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복음
빌1:12-18 190723 새벽기도
새 찬송: 317, 320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이 편지에서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로 인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나는 괜찮다 정도의 위로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있게 된 것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후 61-63년까지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투옥은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복음 전파에 상당한 지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증거에 누구보다도 협조적이고, 끝없이 복음 증거를 후원하던 빌립보 교회는 매우 염려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염려는 다시 바울에게로 전달되었습니다. 교인들이 바울의 개인적인 형편은 물론이지만 바울의 투옥이 복음 증거 중단으로 인식하고 염려하고 있음을 바울이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인이 아닌 그 누구라도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던 바울의 투옥으로 말미암아 복음 증거는 당분간 멈출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오히려 복음 전파에 진전이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을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서신을 통해 위로하려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빌립보교인들의 바울에 대한 염려는 바울의 육신의 고통을 안타까이 여기는 염려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복음 증거가 중단될 것에 대한 염려도 있었고 바울은 바로 그들의 이러한 복음에 대한 염려를 덜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은 로마의 온 경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밀착하여 감시하는 군인들이 배정되었습니다. 군인들은 근무시간에 따라 교대로 바울을 지켜야했습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바울로서는 이렇게 복음 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까? 군인들은 상관의 명에 따라 바울 주변을 떠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기와 단 둘이서 있게 된 군인에게 당연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삶으로 교대되어 자신에게 오면 바울은 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청중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효과와 이렇게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의 경중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로마에 도착하지마자 황제에게 재판을 청구하는 바람에 황제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2년 넘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갇힌 가운데서도 복음 전할 기회를 만들자 많은 형제들이 이것을 보고 조금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도 복음을 증거하다가 갇히게 되면 복음 전도에 크게 방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예를 보니 갇힌다고 해서 복음을 못 전할 이유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 증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는 갇힐 것을 두려워해서 복음 전하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담대함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본을 보임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힘이 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의미의 동기 부여가 되었습니다. 로마에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나 이미 교회가 세워져있었습니다. 로마 교인들 가운데는 직분을 받은 교회의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바울의 존재는 복음 증거에 헌신하는 사도라는 든든한 지원자 같은 느낌을 주었으나 한 편으로는 복음증거의 주도권이 바울에게 가는 것이 섭섭한 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평생 헌신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을 능가할 전도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비하면 그들은 전도의 실적을 내보지 못한 사람들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그들은 더욱 열심을 내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러 다녔습니다. 바울이 갇힌 것이 그들에게 동기부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의 투옥은 어떤 이들에게는 바울의 몫까지 열심히 하자는 선한 뜻으로 뭉치게 하였고, 어떤 이들에게는 바울이 풀려나기 전에 자기들이 전도한 성도를 하나라도 더 늘려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따져보면 바울에 대한 시기 질투가 복음 전도라는 행동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옥에서 자기들의 활동을 보면 괴로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 증거를 못하니 바울의 로마교회에서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것을 괴로워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들의 어리석은 선입견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누가 바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든 바울에게 괴로움을 주고 싶어 했든 관계없이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였습니다. 바울은 겉 치례를 위해 복음을 전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은 칭찬할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비록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시기와 분쟁이 동기가 되어서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시기와 분쟁이 동기가 되는 복음 전도는 교세확장 경쟁을 벌이는 현대교회에서 빠져서는 안 될 우입니다. 복음 증거는 특히 전도 대상자가 복음으로 구원받는 일 때문에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전도 활동으로 인한 다른 유익을 목표로 하는 것은 얼마나 유치한 일입니까? 우리 가운데서 그런 일은 없어야할 것입니다.
바울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이 바울 자신을 염두에 두고 전도 경쟁을 벌이는 것을 책망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남게 되느냐는 평판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지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받게 하고 싶은 바울의 입장은 자신을 부인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니 바울의 생각의 넒이가 훨씬 좁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용력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가 복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좀 더 관심을 두어야할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를 대적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자들의 열심을 보면서 칭찬했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 활동 모든 영역이 나 자신의 체면이 아니라 오직 복음 증거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