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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원문보기 글쓴이: 역사학도
드라마 서울1945에서 동우가 미국에서 OSS 장교가 되었다는 스토리는 그 모티브를 <광복군 연락장교가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하였다>는 미국 기록에서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제 인물은 박정희가 미OSS와 연합작전으로 독립운동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미국의 전략첩보국 산하 광복군 부대를 미국무성과 협의하여 창군하였는데요.
열우당 김희선 의원이 자기 조부라고 주장한 바 있었던 김학규 장군을 모신 분이 바로 광복군 박정희 중위였습니다. 광복군 제 3 지대장 김 학규 장군과 박정희의 관계는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평생 지속되어 김장군께서 아프실 때 박정희 대통령이 몸소 병수발을 하셨으므로 한번 김학규와 박정희 키워드를 검색해 보시면 금방 확인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드라마의 광복군 연락장교 동우의 실제 인물은 김우전(金祐銓·83) 광복회장이신데요. 김우전 광복회장님은 박정희가 미국 OSS와 연합작전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증언하십니다. 예를 들어, 그분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문건이 있습니다. 김우전님은 19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하시다 연락장교가 되신 분이신데요. 김우전님 등 당시 광복군 인사들이 박정희 미국 OSS와 연합으로 독립운동을 했다고 증언했었는데요. 그 당시는 한국인들이 미국 OSS가 있는지조차 몰라 설마했지만 이제 KBS 드라마로 세간에 알려졌으니 미국 OSS와 박정희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 김구 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에게 말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그것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것이다´ 라고 김정균은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만주국 부의황제의 추천으로 만주국 군관요원 국비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군 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학 장학유학을 하게 됨으로] 실현되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위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때도 김정균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과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은 기록하고 있다. >>
드라마 서울1945에서 미국 OSS 와 광복군이 연합작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으며, 그 일을 김학규 장군 밑에서 중대장이었던 박정희가 했다고 광복군 인사들은 증언합니다.
『 1944 년』 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지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 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 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위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安勳)의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 정희 대통령이 1944 년 4 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 이하 중략 -
그동안 박 정희 대통령이 만주국군 보병8단 군관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광복군 인사들의 증언에 사람들이 반신반의했었던 이유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라는 것이 정말 있었는지 알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KBS로 드라마로 인해 OSS가 실제로 있었으며, 광복군과 연합작전을 한 일이 참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국민에게 분명하여졌으니, 그간의 광복군 인사들의 증언에 한층 더 신빙성을 더 해 주는 것입니다.
★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 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장면 정권 등 그 어느 역대 대통령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직 박정희 대통령께서 5.16 혁명 직후 1962 년 김구 선생님을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 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박 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것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미군과 합동작전으로 독립운동 지휘한 박정희
박정희는 단 하루도 일본군 군복을 입었던 일이 없었고, 일본군 신분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이 그를 관동군으로 오해하고 있는 두가지 이유를 설명드립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박정희의 경력을 보았을 때 어째서 일본육사를 1944년 12월에 졸업하고서 만주국군 군관으로 4월에야 부임하였는지 의아해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비록 박정희는 일본 장교 과정이 아니라, 유학생 위탁교육 과정을 밟았지만 위탁 교육생도 졸업 후에 석달간 관동군에 배치되어 견습 기간을 가집니다. 이 견습 기간이 일본군 신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국 대학생도 해외 기관에서 견습을 하지만 그것이 국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 않지요. 그런데, 훗날 박정희의 경력을 기록하는 이들이 견습 기간을 복무 기간으로 오기하였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일제 시대에 조선인 병사들이 만주국군 소속 조선인 장교들을 멸시하였던 풍조가 있었습니다. 일본인들 역시 관동군을 우대하고 만주국군을 차별하였다는 말이 있는데요. 당시 조선인들은 관동군을 명문으로 보고, 만주국군을 얕보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만주국군 내에는 조선인 병사가 없었고, 조선인 군관들만 몇명 있었기에 만주국군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었는데, 관동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이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보는 눈이 달랐다고 합니다. 우선 군복부터 크게 달랐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을 미화하려던 분들에게서 두가지 풍조를 발견합니다. 첫째로, 관동군 견습기간을 복무 기간으로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주국군 출신 군관들의 공통된 경향이 자기 출신 군대를 만주국군이라고 부르는 대신 일만군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일만군이란 러시아군이 외몽고를 통해서 소만 국경을 넘어 몇 차례 침범했었을 때의 일본군과 만주국군 연합군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족 군관들에 해당되지 않는 명칭임에도 자기 출신 군대를 일만군이라 불렀었습니다.
제가 아래 인용하는 자료를 눈여겨 보세요. 제가 지난 4월 이 자료를 입수하였을 때는 솔직히 반신반의하였습니다. 우선, 광복군 연락장교가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하였다는 말 자체가 저에게 금시 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을 미화하려는 분의 픽션일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었습니다.
그러나 서너달 전 미국인의 기록 영화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어째서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전후하여 자신의 독립운동에 대한 책을 누가 내지 못하도록 엄금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아래 자료를 보면,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으로 부임하기 전, 즉 육사 졸업 직후 관동군 견습 기간부터 이미 미군 및 광복군과 연락을 가지고 일본군 내부를 교란시키는 작전을 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는 불문에 붙여져야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그럴진대, 과거사 진상위는 쓸데 없는 일에 국민의 천문학적 혈세를 낭비할 것이 아니라, 바로 아래 인용된 문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 아래 명기된 인물들이나 단체들에 접근할 수 있는 분들이 있으면 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미국의 (광복군-미군 합동 비밀작전) 기록영화 내용으로 보아 저는 아래 문건은 거의 확실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
그 전단은 “아직 전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28일 작성한 것.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2004년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이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한다. 광복군이 그를 받아들인 이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차 대전 영화(1부 5편)/ 일본 해공군의 진주만 폭격
첫댓글 맞습니다. OSS는 미국에서 이승만 박사가 처음으로 미 국무성과 접촉하여 우리 국민의 우수성을 알리고 일본과의 전투에 우리 병력을 투입하여 미군과 합동작전을 펼침으로 정당한 독립을 쟁취하고자 착안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최초로 미국에 있던 교포 청년들을 선발하여 훈련을 시켰는데 너무나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자 미군도 몹시 놀랐다고 합니다.
이로써 우리 국민의 우수성을 알리고 우리 국민의 우수성을 알게 된 미군은 전적으로 협력하기로 하고 리승만 박사는 이 사실을 임정에 알려 광복군 중에서 우수한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OSS훈련을 받도록 합니다. 그러나 안타낍게도 OSS는 미군과 합동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될 예정이었는데 그만 일본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급작스런 항복을 함으로써 이 작전은 무위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일 이 작전을 공동을 펼쳐게 되었다면 해방 후 우리나라의 정국은 또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을 것입니다. 즉 신탁통치가 아니라 당당하게 임정을 승인받고 독립을 쟁취하게 되고, 남북분단도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