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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국경 근처로 취재를 가던 중,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음을 들었다. 생물의 몸을 갖고 나온 이상 모두 죽게 되어있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그게 삶 속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멀리서 접한 최 전 대통령의 별세 소식이 마음을 쓸쓸하게 했다.
기자는 직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맺는다. 그런 인연에는 사적이면서 공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가 있다. 최규하와의 처음 인연은 사적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인터뷰는 이제 공적인 기록으로 남게 됐다.
나는 1993년 그를 인터뷰했다.
당시 문화부 기자였는데, 월간조선(조갑제 선배)의 청탁을 받고 최규하 인터뷰를 시도했다. 당시 그는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지 13년이 지났을 때다. 그는 바깥 세상으로부터 고립돼있었다. 어쩌면 스스로 그 성을 굳게 쌓았고, 세상과의 소통을 자기 손으로 단절시켰는지 모른다.
어떤 언론도 매체도, 역사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놓고 그를 만나기 어려웠다. 내가 이런 배경을 잘 알았다면 인터뷰를 해보겠다는 마음을 아예 먹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몰랐다. '사람 사는 세상에 못 만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떤 사람이라도 사람과의 대화를 그리워할 것이다'라고. 그렇게 해서 인터뷰가 이뤄졌다.
이는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그 뒤로 인터뷰와 관련해 몇몇 잡담이 있었고 한때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인터뷰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그에게도 의미있는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기록은 소중하다.
그를 인터뷰한 것은 퇴임후 13년, 내 삼십대 중반의 시절이다. 그리고 13년이 다시 흘렀다. 내 머리가 희끗해지고 노안이 왔다. 그럼에도 그때의 인터뷰는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로 그대로 남았다.
당시의 기록을 찾아 여기에 옮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권력욕에 불탄 적이 없었지만, 격동기의 어떤 잔인한 운명으로 인해 대통령 권좌에 올랐던 한 '옛날 사람'에 대해 우리는 약간이나마 이해해야하지 않을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다음은 당시 인터뷰 기록이다.
崔圭夏 전 대통령을 지난 9월3일 서교동 자택에서 만났다. 기자와 1시간 20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는 1980년 퇴임한 뒤로 언론과의 어떠한 접촉도 의식적으로 피해 왔었다. 이번 만남은 침묵을 지켜오던 그가 꼭 13년 만에 비로소 외부를 향해 말문을 연 첫 자리가 됐다.
崔 전 대통령은 참 많은 말을 했다.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나라의 역사적 사례를 많이 인용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기자가 묻기도 전에 다른 화제로 건너가 말문을 열기도 했다.
배석한 비서관이 수차 손목시계를 보며 기자에게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제스처를 했을 때야, 그는 말문을 닫았다. 그의 언변은 아마도 외교관 시절부터 몸에 밴 것이겠지만, 기자는 그것이 한 소외된 퇴임 대통령의 고독으로 여겨졌다.
물론 이날의 대화 내용은 기자에게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대화 도중 화제가 1980년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면 그는 완강하게 답변을 피하려 했다. 그는 퇴임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재임 시절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직접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 여러 모로 마땅치 않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때문에 독자들이 궁금해 하고 기자가 의문을 가졌던 대목은 이번 만남에서 그다지 해소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날 만남은 당초 그렇게 예정돼 있었다. 오히려 崔 전 대통령이 지금껏 자신이 취해온 자세를 잠시 보류하고 이번 접견을 허락해 준 것만으로 솔직히 기자는 그에게 감사해야 했다.
그는 수 차례 인터뷰 요청을 일관되게 거절했고, 기자가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도 비서관을 통해 곤란하다는 통보를 보내곤 했다. 이날 자리는 기자가 인사만 하고 가겠다는 선에서 이뤄진 것이고, 관대한 그는 자신의 아들보다 더 젊은 30대 중반 기자의 「억지」를 물리치지 못한 것이다.
기자가 1980년 상황을 화제로 삼은 것은 실상 사전 약속을 위반한 것이었고, 그로서는 당연히 답변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었다.
만남은 오전 10시 반 자택 거실에서 이뤄졌고, 최흥순 비서관(56)이 배석했다. 崔비서관은 『최근 국회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해 국정조사를 벌이겠다는 보도가 있고부터 어른께서 또 신경이 예민해지셨다』고 일러주었다.
선풍기 한 대가 돌고 있는 좁은 거실에서 얼마 기다리지 않아, 崔 전 대통령이 보라빛 무늬가 있는 남방과 회색 바지 차림으로 안방에서 나왔다. 그는 덧없는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평소 육중하던 몸이 좀 처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르신께서 대통령으로 재임하시던 1980년도에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당시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았고 그 후로는 간간이 신문, 잡지에 난 사진으로 접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 뵙게 되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떻습니까.
『그저 그래요. 병치레는 없지만 나이를 이만큼 먹었는데 썩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건강 관리를 위해 특별히 하시는 운동은 없습니까. 골프가 수준급이라고 들었습니다.
『운동은 무슨 운동, 아침으로 마당에 나가 맨손체조를 하는 게 고작이요. 이 나이에 골프를 친다는 게 맞지도 않을 뿐더러, 내가 골프장에 나가면 앞뒤로 경호원이 붙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아무래도 골프치러 온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게 될 것이 뻔한데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마찬가지로 헬스클럽이나 등산같은 것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바깥 나들이는 좀 하시는 편입니까. 원래 조용한 성품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퇴임 후로 너무 움직임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상의 선영을 찾는 일을 빼고는 집안에서 쭉 지내고 있습니다. 갑갑할 때면 선영을 찾아 잡초를 뽑거나 앉아서 바람을 쐬곤 하지요. 그밖에는 바깥으로 돌아다닐 일이 없어요. 전직 대통령이 바깥 활동이라는 것을 하면 언론에서 무엇이라고 가십을 쓰고 귀찮게 하지 않습니까. 또 어디선가는 그걸 두고 이러쿵 저러쿵 수군대기도 하지 않아요. 보세요, 작년 여름인가, 저쪽(전두환 전 대통령을 지칭)에서 제주도로 피서갔다가 신문에 나고 난리 났지 않습니까. 노태우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서민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고 밝혔을 때,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 두겠는가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래요.
집 밖으로 나가면 말이 나고, 그러니 좋든 싫든 집안에 가만히 있는 시간이 많아요. 전직 대통령에게는 집이 일종의 수용소인 셈이에요』
―집안에서는 어떻게 소일하십니까. 적적하지 않습니까.
『오전에는 신문이나 책을 보고, 오후에는 가끔 손님들의 방문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최흥순 비서관에 따르면 崔圭夏 전 대통령은 오전 나절에는 조선일보 등 조간신문 4종을 꼼꼼히 읽는 데 할애하고, 오후에는 라디오 뉴스를 듣는 시간이 많고 이따금 찾아오는 전직 관료들이나 문중 사람을 만나고 있다고 한다)
―혹시 국민들이 전직 대통령을 너무 홀대하는 것 같아 섭섭한 감정은 없습니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업일 수도 있고…, 모두 제가 덕이 없는, 不德의 소치라고 생각해야지요』
―어르신께서는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됐을 때도, 모든 게 숙명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으며, 하기 싫다고 버텨도 안할 수 없다」고 측근에게 소감을 피력하셨던가요. 지금도 그렇게 보십니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역사의 격변기라고들 표현하는데 당시 만큼 엄청난 격변의 상황이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없었지 않아요. 한 나라의 통치권자가 재임 중에 시해되는 사건은 조선 5백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도저히 발생할 수 없는 그런 사건이 실제 일어났고, 그 사건을 수습하고 국가를 보위해야 하는 책임이 바로 저에게 떨어졌으니 숙명이라고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남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발생했으니, 그 직위와 책무를 계승한 사람으로서 어찌 마음이 무겁지 않았겠습니까』
―10개월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무엇보다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 같습니다. 안으로는 군부의 간섭을 받고, 밖으로는 재야와 학생들이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까. 사면초가이고 고립무원의 지경이었을 겁니다. 국정을 조감하는 위치에 있는 어르신의 편에 서서 힘이 되어준 원군이 없었던 셈입니다. 당시 한 언론인은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하려고 했으나 실권이 없어 고민만 하다 물러났다」고 지적했더군요.
『어느 대통령 치고 고독하지 않았던 대통령이 있었을까요. 대통령은 혼자서 책임지고 결단해야 하는 일이 많으니 그렇겠지요. 얼마 전 신문에 보니 김영삼 대통령도 고독하다는 심경을 토로했다고 하더군요. 나는 당시 주위 사람들이 어떠했다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 나의 不德함에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맡는 순간, 내가 꼭 이뤄내야 할 직무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남북 대치 상황에서 북쪽이 쳐내려오는 상황을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소위 국가보위의 책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계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집권자의 시해사건이 발생했을 때 뒤따르는 것이 내란(內亂)입니다. 아시다시피 로마제국의 시저가 친구인 브루터스에게 암살됐을 때 로마시는 한동안 피비린내나는 내란에 휩싸였습니다. 80년 당시 군부간에 내란이 일어났더라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내란으로 혼란스러운 정정(政情)은 남침을 불러올 소지가 됐을 겁니다. 셋째는 경제적으로 흔들림이 없어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2차 석유파동으로 우리 경제는 극도의 난관에 부딪힌 상황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만 해놓으면 나중에 후임자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퇴임 대통령으로서 在任시절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더욱이 저의 집권 기간에 대해 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 극한적인 위기를 피했다는 점에서 저 나름대로는 국가보위의 직무를 어느 정도 이뤄냈다고 생각합니다』
―내란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광주사태는 있었지 않습니까.
『광주사태는 아픈 기억이지만, 내란은 아닙니다. 내란은 예를 찾자면 남북전쟁과 같은 것이지요. 그것의 결과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극한상황을 피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려는 데는 필시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혹 당시 어르신의 뜻을 모르고 사사건건 반대 입장에 섰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정치 지도자에 대해서 야속한 마음은 들지 않습니까.
『제가 덕이 없음을 탓해야지요, 그리고 이제 와서 그분들에 대해 제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 당시는 서로 어쩔 수 없었겠지요. 역사 속에는 개인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이지요』
―12·12 당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 체포하겠다고 재가를 얻으러 왔을 때 9시간이나 버텼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렇게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연행 재가를 늦춘 점에 대해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지 않습니까. 이 자리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허용됐지 않아요. 언제 입을 열 시기가 올지는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다만 이와 관련돼 생각난 이야기나 하겠습니다. 지금껏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12·12에 대해 헤아릴 수 없이 보도했습니다. 우리 비서관이 그 보도내용을 모두 비교조사했더니 저마다 내용도 약간씩 차이가 있을 뿐더러, 사건이 벌어진 시각은 모두 맞지 않습니다.
가령 그날 밤 내가 전두환 소장과 만난 뒤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 조사에 대해 재가를 늦춘 시간은 9시간이 아니라 정확히 10시간이었습니다. 그날 밤 나와 전두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우리 둘을 빼고는 아무도 모를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어떠했다는 식으로 기사가 나오더군요. 그날 밤 나눴던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껏 그도 입을 연 적이 없었고, 나 역시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왜 말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대해 일일이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모르고 덮어두는 게 당사자를 위해서나 국가 차원의 이익을 위해서 더 유익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12·12에 대해서는 언론도 이제 쓸 만큼 썼으니,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보도가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리고 당시 상황을 왜 그리 흥미 위주로만 바라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최흥순 비서관은 崔 전 대통령에게 들은 적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12·12 그날 밤 최대통령은 전두환씨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조사를 위해 총리실 공관으로 재가를 받으러 왔을 때, 이를 군부 내의 파워 게임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통령은 보다 신중한 상황 판단을 위해 군부의 속사정을 알고 있는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았다. 그러나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은 이미 피신한 뒤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또한 총리실 주변은 이미 신군부 측의 병력에 의해 장악돼 외부에서의 접근이 통제된 상태였다. 崔대통령의 당시 결정은 군부 내의 세력다툼이 외부로 확산돼 내란이라는 더 큰 불상사로 치닫는 것을 우선 막는 데 있었다. 물론 崔대통령이 사태를 장악할 힘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언론 보도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도에서 얼마간의 추측과 과장, 왜곡이 생기는 것은 어르신처럼 말씀해 주셔야 할 분들이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을 지냈던 입장은 다릅니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건에 관련된 퇴역 장성들은 지금 두 패로 나눠 대립 분열하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들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양쪽 다 개탄스럽습니다. 그 당시 상황이 어쩌면 모두 지나가는 역사의 흐름인데, 지금 와서 검찰에 고발을 하고 국회에서 조사를 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내가 증언을 하면 양쪽 중 어느 쪽에서는 불이익이 될 것이고, 그러면 나에게 원망을 돌리거나 나의 증언이 편파적이라고 믿지 않으려 들 것입니다. 가뜩이나 하등 건설적이지 못한 이런 분란에 나까지 가세하면 채신없이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나는 대통령을 지냈던 몸으로서 그 누구도 나의 통치행위와 관련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흘러간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요즘 바깥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대해 들어보자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면서 냉해로 인해 농작물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라고 물었다.
―88년 국회 광주특위 때 어르신께서 끝내 국회 출석을 거부한 데에 대해 비판 여론이 많았습니다. 국정 책임자로서 마땅히 역사의 증언대에 서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물론 어떤 이들은 어르신께서 자신의 불참 의사를 관철시킨 것에 대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체통을 그나마 지켰다는 평가도 하더군요.
『전직 대통령으로서 재직중의 일로 인해 국회에 출석 증언하는 것은,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국가 경영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대통령이 퇴임 후 자신의 통치행위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고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先例가 만들어지면 그것은 장래 국정을 운영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은 이러한 선례를 만들어 후대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권리가 주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도 역대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로부터 수 차례 소환을 당하고 했지만, 이에 응해 불려나갔던 예는 아직 없었습니다. 요즘 또다시 국회에서 국정조사라는 이름으로 전직 대통령의 출석을 요구하고 있더군요. 이는 3권분립의 원칙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만약 거꾸로 행정부 쪽에서 국회를 간섭해, 걸핏하면 국회의원을 불러 의원활동에 대해 조사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르신께서 증언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기가 현대사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재임기간 동안 발생한 상황변화에 대한 주요 내막은 은폐된 채로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전두환씨 등 신군부에게로 정권이 넘어간 과정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저는 물론이고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입니다.
『그때 일은 묻지 마세요.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지금껏 어느 자리에서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때가 오면 말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고 싶습니다. 당시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게 된 것은 신군부측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을 대세라고 해야겠지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나는 취임할 때부터 그랬지만 대통령직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私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국가보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초래하지 않는다면 누가 대통령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나는 과도기를 맡은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했으니, 물러갈 때가 됐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몫은 했다고 봤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맙시다』
―그러나 재임기간이 너무 짧아, 개인적으로 미진하고 아쉬운 부분도 있었을 겁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그 정도로나마 내 소임을 마칠 수 있었으니 다행이지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후임자 전두환씨에 대해 아무래도 언짢은 감정이 생기겠습니다.
『허허, 내가 중학교 여학생입니까. 그런 마음을 가슴에 얹어두게. 적이니 원수니 하는 말이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맙시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역대 대통령에 대한 설문조사 등을 보면 어르신께서는 업적이나 자질 등에서 제일 낮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나름대로 위기 관리를 해냈던 부분에 대해서는 재평가도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직을 맡았던 기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평가라고 할 게 있겠습니까. 지금 나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냐에 대해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요즘 역사책을 보니 2백년 전, 3백년 전 인물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더군요.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들이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겠지요』
―회고록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척이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글쎄요, 쓰게 되겠지요』(崔비서관에 따르면 최 전 대통령은 회고록 집필에 들어간 상태라고 한다)
―과거 군사정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정부가 하고 있는 일련의 개혁조치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여기에 대해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논어에도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정사를 논하지 말라(不在其位不謀其政)」고 했습니다. 전임 대통령이 뭐라고 말하면 현직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부담을 주게 됩니다. 현직 대통령께서 함께 상의를 원하면 말할수는 있겠지요. 그리고 요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역사란 일정 시기에서 연속과 불연속의 중복 같아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하나의 큰 흐름으로 흘러내려오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崔 전 대통령은 원하는 답변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고, 기자는 어려운 자리를 허락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문간에서 『오늘 만난 것을 기사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기자는 직업상 좀 곤란할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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