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들이 가진 독특한 희망 가운데 하나는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다. 다른 어느 종교도 이토록 땅에 대한 행복한 삶에 대해 강하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증인들에게 1914년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연대이듯, 이 땅에 대한 소망은 매우 독특한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와 증인들을 구분하는 것이 되게 한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꿈 꾸어야 할 미래는 무엇일까? 하늘에서의 삶일까? 아니면, 많은 증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다수 인류가 꿈꾸어야 할 미래는 이 땅에서의 삶일까? 이 문제는 증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클리어하게 성서에서 설명해 주는 듯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증인들이 말하고 인용하는 땅의 희망에 대한 성구들은 매우 애매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혹자는 이미 증인의 한 사람인 내가 이런 소릴 하면 다소 놀랄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지금 부터 하는 말은 땅에 대한 희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도 성경 가운데서 땅의 희망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고, 적어도 나는 그 부면과 관련해서 과거에는 매우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말이 나와서 얘기지만... 나도 수개월 전까지만해도, 진실과는 상관 없이 내가 살아야 할 곳은 [이 땅]이었으면 했다. 지금은 어떠냐고?^^ 글쎄..^^ 지금은 그렇다. 땅에서의 삶이든 하늘에서의 삶이든... 내 삶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을 거라고는 분명히 생각 한다. ㅎㅎ 그렇다고 내 삶이 끊어지지 않으면서 지옥이라는 찜질방에서 끝도 없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내 삶은 끊어지지 않으면서, 문자적이든 상징적이든...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흥미진진하고 가슴 벅찬 끝없는 여정을 보낼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정도 개인적 결론이 나긴 했지만, 사실... 이제 내게 땅에서의 삶이냐 하늘에서의 삶이냐는 과거처럼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은 어떤 형태로든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담이지만....ㅋㅋ 만약, 내가 나의 삶을 창조하고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인간의 몸과 신성한 영의 몸을 모두 오갈 수 있는 [초탈]의 존재가 되고 싶다. 인간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넘나드는 천사들 처럼 말이다.^^ ( 소설을 쓰는 것처럼 들리는가? ㅎㅎ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어쨌건, 다른 것은 다 치우고... 이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증인들이 말하는 이 땅에 대한 희망과 관련해서는 매우 애매한 점들이 많이 존재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것들 보다, 나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추고 싶은 거다.
히브리어 성서 가운데서 [땅의 생명]에 대한 약속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자. 적어도 증인 식으로 설명한다면......이사야 11장이나, 35장, 55장,... 그리고 히브리어 성서에 전체적으로 들어 있는 [땅에서의 삶]은 모두가 한결 같이 [이중적 성취]가 적용되는 구절들이다. 즉, 문자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숭배의 번영에 대한 약속이 일차적 성취이고 더 큰 성취는 미래에 있을 일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증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이중적인 성취가 있는지.. 삼중적인 성취가 있는지를 판가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바로 그 [애매함]이 있다는 것이다.
글들을 보면, 땅의 희망에 대해 [영원히~ ] 라는 단어와 [영영히~] 라는 단어가 쓰인 곳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증인들은 이 점을 들어 이것은 [땅에 대한 영원한 생명]을 의미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맞는 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1차적 성취인 육적 이스라엘에게는 이 부면이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하고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자적 이스라엘에게 성서의 [회복 약속]이 성취된 것은 사실이며, 그러나... [영원히]라는 표현은 두가지 의미에서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는 그들이 하나의 [무리]로서 자신들의 주권을 [계속적으로]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증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인 [한정 없는 기간] 혹은 [예측할 수 없는 기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시편 37편에 나온 [의인이 땅을 차지하고 영원히 거할 것이다.]라고 표현된 부분에서 사용된 [영원히]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단어[아드]는 문자적인 [영원함, 끝없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면 된 것 아니냐고.... 이 성구가 의인들의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 [의인]이라는 말이다. 여기서의 히브리어 [트사딕]이라는 말은 단순한 [의]를 가리키는데 더 흔한 말이다. 즉, 의로운 사람 [개인]인지 아니면, [의] 자체가 땅에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살펴본 대로, 히브리 11:16과 전후문맥은 증인들이 땅에서 살 사람이라고 그렇게나 철썩같이 믿고 있는 아브라함이나 사라 같은 사람들이 하늘에서 살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리토론방(증인관련) 76번 글 참조)
누군가는 말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것만 봐도 사람들은 [땅]에서 영원히 살도록 만들어 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사실, 사람만 죽음을 원하지 않는게 아니다. 동물도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만약,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 관념 때문에 사람의 [땅에서의 영원성]을 설명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동물에게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심지어 식물에게도 있는 삶에 대한 집착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한가지만 더 묻자. 하늘에서의 삶을 바라보는 적은 숫자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땅에서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본디... [존재]라는 것은 [무존재]로의 회귀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더구나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 것인지 경험해 보지 못한 [지각있는] 인격체인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강렬한 것일 수 있다.
또, 누군가는 말한다. 애시당초 창조주의 목적이 사람을 하늘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면 사람은 왜 처음부터 땅에서 살게 되었는가? 라고 말이다.... [처음]이라고?.. 당신은 당신의 삶이 지구에서가 처음인지 아닌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단지 과거의 기억이 없다고 과거가 존재하지 않는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기였을 때나 어렸을 때 기억이 없다 하여 우린 그 시절이 없다하지 않는다. 증인식대로 설명하자면, 예수께서도 침례받으시고 올라오실 때인 기원 29년까지 하늘에서의 온전한 기억이 없었지 않았는가?
^^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가 윤회나 전생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솔직히 나는 윤회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증인들이 그야말로 [땅에서의 생명]을 설명하려면..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를 사용하여 설명하려면, 이중..삼중적인 성취라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우리의 삶과 관련된 [땅에서의 영원한 삶]에 대한 뚜렸하고 믿을만한 구체적 성구들이 설명되어야 하고... 증인들이 땅에서 살 사람들이라고 설명하는 과거의 사람들은 절대로, 절대로 하늘에서의 상을 바라보면 안되는 것이다.
순수하게 성경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들에 대해....설명이 미흡한 것으로 드러나면, 사람이 가진 본능에 호소하고.... 사람이 가진 두려움에 논리를 호소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이제 이쯤 되면^^ 좀 짜증이 날 만도 하다^^.. [그래 너 니고데모는 그러면 결론이 뭐냐? 지상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거냐 없다는거냐?]
이 문제는 .... 나중으로 조금만 미루자... 게다가 여기다가 교리적인 색을 입히면... 분명히 얘기가 길어질게 뻔하고 적쟎은 논란이 일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증인들이 말하고 있는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정립된 가르침에는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 다소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는 얘기다.
진정한 우리의 희망은 땅일까? 아니면 하늘일까?^^
첫댓글 어렵네요...땅일까 하늘일까...영혼이 있을까 없을까...윤회와 전생이 있을까 없을까...원하는것만 골라서 믿으면 참 좋을텐데...
니고데모님 글 오랫만에 봐서 그런지 더 반갑네요~~저는 여호와와 그의 아들 예수께 믿음을 두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발견한 다음부터는 교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접기로 했습니다. 저번에 죽음님 말씀처럼 삼위일체를 믿건 안믿건 주님이 보시기엔 다 똑같은 인간이라고 저도 생각하거든요....저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의 보상으로 땅에 살던 하늘에 살던 어떤 식의 구원을 받게 될지는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하지만 니고데모님의 글을 읽는 것은 분명히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
진리는 단순하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믿음이겠지요. 전 사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영역은 어차피 창조주의 영역이니까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실 땅이냐 하늘이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할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땅도 하늘의 일부가 될 것이니까요...성경에서 말하는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들은 실상 동일한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늘이나 땅이나 하나님의 왕국의 일부이며 구분해서 이해할 것까지는 없다고 보는데요.
하늘에서의 삶이냐 땅에서의 삶이냐를 극명하게 구분하는 것은 증인들의 가르침 이지요...그리고 만약, 그것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면... 구원에 대한 희망은 모든이에게 결국 한 가지 동일한 형태일수도 있다는 귀결이 나게 되구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서가 두가지 형태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느냐 아니냐 인 것 같습니다. 만약, 성서에서 이 점을 구분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견해와는 상관없이 구분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되구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역시 구원을 보는 견해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 되니까요.
부활 하시어 하늘로 올라가실 예수께서도 인간이셨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신것인지 질문 드립니다
어려서부터 배우고 들은 바로는, 예수께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신성모독]이라는 수치스런 죄목에 의해 매질을 당하고 돌아가셔야 하는 그분의 상황에 대하여 매우 큰 번민이 있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할만 하시어든, 이 잔을 내게서 멀리하여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라든가,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지는 일(혈한증)이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기인했다고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죽음에 대해 인간적인 두려움이 있으셨는지는 잘 모르겠네요.제 지식이나 생각해야 할 관할 밖의 일인 것 같습니다^^그리고 성서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 점을 우리가 일부러 추리해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견해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말로써도 어느 정도 그의 심정을 생각해 보곤합니다 답 글로 설명하겠습니다 ㅋㅋ 답글 권한이 없네요 다른 곳에 써죠
마음을 열고 함께 생각 하도록 만드는 힘이있는 니고데모님의 글...이번글은 끝에서부터 거슬러올라가며 읽어보기도하고 다시읽어보고 ..다음날또 읽고..나도 한 독해^^ 한다고 생각했는데..어려워도 님의 그 열린사고가 한없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냥 단순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범죄한 첫 조상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땅에 살게된 인간일 뿐이라고...또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1장1절 에서처럼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분 그것이 모두라고 할수는 없는 것인가요 성경에서 생략하고 다 알려 주시지않은 부분도 있다고 생각 할수도 있는건가요
물론, 성서에서 알려주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는 저도 공감하네요. 하지만, 적어도 이 카페 내에서는 우리가 논해야 할 방향이 여러 가능성에 대한 다각적인 합리성 보다는 성서에서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에 한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이 카페의 목적에서도 알려주는 것처럼 이 카페는 [성서를 하느님의 권위로 인정]하는 것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저도 많은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 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커다란 빛 덩어리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창조주 혹은 창조의 힘에 의해 우리 모두가 각각의 개별적 존재가 되었을 때부터 우린 영원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들은 아닐까? 혹시, 우리는 인간 이전의 삶의 기억들을 잃어버린 존재들은 아닐까? ㅎㅎ~ 별별 생각들을 다 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린 그져 성서를 가지고 있을 뿐이고... 이 카페는 성서의 내용을 하느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진 것이라고 인정하는 카페 입니다. 여기엔... 우리 모두의 암묵적 동의가 있는 것이지요..^^ 거기엔 어떠한 부가적 이의도 없는 것이지요. 유사 진리라고 불리는 어떤 것도 가능한 한 끌어들이지 않을 때, 질서와 일관성이 존재 할 수 있는 곳이지요. 일단 이곳에서는 그 일관성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