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절대로 둥글둥글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신 분이 아니었다. 실제로 예수는 당시의 종교세력들과 끊임 없는 갈등을 빚었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예수는 퉁명스럽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리새인들 안에 있다니 이 무슨 소리인가?
또 한 번은 예수가 "독사의 족속들아, 그렇게 악하면서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결국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오는 법이다." (마태12:34) 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자기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벙어리를 고친 기적을 마귀의 장난이라고 몰아 세웠던 까닭이다. 예수는 그의 생애에서 꼭 한 번 저주를 퍼부었다. 즉, "나를 훼방하는 자는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성령이 하는 일을 훼방하는 자들은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세상에! 예수가!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바리새인들은 말끝마다 하나님을 들먹이지만 전해져 내려오는 자기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항상 최종적인 판단을 했다. 예수는 하나님조차도 자기들의 전통에 가둬 놓으려고 하는 것을 분노하셨던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와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진짜 알고 싶어서 예수께 질문을 했다기보다는 예수를 함정에 몰아넣기 위해서 늘 복선을 깔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집권 여당인 사두개에 비해서 야당격인 바리새들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정권교체를 갈망하는 만년 야당처럼 자기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주체적으로 준비하며 살고 있는 세력이라고 자부 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요상한 건달이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를 떠들고 있으니 가만히 놓아 둘 수가 있겠는가?
예수는 이 도전에 대하여 불교의 고승들이 상대방의 허상을 깨고 한 방에 진면목을 보게 하는 방법을 쓰신 것이다. 마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식으로 파격적인 언어를 통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어떤 찬사를 늘어놓거나 아무리 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도 별로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인간의 본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예수는 사람에 대하여 완전히 아셨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그 사람에 꼭 맞게 상대를 해주셨다. 자기 자신을 개로 비유한 여자에게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는가 하면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인간은 철저하게 까부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박살을 냈다. 마치 능숙한 싸움꾼이 능수능란하게 치고, 박고, 돌려 차서 상대를 널부러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말은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 그런 것 없어. 지금 네 마음 속에 없다면"이 되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심. 중심. 진짜 네 마음이 머무는 곳. 그 곳에 있다. 사랑하는 이, 사랑해야 할 사람 안에 있다. 너희들 마음 속에 진짜 하느님의 나라를 알고자 하고 그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나 하니?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너희 안에 있는 거야." 이런 말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늘 항상 배우고 정리가 됩니다. 새해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