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
빌1:1-11 190722 새벽기도
새 찬송: 314, 315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썼던 옥중 서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 서신을 보낸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옥중에 있는 자신을 위하여 헌금을 보내주는 것은 물론 여러 방면에서 자신을 염려하며 힘써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또 교회에 자기의 근황을 알려서 교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교회에 보냈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빌립소서에는 다루는 주제가 첨예하지 않고 삶의 보편적인 주제를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1,2절은 바울이 빌립보에 보내는 서신임을 밝히는 내용과 독특한 형식의 축도를 인사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바울이 자신을 사도됨을 증명하던 다른 서신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주목해야합니다. 다른 서신서들에는 바울이 자신이 사도됨을 강조하는 인사말로 시작하지만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자기를 사도라고 강조하지도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권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하거나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어느 도시라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다르게 한 것은 아니지만 빌립보 교회는 특별히 바울을 존중하였습니다.
바울은 또한 이 부분에서 자신과 함께 디모데를 이 서신을 보내는 사람으로 기록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 전도에 나섰고, 그 디모데를 다시 빌립보에 파송할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이 자신과 디모데를 공히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표현했습니다. 바울 자신만을 사도로, 혹은 예수의 종으로 표현한 것과 다른 점은 디모데 외에 다른 사람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입니다. 목회자만 예수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다 예수님의 종입니다. 여러분도 스스로가 그리스도의 종되심을 인정하여야합니다. 종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해야하지만, 또한 우리가 그분께 속함으로써 더 이상 심판과 정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 편지를 받아 볼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1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 감독들과 집사들이 이 편지를 읽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감독은 오늘날로 하면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빌립보교회가 벌써 여러 명의 장로와 집사를 세울만한 교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처음에 자주색 천을 파는 루디아의 가정에서 시작되었고, 귀신들렸다가 고침 받은 여종, 빌립보 감옥의 간수 등이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맡아서 돕는 그야말로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 비결을 본문에서 찾는 다면, 바울과 디모데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었듯이 그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바른 성장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감사는 무엇이었을까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교회를 세운 바울에게 빌립보교회는 늘 염려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적으로 보면 빌립보에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며, 그 한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위해 헌신하면서 믿음으로 자라가는 것이 눈에 보이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려고 하면 기쁨이 넘쳐서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인들이 참여한 복음을 위한 일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바울이 사역하는 일에 적극 동참했던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바울이 선교에 나갈 수 있도록 물질로 후원하는 일은 물론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을 알렸을 때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면 사람을 파송하여 끊임없이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를 따라서 그야말로 전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하고 말았던 것이 아닙니다. 현대 교회의 선교는 몇 년 동안 선교사를 지원하고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선교 지원을 끊어버리는 방식입니다. 그러다보니 선교사가 후원교회에 더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교지의 대상자보다 후원자 관리가 더 중요한 사업으로 변질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선교사인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 더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것에서 참 복음 전하는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성도를 구원하시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늘 빌립보 성도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고, 또 감옥에 갇혀도 빌립보 교회는 늘 바울과 함께 했음을 바울이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 속에 빌립보 교인들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다는 말은 그들을 늘 사모하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8절에 보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또 9-11절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 내용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물질이 풍성하고, 교인 수가 풍성한 것보다 사랑이 풍성한 것이 교회의 생명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지금의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말세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또한 성도들이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줄 알고, 진실하여 허물없이 말세에 이르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성도를 위하여 하는 기도를 보면서 저의 기도가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는 그저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성해지기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고, 바울이 했던 기도들 중의 한 두가지를 흉내 내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바울의 기도를 배워,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에 참된 영적 유산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