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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드라마 서울1945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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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와 역사왜곡 스크랩 광주사태 피해 국군장병 보상 약속한 원희룡 의원
역사학도 추천 0 조회 48 06.11.22 15: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주사태 때 북한군 특수부대와 폭도들에게 희생당한 국군 장병
보상 문제를 챙기겠다고 원희룡 의원이 엄숙하게 약속하고 있다.



광주사태 때 희생당한 국군 장병 보상 문제를 챙기겠다고 약속하는 원희룡 의원의 음성

    만약 광주사태 기간을 1980년 5월 18일부터 26일까지로 잡는다면 그 기간 내에 폭동진압을 목적으로 광주시에 진입한 계엄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처음에는 광주시위대와 광주경찰간의 충돌이었으며, 계엄군이 최규하 대통령 재가로 폭동진압을 위해 동원된 시각은 5월 27일 새벽 단 한시간 뿐이었다.
  
   원희룡 의원은 광주 출신이기에 광주사태 당시 광주향토사단(31사) 사단장 정웅 소장에 대해 잘 아실 것이다.  2000년에 광주일보가 최종 확인하여 보도한 바에 의하면 광주사태 당시 폭동 진압은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와 광주경찰서장의 요청으로 정웅 소장이 단독으로 결정하여 내린 명령이었다.  

   원희룡 의원은 광주 출신이기에 광주사태 당시 광주향토사단(31사) 사단장 정웅 소장의 군부 내의 지위에 대해 잘 아실 것이다.  그는 1950년 장교 군번으로 당시 현역 장성 중 가장 선임 군번이었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장성들 세계에서는 군번순이 상하를 정하기에 정웅 소장 위에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었던 인물이 없었으며, 1980년 5월 18일 오후 5시 30분 폭동진압작전은 광주시장과 광주경찰서장과 전남도지사의 지역치안 협조 요청에 의해 정웅소장 단독으로 결정하였다 [2000년에 광주일보가 최종확인하여 보도한 사실].

   광주시장과 광주경찰서장과 전남도지사가 정웅소장에게 폭동진압 요청을 한 이유는 그 시간대에 광주경찰이 이미 시위대의 폭동에 궤멸되어 있었으며, 수십 명의 경관이 시위대에 묶인 채로 끌려가 각목으로 맞고 있었고(사망자도 생겼음) 나머지 순경들은 모두 광주 외곽으로 도망갔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웅 소장은 광주 치안 유지에 협조하는 것도 광주향토사단장의 책임이라 판단하고 31사에 배속된 2개 대대 공수부대원들에게 폭동진압 명령을 내렸으며, 이를 위해 상부 지시를 받거나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일에 시위가 오히려 더욱 격해졌으며 5월 18일 시위진압이 너무 강경하였다는 시민들의 항의가 있자 5월 19일에야 육군본부에 상황을 알렸으며, 광주향토사단 병력으로도 치안 유지를 하기 힘든 상황을 알렸다.  그런데, 그날 상부의 도움을 더욱 간절하게 요청한 기관장은 광주시장이었으며, 따라서 내무부장이 더욱 진지하게 상황을 점검하면서 육본에 도움을 호소하였다.  당시 시위구호가 "최규하 대통령 하야!  신현확 총리 퇴진!"이었으며, 그날 오후 시위대의 요구에 굴복하여 신현확 총리 내각이 총사퇴하고, 5월 21일 전남도청이 무장폭도들에게 점령당함에 따라, 광주폭동진압 지휘권이 광주향토사단과 내무부로부터 계엄사로 이관되었다.

   그럼에도 5월 27일 이전에는 계엄군이 폭동진압을 목적으로 광주에 진입한 일이 없었다.  광주사람 정웅 소장의 병력 지원 요청으로 5월 20일부터 타 지역 병력이 도착하기 시작했으나, 지휘권은 광주향토사에 있었기에 광주향토사에 배속된 병력이었다.  그러나, 탄약고만은 폭도들에게 탈취되지 않게 해달라는 내무부 요청과 국방부 장관 지시에도 불구하고 정웅 소장이 탄약고를 지키지 못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시위대에 전남도청을 넘겨준 채 광주외곽으로 병력을 철수시켰기에 그 다음날 정웅소장 직무가 정지되고 그때부터 폭동진압작전 지휘권이 계엄사로 이관되었던 것이다.  여기 폭도들이 광주향토사 병력을 사살할 때 사용하던 총기 사진이 있다.  도청을 경비하던 군인들을 장갑차로 깔아죽이고, 마구 사격하였으므로 군인들은 모두 철군하였으며, 계엄군은 시민군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광주로 진입하지 않고 외곽에 머물러 있었다.



   광주사태 희생자에 대하여 말할 때 실제로는 그 희생자들이 광주외곽에서 많이 있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희생자들 대부분이 시민군 총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탄환이 시민군 총에서 발사된 탄환이었으며, 등 뒤에서 쏜 탄환이었다.  무장 시민군이 광주 외곽 경찰서들을 매일 습격하였으니, 무장 폭도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인근 지역 경찰서 습격과 무기 탈취 때문에 계엄군이 출동하여 막아야 했으며, 그 교전에서 생긴 희생자들도 간혹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군의 임무는 나라를 지키는 것인데, 무장 폭도들이 전라도 각 지역 경찰서들을 습격하여 무기 탈취하는 것을 방치하여야 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가?

   더구나, 무장폭도들은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물러나고 정권을 자기네에게 넘겨달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있었다.  그럴 때 정부는 무장폭도들에게 정권을 넘겨주든가 아니면 나라를 지키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5월 25일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대통령은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할테니 무기를 반납하여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무장폭도들은 정권을 넘겨주기 전에는 무기를 반납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래서 그 다음날 26일 최규하 대통령이 계엄군의 폭동진압작전을 재가하였으며, 그 재가가 내려진 직후였던 5월 27일 새벽 단 한시간 동안만 계엄군이 광주시에 진입하여 도청진압작전을 실시하였다.

   자, 여기서 광주사태 책임론에 대한 판단은 당시 최규하 대통령의 고뇌를 이해하여야만 가능하다.  만일 당시 최규하 대통령이 폭도들의 요구대로 정권을 무장폭도들에게 이양하여야 민주화라고 원희룡 의원이 주장한다면 그것은 민주화의 말뜻을 모르는 것이다.  적어도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민주화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음을 여러번 밝히신 바 있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의 침묵은 그날의 충격 때문이었다.  정권을 넘겨주기 전에는 무기를 반납할 수 없다는 자들과의 대화적 해결은 불가능하였다.  이렇게 대화적 해결방법이 꽉막혀 있었던 상황에서 도청진압작전 재가를 하여야 하셨으며,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원희룡 의원의 고견을 잠시 물어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이 광주사태 일으키기 이전에(본래 그 거사일이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김대중이 도모한 것은 전국적 민중봉기였음)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 하야시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된 후에 임명할 내각 명단을 미리 짜놓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당시 광주 벽보에는 민주인사들에게 정권을 넘기라고 적혀 있었는데,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를 경우 폭동 주동자들이 민주인사라는 의미가 되며, 더욱이 폭동 주동자들과 김대중의 조각 명단과 겹칠 경우 시위 지도부에 정권을 넘기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이다.]

   광주사태 기간 중에 폭동 진압 목적으로 광주에 진입한 계엄군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확인해 보시면 금방 아실 수 있는 사실이다.  시민군이 사용한 실탄 수로 미루어 보아 시민군은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하루 평균 2만 발의 발포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계엄군 편에서는 최규하 대통령 재가가 있던 5월 26일 이전에는 실탄이 지급된 사실이 없다.  그럼에도 무장 폭도들이 광주 인근 자역의 경찰서들을 습격하고 경찰이 스스로 무기고를 지키지 못할 때 동원된 계엄군은 별도로 하여야 하며 광주 외곽의 사건들이다.  오로지 5월 27일 새벽 단 한시간 동안만 도청진압작전이 실시되었었으며, 무기를 반납하고 귀가하라는 방송을 수차례하였었다.  그리고 실제로 귀가한 이들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으며, 시민군 편에서 먼저 사격하니깐 이번에는 최규하 대통령 재가로 자위권이 있었던 계엄군도 같이 발사하여 양편 총 사망자 수가 15명이었다.  

   광주사태 때 무수히 많은 군인들이 죽거나 평생 불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명예만은 회복되어야 한다.  원희룡 의원은 광주 출신이시니깐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 전체를 한순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8톤 분량의 TNT 폭발장치를 5월 22일 도청 지하실에 설치한 사건을 잘 아실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1996년 10월 10일자 광주일보(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news/sagun/b/kwangju_961010.htm )에 간략하게 보도되어 있으며, 좀 더 상세한 자료가
http://blog.daum.net/sionvoice/1835548 에 있다.  
  
   아마, 여기서 원희룡 의원은 광주를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폭발물 설치자는 광주시민이었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는 광주시민 중에 그런 악의를 가진 이는 없으며, 광주시민이 광주를 불바다로 만들려 하였다고 우기는 것도, 광주시민은 그런 엄청난 폭발물을 금장 제조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도 광주인의 명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참으로 광주시민이 그런 폭발장치를 설치했다면 언제 터질지 몰라 마음 졸이며 계엄군에 뇌관 분리 요청을 하였을 리가 없다.  폭탄 제조자가 그 뇌관 분리 방법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여하간 지금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야 할 사실은 (5월 27일 새벽을 제외한)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단 두 명의 계엄군만 광주시에 진입하였었으며 [광주시와 광주경찰서와 전라도지사가 광주향토사에 공식 요청하여 진행되었으며, 광주향토사에 지휘권이 있었고 광주사람 정웅 소장이 지역 치안 유지 목적으로 지휘하였던 5월 18~21일간의 진압작전은 계엄군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다 정확함] 그 목적은 자기 목숨을 걸고 8톤의 폭약 뇌관을 일일이 분리하여 70명 광주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삼중으로 목숨을 거는 작업이었다. 첫째로, 8톤의 폭약 중 어느 뇌관이 언제 폭발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며, 둘째로 시민군 몰래 작업해야 하므로 꼬박 식사를 거른 채로 이틀간 진행해야 하는 작업이었으며, 시민군에 발각되면 즉각 처형당하는 위험이 있었다.  뇌관은 모두 성공적으로 분리되어 70만 광주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었으나, 한 명은 발각되어 시민군에게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광주사태 기간 동안에 광주시에 단 두 명의 계엄군만 진입했었으며, 그 목적은 위험한 폭탄 뇌관을 분리하여 광주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으며, 그 작전 중에 한 명이 시민군에 처형당하였는데도 소문은 광주학살로 났다.  그런데 비무장 민간인 차림으로 도청 지하실에 진입하여 목숨 걸고 광주 시민 생명을 구한 것이 어째서 광주 학살이란 말인가?  오히려 무장 시민군에 죽임을 당하고도 역사에 학살자로 기록되며 그 분의 무덤은 여전히 쓸쓸하게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광주사태 당시 희생당한 군인들 한 분 한 분에게 이러한 사연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원희룡 의원의 약속에 큰 기대를 하였던 것이다.  위의 오디오에서 우리는 2005년 3월 18일의 약속을 지금도 생생하게 듣고 기억하건만 억울하게 희생당하고도 억울한 누명을 쓰신 우리 국군 장병들을 위해 챙겨주시겠다던 법안 소식은 여전히 안들리기에 그날의 약속을 오늘 이렇게 상기드려 본다.  우리는 원희룡 의원님이 시청자들과 국민에게 한 약속을 어기기 위해 공영뱡송 토론회를 제안하고 출전하시는 분은 아니라고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http://study21.org/photo/51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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