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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대학을 들어감과 동시에 정규파이오니아를 했다. 그 당시 나에겐 학교행사는 뒷전이었고, 매일 터미널봉사와 회중일이 우선이었다. 대학1학년 때, 처음으로 성경을 통독했었고, 영적인 일이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내가 있었던 광주 SL회중.. 가족적인 우리회중은 유난히도 청소년들이 많았었다. 막 중립에서 나온 내 연구사회자였던 JJ형이 청소년 대표가 되어 자주 모여서 놀고, 축구도 하고 재밌게 지냈었다.
그 당시에 광주에서 터미널에 가면, 여러 회중들에서 온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봉사를 하곤 했었다. 그 곳은 봉사시간을 채움과 동시에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사교의 장이었다. 같은 회중의 착하디 착하기만 했던 친구 JY, 예전 아웃사이더 카페의 쥔장이었던 JH, 고등학교, 대학교 1년후배였던 SH 등등.. 이들은 나와 봉사파트너임과 동시에 친한 벗들이었다. 대학교에서는 MT, OT도 안가면서, 나는 회중일이라면 발벗고 나서고, 증인친구들과 봉사하는게 인생의 낙이었다.
당시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유난히도 증인형제자매들이 많았었다. 학교에서도 나는 증인 형제들과만 어울렸다. 그중에 나중에 내 1년 후배로 들어온 SH는 교양수업도 같이 수강신청을 할 만큼 나와는 붙어 다녔다. SH는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셨고,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 침례를 받은 아이다. 그 얘는 믿음이 대단했었고, 전공이 중국어여서 나중에 중국으로 특파를 갈 계획을 세웠고, 실제 나중에 중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얘는 믿지 않는 군인 아버지 때문에 중립을 미루다가, 남들보다 몇 년 늦게 중립을 들어갔었다. 증인을 그만둔 상태에서 난 그 아이가 보고 싶어서 한번 나 혼자서 면회를 간 적이 있었다. 그 얘는 내가 그만 뒀다는 말을 이미 감옥 안에서 들었고, 그것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얘는 차갑게 나에게 말했었다.
“난 형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 형의 모습은 너무 실망스럽군요”
난 어쩔 수 없이 씁씁하게 면회장을 빠져나갔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아무튼 대학을 올라와서 좀 더 자유롭게 봉사하고, 회중 일을 돌보는 즐거운 인생을 살던 중 어느날... 회관에 있는 오래된 예전 파수대를 뒤지다가 제명처분에 해당하는 죄에 대해 다룬 기사를 보게 되었다. 난 사실 중학교 2학년 때 침례를 받고, 중학교 3학년 때 짧지만 이중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까지 이방인 친구들을 끊지 못하고, 잘 어울렸었는데, 그러다가 한 이방인 여자애를 짧게 사귄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음행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어 우발적으로 그 아이와 스킨쉽을 좀 진하게 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난 중학교 3학년 그 어린 나이에 그게 제명처분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혼자서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용서해 줄 것을 간구했다. 그러다가, 협회출판물들에서 이중생활을 멀리 하라는 기사들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방인친구들과는 멀어지고, 증인친구들과만 어울리고 골수 증인으로 변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래된 70년대 파수대는 음행뿐만 아니라, 내가 했던 이성간의 스킨쉽도 제명처분에 해당하는 죄라고 명시하고 있었다. 잊고 살았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고 몹시도 죄책감에 시달려서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잤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각오를 하고, 내가 존경했던 주임감독자B형제에게 중학교 3학년때 있었던 일을 한참 시간이 흐른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백하게 되었다. 뜻밖에도 B형제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그동안 영적으로 열심히 한 것을 보니, 하나님께서도 자네를 용서하신 것 같네. 이미 오래전 일이니, 그 일은 잊어 버리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지금처럼 계속 영적으로 열심히만 해”
아무런 책망도 받지 않고, 난 양심의 가책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얼마 후에 있었던 순회방문에서 그분은 나를 어린 나이였지만, 봉사의 종으로 추천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집이 이사를 하게 되어서, 정들었던 광주 SL회중을 떠나게 되었다. 난 당시에 사실 그다지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래서 다른 핑계를 대고, 부모님회중 인근에 있는 광주 HN회중에 연합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예전 여호와의 증인 아웃사이더 카페 쥔장이었던 JH와 한 회중에 연합하게 되었다.
광주 HN회중의 주임감독자였던 C형제... 그분은 겨우 삼십대 초반이셨는데, 광주 50여개의 회중에서 최연소 주임감독자였다. 그분의 장인이신 Y형제가 광주에서 꽤나 영향력 있는 장로이셨는데, 혹시 그분의 입김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새로운 회중의 주임감독자 C형제는 대단히 겸손하고, 인간성이 좋은 분이셨다. 난 그분의 온화한 인간성에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또 다른 장로였던 CH형제.. 그분은 30대중반의 MTS출신 총각장로였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겸손과는 거리가 먼 단점이 있긴 했지만, 남자답고 정이 많은 분이셨다. 그분은 나중에 MTS출신 총각장로라는 꼬리표를 메리트로 등에 없고, 학교교사를 하는 증인자매와 결혼을 해서, 거의 자매님의 경제력 덕분에 지금도 잘 살고 계신다. 이런 일은 일반사회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만, 그런 면에서 조직이 결혼하는데 있어서는 형제들에게 이점이 있긴 한 것 같다. 그 회중의 실세였던 그 두 장로들은 나를 되게 괜찮게 봤던 것 같다. 그 분들은 나이도 갓 스무 살 즈음밖에 안된 그 회중에서 가장 어린 초짜 봉사의 종인 나에게 파격적인 특권을 주게 되었다. 난 광주 HN회중에서 ‘회계의 종’, ‘서적연구 사회자’로 임명을 받았고, ‘공개강연’도 여러 번 했었다. 나도 사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즐겼었고, 어린나이에 그런 특권들을 받았던 내 자신에 대해 자부심이 넘쳤고, 또래 형제들에 비해 더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는 내 자신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등, 속으로 교만 섞인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유치하고, 철이 없었고, 뭐 그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는지 내 자신이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증인조직에서는 여러 형제들이 특권에 목을 메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특권이라는 것이 문자 그대로, 형제들의 꼬리표로 작용해서, 순수하게 섬기기 위해서 직분을 사모하기 보다는 인간이 지닌 과시욕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한 회중이었던 L형제는 장로추천에서 두 번 미끄러져서, 그 일로 자매님과 집에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분은 나중에 장로에 추천이 되어서 대단히 기뻐하셨다. 아까 언급했던 MTS출신 CH형제는 본인이 예전에 순회방문 때 장로에 추천이 안 되어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날은 집회도 안 갔다고 나와 술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형제는 장로와 사이가 안 좋아서 봉사의 종 추천에서 미끌어 지고 너무 속상해서 3일간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나의 이모님도 나중에 조직 안에 들어오신 의사였던 이모부에게 빨리 장로가 되어야 한다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내 친구인 예전 아웃사이더카페 쥔장이었던 JH도 나와 한 회중에 있으면서, 자신은 봉사의 종이 아니었던 상황에 많은 괴리감도 느끼고, 장로들에게 많이 서운했다는 말을 내게 했었다. 그 얘는 나중에 봉사의 종이 되었다. 솔직히 나 역시도 그런 특권에 대한 사모가 꼭 그렇게 순수했었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어린 나이에 그렇게 많은 특권을 받아 버린 것이 나에게 배교(?)의 씨앗을 더 빨리 자리 잡게 만들어 버렸다. 생각해 보라. 그만큼 특권이 많아진 만큼, 연설이나 서적연구사회를 위해 더 많이 개인연구를 해야 했다. 그 당시 ‘계시록책’을 서적연구에서 내가 사회를 했었는데, 그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완전 무협지수준이다. 요한계시록을 현대 협회의 역사에 적용을 시키기 위해, 너무 억지스러운 적용과 억측이 난무한다. 그에 더해서, 계시록책에 연대문제로 1914년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러셀은 기원전과 기원후 사이에 0년이 없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처음에는 예루살렘 멸망을 기원전 607년이 아닌 606년으로 계산상의 실수를 했다는 내용도 각주에 조그맣게 나와 있다. 하지만, 나중에 그 계산상의 실수를 알고도, 희한하게 1914년을 1915년으로 바꾼 게 아니라, 그 기산점이 됐던 기원전 606년을 607년으로 미루면서까지, 1914년이라는 연도에 대단히 집착을 했다. 공개강연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 많이 예전 파수대를 뒤지고, 출판물을 공부해야 했다. 연대문제를 언급하기 위해, 출판물을 뒤져서 다니엘서에 대한 해석을 보면, 그 당시에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히, 단지 느부갓네살에 대한 예언인데, 어이없이 예수의 재림연도를 하필히면 재수없는 느부갓네살에 대한 예언을 적용시켜서, 1914년으로 끄집어 내는 건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한번은 생일에 대한 연설을 준비하기 위해 90년대 초반 파수대를 찾아보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증인들은 생일을 금하는 이유가 ‘성서에 언급된 두 번의 생일날에 사람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과 ‘그 기원이 이교도에서 근거’했다는 이 두 가지 이유로 알고 있다. 다시 한번 90년대 초반 파수대를 찾아 보시라. 숨은그림찾기처럼 요점을 이해하기 어렵게 글을 빙빙 돌려서 써 놓았으나, 유심히 읽어보면, 그 기원이 이교도에서 근거했다는 것은 생일을 금하는 사유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생일을 금하라는 내용이 성경에는 전혀 안 나와 있는데, 단지 오비이락에 지나지 않는 생일날에 사람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 것만을 가지고, 성경이 생일에 대해서 안 좋게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고, 그 이유만이 생일을 금지하는 단 한가지 논리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렇게 따지면, 정치인이었던 에티오피아 내시가 침례를 받은 것과 군인이었던 고넬료가 침례를 받은 것은 도대체 무엇을 시사한단 말인가?? 이미 머리가 굵어버린 탓일까?? 그 외에도 많은 협회의 해설을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게 되었고,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진리는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에 진다’와 같은 명백하고, 절대적인 것인데, 협회가 했던 수많은 오류들을 진리라는 개념에 조화시킬 수가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세뇌가 덜 풀린 탓에 나는 애써서 자기최면을 걸고, 여호와의 증인이 참조직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네이곤 했다.
그러다가 집안 형편이 힘들어져서, 학교를 휴학하고 윤선생영어교실을 알바로 뛰며, 부모님을 경제적으로 얼마간 돕게 되었다. 그러던 찰나.. 갑자기 군대 입영영장이 날라 왔다. 그것도 딱 3주 전에... 머리속이 갑자기 새하애졌다,. 드디어 중립이 내게 닥친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난 그 당시에 이미 협회에 대해서 100프로는 믿지를 못하게 되었고, 교리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중립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시절부터 증인으로 살아왔던 나에겐 조직을 떠나는 것은 그 때까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혼란스러워도 자기최면을 걸면서, 이게 신권조직이라고 믿고 싶었다.
인생이 정지되는 기분이라고 할까? 중립을 하나님께 충성을 지킬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기쁘게 그곳에 들어갔던 일부 형제들과는 달리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난 중립에 들어가기 전에 나와 친했던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기 시작했다. 회중에서 송별식도 받고, 친했던 얘들과 실컷 술도 마시며 석별의 정도 나누었다.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리던 12월의 어느 날.....
감옥행 티켓을 받고, 너무나 어렸던 21살의 나는 착찹한 심정으로 논산으로 입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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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있습니다...다음 글도 기대합니다...^^
저도 강남고속버스 터미날 ..동서울 터미날 .무역센터 등 많이 갔었죠... 서울역 원정도 ..가끔씩 보는 다른회중 자매들이 참 설레임을 갖게 했죠..흐흐흐
100%확신은 없었던 상태, 하지만 이것 말고는 참된 성도나 공동체가 없다는 생각을 인한 자기최면,12월 군번까지도 같군요. 저와 다른 점은 그곳에서 나와 15년간 어느 곳에도 정착할 수가 없었다는 것과 '자기 검열'을 꾸준히 했다는 점이랄까요?... 공감이 되기도 하고 참 착잡하기도 합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듯 합니다. 다음 글도 기대가 됩니다.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