 가장 각광을 받은 탓으로 다른 어떤 무기보다도 쉽고 광범위하게 대중화 된 이유도 있지만, 활은 공자의 규정 이래 가장 선비다운 운동으로 간주되어 조선시대 내내 선비들의 교양으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무기로 사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심성 수련은 물론 양생의 비결로 활용하는 놀라운 단계까지 진입한 것이다. 전 세계 어느 곳에도 활쏘기를 이런 단계까지 끌어올린 민족은 없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활을 궁도로 규정하여 선으로 입문하는 한 방편으로 정착시켰지만, 과연 그런 세계관과 그런 장비 가지고 원하는 깨달음의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도구를 통해 선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의아한 일이다. 게다가 선은 돈오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돈오의 집념은 욕심이다. 그래서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몸이 먼저 망가진다. 그러한 집착마저 끊을 때 무문이 열린다. 화두가 무(無)자 범벅인 것은 이유가 다 있다. 활과 선은 생리가 다른 것이다. 활은 마음에서 몸의 방향이 아니라, 몸에서 마음의 방향이라는 말이다.
마음이라고 말했지만, 더 정확히 말해 활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양생이다. 양생은 선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그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양생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몸과 우주의 리듬을 일치시켜서 천지인 삼재의 조화를 이루고 마침내 범아일여의 꿈을 이루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 길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호흡이고, 활이라는 장비를 통하여 누구나 그런 경지로 쉽게 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은 것이 우리의 활쏘기이다.
따라서 올바른 사법을 배우면 누구나 쉽게 그리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길을 열어놓은 사람들이 조선이라는 정신 세계를 만들고 이끌었다. 그래서 그들이 몸을 통해 수련하던 활터에는 그들 정신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있다. 활터에 전하는 경구와 예절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것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활터를 스쳐간 거대한 정신의 면면이 드러난다. 이제부터는 거대한 정신이 잠시 머물렀다 간 곳에 흩어져있는 깃털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1)선례후궁(先禮後弓)
활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말이다. 돌에다가 새겨놓기도 하였고 액자로 걸어놓기도 하였다. 활을 쏘는 일보다는 활터에 올라와서 지켜야 하는 예절을 앞세운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란 선비들의 예이다. 선비들의 예는 진퇴주선하는 방식이 따로 있다.
그러나 그런 예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들이 겉으로 드러날 때 예절이 되기 때문이다. 예절이란 마음이 드러나는 형식이다. 쏘아서 맞추는 것이 목적인 활을 쏘는 곳에서 그 목적을 첫 번째의 위치에 놓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어떤 생각으로 활을 쏘았는가 하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선비들이 장수들보다 활을 더 잘 쏘았다는 기록은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는 물론 야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들이다. 테크닉만으로는 안 되는 곳에 그들은 있다.
2)정심정기(正心正己)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바르다는 것은 그르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바르다는 것은 지켜야 할 어떤 믿음이 있다는 뜻이다. 이때의 마음과 몸은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구별하는 실천의 현장이 된다. 몸과 마음 어디에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것, 그것을 활은 보여준다. 정신이든 몸이든 한 올이라도 원칙에서 어긋나서 흐트러지면 살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살이 맞지 않는 것은 활이나 살 탓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이 자명한 사실 앞에 군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말은 사법의 한 가지이면서 도덕의 한 가지이기도 하다. 관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는 곳에 그들은 있다.
4)발이부중 반구저기(發而不中反求諸己)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쏘아서 맞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본다는 뜻이다. 세상을 살면서 되는 일보다는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사람의 삶이다. 그런데 이때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남 탓을 하는 것이 세상의 통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자신이 최선을 다했을 때 안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법이다.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일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은데도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몸과 마음이 망가진다. 이 금언은 원인을 자신한테서 찾는다는 미덕을 보여준다. 활을 쏘는데 남 탓할 것 없는 것이다. 활 탓을 하거나 화살 탓을 해봐야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보는 자세를 활은 몸으로 가르쳐준다.
3)일시여금(一矢如金)
한 발 한 발을 모두 황금 같이 여기라는 말이다. 활터에서는 다섯 발을 한 세트로 여기는데 그것을 순이라고 한다. 다섯 발을 다 맞추면 몰기라고 해서 아주 좋아한다. 이 몰기는 첫 발부터 모두 맞추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몰기를 완성하는 마지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가 있다. 마지막 발을 못 맞추어서 몰기를 못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욕망일 뿐이다. 몰기라는 인간의 욕망. 화살은 하나 하나 혼자 존재할 뿐이다. 매 발을 소중히 여겨서 쏘다 보면 몰기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마음이 몰기에 가 있으면 그것은 욕심이어서 이루기도 어려울뿐더러 이룬다고 해도 욕심의 장난일 뿐이다. 한 발 한 발이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5)장기어신 대시이동(藏器於身待時而動)
이것은 주역의 한 구절이다. 활터의 어른들이 활을 논할 때 즐겨 쓴 말이다. 몸으로 갖추고 있다가 때가 오면 움직여준다는 뜻이다. 정말 무서운 말이다. 몸 속에 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때가 와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평상시 수련을 열심히 해서 완전히 버릇이 몸에 배어있어야만 때가 올 때 과녁을 맞출 수 있다는 뜻이다. 활만이 그러하겠는가?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다가올 그 순간을 위하여 단 하루도 한 순간도 그칠 수 없는 훈련, 그것이 활이다. 그리고 선비의 삶이다.
6)습사무언(習射無言)
호흡은 몸의 기운이 우주로 통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말은 바로 이 호흡을 이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활을 쏠 때 말을 하면 이 기운이 흐트러진다. 따라서 활을 쏘나마나 한 일이 된다. 그래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말은 재앙의 출구이다. 어찌 활만이 그렇겠는가? 말을 그치고 자신이 할 일을 꾸준히 반복하여 훈련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완성하는 길이다. 어려운 침묵 수행의 길을 활은 가르친다.
7)인애덕행(仁愛德行)
이것은 인류가 추구해야 할 꿈이기 때문에 굳이 활터만의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활터에는 이 말이 분명하게 전해온다. 널리 사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라. 욕심을 버리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5. 시와 전통
모더니즘은 전통의 파괴를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정말 신나는 모더니즘은 자신이 파괴할 전통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명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할 어떤 것이 있는 것일까? 무엇을 파괴한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 모더니즘은 속 빈 강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문학사에서 모더니즘은 언제나 평가의 잣대가 되었다. 근대 이전의 시에서 근대의 시를 구별하는 요인도 모더니즘이었고, 그 후에는 '낯설게 하기'라는 수법을 극단화하는 방법으로 모더니즘의 줄기를 이어갔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한국의 현대시를 평가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의 리얼리즘 문학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더니즘의 명분이 있었다. 그것은 그 이전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후광이 힘입어서 모더니즘의 운동은 가능했고, 그 정점은 김수영에 와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후의 모더니즘은 독재정권에 도전장을 던진 리얼리즘의 후광에 기대어 그 대척점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한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모더니즘은 어떤가? 무엇을 파괴해야 할 것인가? 파괴해야 할 그 무엇이 있는가?
엄밀히 말해 모더니즘은 전통의 파괴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정신의 건설을 뜻하기도 한다. 여러 가지로 말을 할 수 있겠지만, 모더니즘이 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념에 맞는 자유의 개념일 것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정신을 찾아가는 행로가 모더니즘의 방향일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어차피 그 방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움직임을 향해 감성이 안테나를 펴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모더니즘의 실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봉건의 굴레를 씌운 어떤 사상을 파괴하는 데서부터 시작한 한국의 모더니즘은 과연 지금 어디에 와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 21세기로 접어드는 지금 시점에서 한 번쯤 해야 할 일이 될 것이다. 리얼리즘의 시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홀로 빛나는 2000년대의 모더니즘은 과연 무엇을 더 파괴하고 세울 것인가? 파괴할 그 무엇이 한국의 시에 남아있는가? 그것이 남아있지 않다면 한국의 모더니즘은 방금 전의 자신을 파괴해야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시에는 김수영의 말마따나 코스츔만 남을 것이다. 이것이 활터에서 시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6.부록: 전통을 잘 간직한 활터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새로운 제도로 환골탈태하여 본래의 제 모습을 거의 다 잃어버린 것과 달리, 활터는 200년 전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있다. 그래서 처음 활터에 가면 낯선 명칭과 풍경을 아주 많이 마주친다. 이것은 지금 보기에는 낯설지만, 200년 전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것이 불과 200년만에 낯선 풍경이 되었으니, 그 동안 우리 사회가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가 하는 것을, 이 낯선 풍경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몇 가지만 간단하게 알아본다.
1)사두, 접장
활터의 대표를 사두(射頭)라고 한다. 모임의 대표에 머리 두 자를 붙이는 것은 해방 직후만 해도 흔한 일이었다. 회장을 회두라고 한 기록도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 두는 어른을 뜻하는 장(長)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사장(射長)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이외에도 드물게 사수(射首), 사백(射伯)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이 두 자는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붙어서 활 선생에 해당하는 사람을 교장(敎長)이라고 하는데, 이를 교두(敎頭)라고 하는 곳도 있다.
접장(接長)은 존칭이다. 접은 <마늘 한 접>의 용례에서 보듯이 꾸러미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 단체를 이끌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회사의 운영자인 사장이 특별한 직업이 없는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굳어진 것과 같다.
여무사라는 말이 있다. 여자 궁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사는 검객을 말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활이 무기를 대표했기 때문에 무사가 활 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굳었고, 여무사라는 호칭이 아직도 활터에서 쓰인다. 옛날에는 양반에 준하는 계층의 여인들이 활을 쏘았다. 양반 댁 부인이나 기생이 그들이다.
2)활터의 예절
활터에서는 꼭 지켜야 할 예절이 세 가지가 있다. 등정례, 팔찌동, 초시례이다. 이것이 다른 곳과 활터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예절이다. 모두 활과 관련된 예절이다.
등정례는 활터에 올라오면서 이미 올라와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인사이다. '왔습니다!'라고 하면 '오시오'라고 받는다.
팔찌동은 설자리에 서는 순서를 말한다. 이름이 팔찌동이 된 것은, 팔찌를 차는 방향이 어른이 서는 곳이라는 뜻이다.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등을 보이지 않도록 배치된다.
초시례는 활터에 올라와서 맨 첫발을 낼 때 '활 배웁니다'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곁에 서있던 사람들은 '많이 맞추세요'하고 응수한다.
3)활터의 풍속: 몰기, 납궁례, 연전띠내기
활을 배우다 보면 과녁을 맞추는 일이 생긴다. 태어나서 처음 맞추는 첫발과 세 발, 다섯 발은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집궁 후 첫발을 맞추면 1중례라고 하여 간단히 음식을 내어 가르쳐준 사람들에게 대접을 한다. 3중례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다섯 발을 다 맞추면 몰기라고 하여 영광스럽게 여기고 비로소 정식 접장 칭호를 준다. 간단한 음식을 내어 보답한다. 단계별로 이런 절차를 마련하여 활터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운영해왔다. 통과의례로는 이보다 더 모범을 보이는 예가 없다.
납궁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평생 활을 쏘다가 늙어서 더 이상 활을 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자신의 활을 활터에 반납하고서 국궁계를 떠나는 것이다. 일종의 은퇴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무술계에서 은퇴식까지 하는 경우는 전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의 활터에만 존재한다. 무협지에서는 금분세수라고 해서 이와 비슷한 의식이 있다. 그러나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활터가 유일하다.
활을 쏘고 나면 화살을 주워와야 한다. 그런데 살을 주우러 가는 것은 귀찮다. 그래서 재미 삼아 내기를 하여 결정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연전띠내기, 혹은 살치기라고 한다. 편을 짜서 시합을 한 다음에 그 결과에 따라 살을 주우러 가는 것이다. 같은 살치기라고 하더라도 활터마다 방법이 모두 다르다.
이밖에도 활터에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 찾아볼 수 없는 풍속이 많이 전한다. 활터에 전하는 풍속을 보면 가히 전통의 보물창고라고 할 만하다.
4)전통사법의 요체
전통사법은 활을 가장 잘 쏘기 위한 비법을 말한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한정 없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뼈대를 추린다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발은 비정비팔, 몸은 흉허복실, 마음은 망형반중'이다.
①발은 비정비팔(非丁非八).
양 발끝으로 과녁의 양 귀를 밟는다는 기분으로 서는 자세를 말한다. 이 발모양에서 양궁이나 기타 다른 민족과 우리 민족의 활쏘기가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과녁을 옆으로 돌아서서 보는 다른 민족의 활과 달리 우리 활은 과녁과 거의 정면으로 마주본다. 이렇게 되면 시위를 당길 때 상반신이 저절로 돌아간다. 허리를 돌리지 않으면 쏠 수 없는 것이 우리 활이라는 뜻이다. 발 자세를 이렇게 잡는 까닭에 우리 활은 세계에서 허리의 힘을 가장 많이 이용한다. 몸을 비틀면서 내는 힘이 활에 실린다. 이렇게 몸을 비틀어서 힘을 내는 원리를 무술에서는 전사경이라고 한다. 제한된 조건에서 운동량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②몸은 흉허복실(胸虛腹實).
가슴을 비우고 불거름을 든든히 한다는 말이다. 모든 무술과 도의 세계에서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진 인간의 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호흡이 깊어지고 마음이 고요히 안정된다. 이 방법을 활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활을 들어올려 엄지발가락으로 땅을 지그시 누른 다음 숨을 들이쉬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시위를 당기는데, 다 당겼을 때 숨구멍을 열어놓은 채로 분문(똥구멍)을 꽉 조인다. 그러면 가슴은 저절로 비고 아랫배는 충실해진다.
이 원리는 명상이나 내공 수련을 하는 모든 자세의 공통점이다. 활이라는 장비를 이용하여 이 상태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 한민족의 정통 사법이다. 흉허복실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깍짓손을 떼면 화살은 날아가고 그 반동으로 뒷손은 저절로 펴진다. 그 자세는 마치 먼 길을 날아온 학이 막 둥지에 내려앉을 때의 그 모습이다.
③마음은 망형반중(忘形返中).
망형은 형태를 잊는다는 뜻이고, 반중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활은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조금이라도 과녁을 맞추려는 욕심을 부리면 마음이 흔들린다. 흔들린 상태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 묘하게도 마음의 상태가 화살에 반영된다. 욕심을 부릴수록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럴 때는 맞추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서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해결책이다.
활을 다 당겨서 조준을 마쳤으면 이제 자신이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모두 잊는다. 이것이 망형이다. 그리고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이어지는 몸의 중심선으로 마음을 이동시킨다. 이것이 반중이다. 활은 중심의 운동이기 때문에 활을 다 당긴 상태의 몸에는 힘의 중심이 잡힌다. 물론 이 중심선은 몸통의 한 가운데를 따라서 세로로 형성된다. 이 기운을 일단 양팔이 만나는 가슴으로 옮긴 다음, 숙달이 되는 대로 점점 더 밑으로 내린다. 마음이 불거름까지 내려가면 참선의 상태와 똑같이 된다. 이때 느껴지는 기운은 둥글다. 크기는 한정 없이 클 때도 있고 작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 둥그스름하게 느껴진다. 이런 것은 고도로 숙달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므로 초심자들이 함부로 따라하면 큰일난다. 열심히 습사를 하다 보면 어느 날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때가 되어야만 마음을 논할 수 있다. 섣불리 흉내낼 일이 아니다.
몸은 형상기억합금처럼 자신의 버릇을 기억한다. 평상시에 훈련을 많이 반복해서 몸이 그 훈련에 적응을 한 단계에 이르면, 이제부터는 과녁을 겨눈 상태에서 일부러 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면 평상시에 훈련된 버릇 그대로 몸이 스스로 알아서 활을 쏜다. 그때 마음이 해야 할 일은, 컨디션이 좋아서 쏘는 대로 맞을 때의 그 쏘임과 느낌을 생각해주는 것이다. 마음이 그렇게 하면 몸이 저절로 그때의 상태를 따라간다. 화살은 확인하지 않아도 가서 맞는다.
이와 같이 마음을 비워서 몸의 중심선으로 옮겨놓고 몸이 알아서 쏘도록 하는 것을 반중(返中)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취한 모든 동작을 잊고 몸의 중심으로 물러나 평상시 훈련된 몸이 하는 대로 놔두는 것이 망형반중의 뜻이다. 이렇게 되면 화살은 마치 탄두에 목표탐지기를 장착한 유도미사일처럼 과녁의 중심으로만 날아간다. 오색바람이 불어도 촉은 알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백발백중의 경지이다.
(시집, '활에게 길을 묻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