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문관(弓門關)
무문관, 역문관, 귀문관과 같은 어법입니다만, 어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말에 얽매여 가지고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활문관이란, 활을 통해서 몸과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을 말합니다. 그 문의 빗장을 몇 겹이나 벗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에 딸렸습니다.
활은 처음 사냥 도구였다가, 점차 살상용 무기로 발전하였고, 총포가 나오면서 다시 무술로 그 기능을 바꾸었습니다. 무술의 목적은 건강과 호신입니다. 법치가 이루어진 곳에서 호신은 법이 담당하니, 무술의 목적은 건강에 국한됩니다. 따라서 활쏘기의 유일무이한 목적은 건강입니다.
우리 활은 갑오경장 때(1894년) 무과에서 폐지되었다가 30년만인 1928년에 '조선궁술연구회'로 발족함으로써 그 전의 다양한 목적과 수단을 정리하고 비로소 스포츠로 정착합니다. 따라서 이후의 활쏘기는 오직 스포츠의 목적으로만 쓰였습니다.
스포츠의 목적은 건강과 오락입니다.
오락이라는 부분은 현재 활터에서 갖가지 형태로 분화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꿇내기, 띠내기(살치기), 전사, 편사 같은 것들이 모두 그것입니다. 현재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각종 대회도 그런 것의 일종입니다.
오락의 요소를 뺀다면 활쏘기에 남는 목적은 단 하나, 건강입니다. 따라서 활 쏘는 모든 행위는 사람의 몸에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현재의 활쏘기는 모두 건강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전세계에는 다양한 활쏘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람의 몸에 가장 좋은 건강을 제공하는 방법인가 하는 것은 각 민족의 활쏘기가 모두 다릅니다. 사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가 하는 것은 앞으로 남은 연구 과제일 것입니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결합체입니다. 대부분 건강은 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건강이론은 몸을 단련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몸을 움직여서 하는 모든 격투기가 그런 것이고,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운동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늙습니다. 그리고 낡습니다. 건강이 몸의 문제만이라면 마라톤 선수는 감기에 걸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오래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나이 마흔이 넘으면 환절기를 쉽게 넘기지 못하고 감기 걸립니다. 이것은 <강함을 통한 육체 단련>이 건강의 유일한 조건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한 번 태어난 육체는 어차피 늙어갑니다. 늙어가는 이 육체의 진도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건강의 지혜입니다. 그 방법 중에는 육체 단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반드시 이 육체의 주인인 마음을 다스려서 내 몸에 맞는 쓰임을 구사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마음 공부란 무엇인가? 양생술이 그것입니다. 양생술은 육체를 단단하게 단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연하게 하는 것입니다. 몸이 경직되지 않고 부드럽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수련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요가나 중국 무술이 이런 쪽으로 오래 전부터 발전해왔습니다.
무예라고는 활쏘기 밖에 없던 우리나라에서는 활이 이런 경지로 발전해왔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경지를 맛보려면 올바른 사법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 사법으로 쏘아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 사법이란 <조선의 궁술>에 나옵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이 5천년 동안 걸어서 도착한 양생의 경지가 그 몇 장 설명에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 한 문장이라도 그것과 다르면 우리 할아버지들이 도달했던 곳에 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다가가도 결국 마지막에 부딪히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활쏘기의 수준과 사법의 높낮이가 결정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활에는 마음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활문관은 활을 통해 그 마음으로 가는 문입니다. 자신이 열지 않으면 아무도 열어주지 않고 열어줄 수도 없는 문! 그 문의 빗장!
열어봅시다!
마음이라고 하면 먼저 '도'부터 떠올립니다만, 도는 그것을 이해하는 자의 정신상태에 따라서 답이 각기 다릅니다. 모든 도가 같다면 노자와 공자가 각기 딴 소리를 했을 리 없고, 절에서 찬송가를 불러도 좋을 일입니다. 그러나 실상이 그렇지 못한 것은 각기 다른 그들만의 길(道)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자의 관념체계일 뿐입니다.
활을 도에다가 갖다 붙여서 궁도라고 한다면 본질에서 더욱 어그러집니다. 본디 도는 어떤 도구에 들러붙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도구를 통해서 도통한다면 평생을 면벽대좌하는 스님들이 얼마나 억울할까요? 깨달음은 도구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찾아가는 것에서 옵니다.
만약에 활쏘기가 도라면 그것은 마음을 찾아가는 방편일 것입니다. 그 방편은 방편일 뿐 마음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자꾸 도에 연관짓는 것은 도를 추구하는 자들의 신념과 문화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심리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한 방편인 것이지요. 물론 그 심리는 활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활을 쏘는 자들의 생활 방식과 가치체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궁도는 선불교의 전통으로 활을 보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습성에서 나온 '활을 보는 한 방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활이 가진 본래의 속성이 아니라 활을 보는 하나의 관념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나라 활에 갖다 붙여놓는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습성과 관념체계로 우리 활을 본다는 뜻입니다.
활을 어떻게 보든, 어떤 관념체계로 조명을 하든 그것은 그렇게 하는 자의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하필 일본인의 눈으로 한국의 활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한 다음에 궁도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오천년 역사를 지닌 우리 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임은 분명합니다.
선불교의 깨달음은 제 한 몸 건강하자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선불교의 목적은 자신이 먼저 깨달음에 이르러서 그 숭고한 깨달음을 사바세상의 중생들을 구제하는 데 쓰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들을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어 그들 고통의 근원을 없애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종교의 진면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활은 아무리 까뒤집어 봐야 제 한 몸 건강하자는 것이지 세상의 구원과는 무관합니다. 그럴뿐더러 활로 세상을 구제하겠다면 삼척동자가 다 웃을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활을 쏘고 명궁이 되면 그들의 고통이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허황된 '궁도'의 망상을 버리고 활 본래의 목적인 스포츠로 되돌리는 것만이 이미 궁도로 가득히 오염된 우리 활을 살리고 우리 몸을 살리고 우리 마음을 살리는 길입니다.
스포츠는 육체 단련이 주이지만, 거기에 마음의 수련을 더하면 양생이 됩니다. 양생의 술이 되는 것이지요. 한국의 활쏘기는 '궁도'가 아니라 '궁술'이고, 그 '술'은 양생술의 '술'과 같습니다. 술에 취한 듯 마음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쏘는 활! 그러면서도 우주의 기운을 불거름 가득히 모으는 활!
빠져봅시다!
양생의 활쏘기, 궁술!
활쏘기가 양생의 수준까지 올라가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은 몸의 균형과 관련이 있습니다. 몸이 삐딱하거나 기우뚱하면 마음은 절대로 안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몸이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활쏘기의 양생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를 위한 자세가 갖추어져야 합니다.
양생은 우주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주의 기운을 몸으로 받으려면 몸을 그런 상태로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가장 편한 자세를 만들어놓으면 우주의 기운은 사람의 호흡을 통해서 몸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몸에는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려면 자세가 가장 안정된 상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쏘기에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최소한 갖추어야 합니다.
1. 반드시 비정비팔
2. 반드시 온깍지
3. 반드시 숨통 트기
이밖에도 많은 조건이 있지만, 일단 이 세 가지만 갖춰놓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소됩니다.
<비정비팔>은 동양의 활쏘기에서 모두 쓰는 말이지만, 실제로 취하는 발모양은 각 민족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 민족의 비정비팔과 중국의 비정비팔, 일본의 비정비팔이 모두 다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비정비팔은 우리 민족의 비정비팔을 말합니다.
우궁의 경우, 왼발을 과녁의 왼쪽 귀에 맞춥니다. 그리고 오른발은 자연스럽게 벌리되, 양 발 사이에 자신의 주먹 둘이 들어갈 정도의 넓이로 벌립니다. 이것이 옛부터 전하는 우리 고유의 비정비팔 법입니다.
반드시 뒷손은 온깍지 사법으로 끌고, 멈추고, 풀어야 합니다. 온깍지 사법으로 끌라는 것은 높이 끌라는 것입니다. 활을 이마 높이로 들어올렸다가 귓바퀴를 스치도록 당겨서 입꼬리 위로 살대를 고정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발시 후 깍지손을 자연스럽게 풀리도록 합니다. 지금의 반깍지처럼 그대로 두어서는 몸의 기운이 풀리지 않습니다. 반깍지는 맞추기 위한 편법입니다. 깍지손이 펼쳐져야만 온 몸을 긴장시켰던 기운이 풀리고 그에 따라 경락이 함께 열립니다. 양생술은 기혈 순환이 생명입니다. 몸 가는 곳에 마음이 따라야 하고, 마음이 따라가면 기도 함께 갑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뒷손은 높이 끌어서 자연스럽게 풀리도록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숨통은 반드시 터놓아야 합니다. 활쏘기는 호흡이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숨구멍은 열려있어서 언제든지 우주의 기운이 드나들 수 있도록 숨통을 터놓아야 합니다. 숨통을 막아놓으면 얼굴이 벌개지면서 기가 역류합니다. 목숨을 재촉하는 일입니다. 활쏘기에서 만작 시에 자신의 숨통이 열려있는가 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만작을 하고서 숨을 쉴 수 있는가 확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숨은 생명으로 인식됩니다. <숨통, 목숨> 같은 말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숨쉬기와 생명을 동일시한 것으로, 양생술은 바로 여기에 근거를 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살펴보면 일찍부터 우리 민족은 이런 술법에 깊이 통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상이 양생의 활쏘기를 이루기 위한 조건입니다. 이상의 조건을 이루고 1년만 잘 수련하면 몸의 변화가 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활을 쏘아도 이상의 조건을 지키지 않으면 양생에 의한 변화는 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맞추기 위한 편법이기 때문입니다. 잘 맞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활의 근본 목적은 아닙니다. 활보다 더 정확하고 효과 좋은 총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활쏘기의 목적은 건강입니다. 맞추기는 오락일 따름입니다. 오락이 좋으신 분은 오락을 즐기면 됩니다. 활쏘기의 오락은 그 나름대로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꿇내기, 연전띠 내기, 전내기 같은 것이 다 그런 오락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대회 역시 그런 오락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것은 그런 오락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양생술이고, 활쏘기를 통해서도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쏘기에서 그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 이곳의 목적입니다.
빗장열기!
양생으로 가는 길, 활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