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쪽 뺨마저 돌려대시오. 당신을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마저 내어 주시오. 누가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 천 걸음을 가시오.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은 물리치지 마시오.”
위 구절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네 가지의 이야기가 밑에서부터 점차 그 요구가 더 강해지는 억압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해준다.
처음에 꾸어 달라고 하는 청에서 함께 가자는 강요를 거쳐 재판을 걸겠다는 협박을 하고 나중에는 뺨을 때리는 폭력으로 점점 억압이 고조되고 있지 않은가?
역순으로 제일 강제성이 약한 경우부터 차근 차근 순서를 거꾸로 올라가면서 점검해 보자.
네 번째 강요인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마시요"를 생각해 보자.
고대 동방에서는 구걸을 하는 거지들 때문에 성가실 지경이었다. 소수를 빼고서 대부분의 국민의 아르바이트가 구걸이라고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오늘날의 아프리카처럼. 거지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졸라대는 것은 물론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염치없이 조르더라도 거절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를 보자. 징용. 징발이라는 말 들어는 보셨을 거다. 일제 시대 때, 6,25 기간에 많이 있었던 일이다. 평화 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한번 겪어 보았다.
예수 당시 길을 가다가 로마군에게 재수 없이 물건을 지고 가라고 강제징벌을 당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안 가겠다고 버틴다고 될 일이 아닐 것이다. 할 수 없이 복종해야만 하는 경우인데 5 리를 끌려간 다음에 인상 쓰다가 트집을 잡혀 한 대 맞고 5 리를 더 끌려가기 전에 자진해서 10 리를 가라는 말이다.
두 번째 경우는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이라는 그것 밖에 없는 한 벌 옷을 빼앗길 처지이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추운 밤에 겉옷을 이불을 삼아야 함으로 어떤 경우에도 겉옷은 빼앗지 못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 사이에서는 겉옷을 빼앗길 염려가 없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고 이민족(異民族)인 로마군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한 마디로 치사하니까 까짓 것 겉옷까지 주어 버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경우는 위에서 예를 들었다.
흔히 기독교윤리를 말할 때 “관용의 정신’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거 정말웃기고 자빠진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약자가 강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게 말이 돼나? 이런 것을 보고 ‘빙신 육갑한다! 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종종 병신쪼다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어차피 거부할 수도 없는 처지에 괜히 상대방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에 완전히 중독된 기독교에서 흔히 말하듯, 일제 시대 조선 사람이 일본 순사를,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에게 대하듯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든 저항하지 말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가는 적극적 복종을 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경우.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마저 돌려대라.”
전혀 저항할 처지가 못 되는 상태에서 매를 맞을 때 때리는 놈이 오른 빰을 때리면 얼굴이 왼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 빨리 얼굴을 다시 돌려서 왼 빰을 대지 않으면 잘못 맞아서 코뼈가 부러진다. 호신술의 경지에서 보면 두 손으로 사람을 때릴 때는 구태여 왼 뺨을 들이 댈 필요가 없다. 양 손으로 식성대로 때리면 되니까.
그런데 오른 쪽 맞고 왼쪽 맞으려고 뺨을 돌려대는 경우는 어떤 상태일까?
상대 선수는 한 손으로 때리고 내 쪽은 묶여있던지 아니면 전혀 저항 할 수 없는 권위 앞에 상대방이 전혀 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만이 취할 수 있는 자세이다. 그럴 때 오른 뺨을 때린 후 왼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리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오른 뺨을 때릴 때 왼뺨을 대라는 말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을 당하게 될 때 꾹 눌러 참는 것이 한 대라도 덜 맞는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시는가? 안되면 거울 앞에서 직접 해보시라.
예수의 가르침은 단순히 호신술을 넘어서 한 대라도 덜 맞는 처세술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여기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을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의 이야기는 당시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실재적인 일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세계적인 군사강국 로마와 보잘 것 없는 변방 식민지 팔레스틴의 이스라엘 민족주의가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가 로마와 유대 사이의 정치 사회적 구조를 분석할 만한 식견이 있었다고 상상할 수는 없다. 고대인으로서 예수는 로마를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 정도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명백하다. ‘불의를 당하더라도 어떤 보복이라도 할 생각일랑 아예 말아라. 힘으로 대항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과연 누구를 상대로 이 말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이 말을 한 게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리떼가 들끓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 양 같은 입장인 제자들에게 뱀 같은 지혜를 말한 것이다. 그들에게 상대방에게 감동을 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방법 즉, 상대방은 가지지 못한 도덕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첫댓글 도대체 약자가 강자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게 말이 돼나? 이런 것을 보고 ‘빙신 육갑한다! 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종종 병신쪼다 되는 것이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오랫만 입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둘람 공동체에 와 보세요. 주일 오전 10시 zoom ID 318 289 5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