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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리던 12월 어느 날 부모님과 내 여동생과 함께 아버지의 차를 타고, 논산으로 갔다. 입대를 함과 동시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나오라고 했다. 나 혼자였다. 입소대 5중대로 배정받고, 며칠 후에 헌병대로 가서 구속되었다. 거기에는 이미 20명이 넘는 형제들이 영창에 수용되어 있었다.
논산헌벙대..
난 예전 중립을 지켰던 형제들에게 그 과정에서 영창에서 구타를 당하고, 타협을 시키기 위해 고문수준의 가혹행위를 가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나도 여전히 헌병대에 구타가 있는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들어갔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영창에서 구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가끔 한 번씩 체력단련 수준의 기합을 받기는 했으나, 그리 심하지도 않았다. 참 웃긴 것은 헌병들은 영창의 수감자에게 전혀 폭력을 쓸 수 없었으나, 헌병들 사이에서는 선임병이 후임병을 구타하거나 갈구는 일들은 빈번히 발생했었다. 한 번은 우리들이 헌병으로부터 기합을 받다가, 대전출신의 B형제가 갑자기 눈물을 터트리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무서운 척 하던 헌병은 갑자기 마음이 약해져서, 그 아이에게 미안한 듯 달래주기 시작했다.
“CG아 그만 울어... 너보다 우리 부대 이등병이 훨씬 더 힘들게 살아!!”
내가 저녁에 한번은 불침번을 섰을 때, 같이 불침번을 섰던 헌병이 나를 불러서 고참의 갈굼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자신의 군생활의 애환을 털어놓기도 했다. 일부 헌병들은 꽤나 인간적이어서, 나중에 우리가 장호원 육군교도소로 이감을 갈 때, 헌병과 수감자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정이 들어버린지라 우리와 헤어지기를 참 힘들어 하기도 했다. 군대를 가고 싶어서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와 비슷한 연령대의 이십대 초반인 꽃피는 봄처럼 한참 아름다울 시기에 배역만 달랐을 뿐,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그곳에 왔고, 우리는 통치체의 명령에 그 곳에 왔을 뿐,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고, 감정이 있는 같은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들도 입영영장을 받았을 때, 그 이유는 다르지만, 나처럼 찹찹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스무 명이 넘는 증인들이 한꺼번에 재판을 받았고, 우리 모두 항명죄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해서 난 돌이킬 수 없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최고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우리는 얼마 후에 장호원 육군교도소로 20명이 넘는 형제들이 함께 이감을 갔다. 장호원 2중대에 증인들만 한방을 주었는데, 중대장이었던 대위가 와서 우리한테 이렇게 말했다.
“난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서 아주 좋게 생각한다. 너희들은 단지 대한민국에 태어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얘들이다. 여기서 편하게 생활하다가 민간교도소로 이감가라”
그래서 난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이곳이 천국인지 알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한 간부급 군인이 근엄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왔다. 그곳의 구호는 ‘충성’이었다. 하지만, 증인들이 이감을 올 때마다 일부 형제들이 그 구호를 거부해서 말썽이 생기곤 했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충성’이라는 구호는 단지 이곳의 인사일 뿐이다. 나에게 충성하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부대가 구호를 바꿀 수 없으니, 충성이라는 구호를 부치기 바란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희가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가혹행위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형제들은 겁을 집어 먹고, 그냥 인사라고 생각하고, 양심적으로 충성이라는 구호를 부치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7명의 형제들은 그 충성이라는 그 구호를 거부했다. 충성이라는 구호만 부치면, 육군교도소의 생활이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거기 있었던 다른 재소자들은 전부다 군인신분이었는데, 군대보다도 육군교도소가 훨씬 더 편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충성이라는 구호를 안 한 죄로 매일 연병장에서 심하게 기합을 받고, 때론 군화발로 얻어 맞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7명은 1주일 동안은 거기에 굴하지 않고, 힘들게 버텼다. 군대 기합 중에 ‘좌로 굴러 우로 굴러’라는 얼차레가 있다. 좌로 굴렀다가 우로 구르면 그것은 체력단련이다. 하지만, 한 지독한 군인은 연병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한쪽 방향으로만 계속 구르게 시켰다. 다들 토하고 난리가 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토하면 군화발로 때리면서, 계속 구르라고 했다. 연병장 끝 벽에 다다르자 제자리에서도 한 방향으로 계속 구르도록 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그만 항복해버렸다. 차라리 얻어 맞고, 얼차례 받는 것은 버티겠는데, 그것만큼은 도저히 버틸 수 가 없었다. 너무 굴욕감이 들었지만, 난 그들에게 충성이라는 구호를 부치고 거수경례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울출신의 K형제와 충청도출신 B형제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충성이라는 구호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중에는 기합을 주던 군인도 그 애들 같이 독한 놈들은 처음 봤다고 했다. 온화한 성격의 서울출신 K형제는 나한테 그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난 장호원육군교도소에 오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이미 알고, 각오하고 왔어. 우리회중의 아는 형도 여기에서 가혹행위에 못 버티고, 충성이라는 구호를 부쳤었대. 그래서 지금도 양심이 너무 괴롭대. 내가 만약 여기서 굴해버리면, 내 양심이 평생 괴로워서 못 견딜 것 같아.”
난 충성이라는 구호를 부친 것에 대한 비싼 선물로 그 이후에는 가혹행위에서 해방되고, 생활은 편해졌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연병장에서 오늘도 여전히 고통스럽게 구르고 있는 두 명의 형제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너무 나약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그 얘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결국 그 둘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민간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나는 네 명의 다른 형제와 함께 군산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민간교도소로 이감을 와서, 군교도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군산에서 처음에는 간병으로 배정을 받았고, 증인형제 3명과 함께 일을 했었다. 그 중에 기억나는 강원도 횡성출신의 JJ라는 형제.. 그 얘는 나보다 나중에 내 후임으로 중립을 들어온 나보다 한살 어린 형제였다. 영혼이 맑았던 아이... 너무나 착한 아이였다. 한번은 그 아이가 서류처리를 잘못해서, 내가 선임인 탓에 대신 교도관한테 엄청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 얘는 나한테 고개를 숙이면서 너무 미안해했다.
“ 형 미안해요. 저 때문에...”
다른 얘가 그랬으면, 화가 나서 노발대발 했었을 지도 모른데, 그 착하디 착한 얘한테는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어서, 웃으면서 괜찮다고 했다. 그 얘의 집은 강원도산골에서 목장을 운영했고, 나에게 출소하면 꼭 물 맑고, 공기 맑은 자기 집으로 놀러오라고 했고, 난 꼭 한번 가겠다고 했으나, 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난 몇 년 전에 그 아이의 집에 전화를 한 적이 있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그 얘는 놀라면서,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간절히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형!! 나 결혼할 때, 다른 얘들보다 형이 꼭 와주기를 바랬어. 다른 중립동기들은 있는데, 형이 없어서, 너무 가슴 아팠어. 다음에는 꼭 우리 주안에서 만나자!!”
순수한 그 아이한테 무어라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울출신의 H형제.. 그는 외국에서 석사학위까지 받고, 우리보다는 한참 늦은 20대 후반의 나이에 중립을 들어왔다. 아마도 합법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자신은 그런 것을 이용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충성을 지키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은 또 다른 강원도 출신의 한 형제도 정말 착하고 진실한 친구였다. 그처럼 믿음을 가지고 중립을 들어온 모범적인 증인들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당수의 형제들은 별로 신앙심도 없었고, 그냥 자신의 자라온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거나, 또는 관성의 법칙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들어온 얘들이 대다수였다. 중립 들어오기 전에 이중생활을 했던 얘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 아이들이 회중에서 했던 행동들과 징역 안에서 했던 행동들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고, 사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에서 JS는 나와 동갑인 같은 광주출신이었고, 중립 전에도 몇 번 본적은 있었으나,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던, 하지만 별로 나쁜 인상도 받지 못했던 아이다. 그 얘는 나보다 한참 뒤로 징역을 들어왔는데, 중립 들어올 때 친구형제들과 송별식을 단란주점에서 술집여자들과 함께 했다고 말한 아주 스케일이 큰 녀석(?)이다. 영 인간성이 좋지 않았던 그 아이는 같은 고향출신인 SL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괴롭히곤 했고, 남들을 뒤에서 과장되게 욕하는 게 취미인 아이였다. 현재 JS는 광주 모회중에서 자랑스럽게 총각장로로 충실히(?) 회중을 섬기고 있고, 창녀와도 친하셨던 예수님의 본을 직접 실천하고자(?) 자기와 코드가 맞는 다른 총각장로와 다른 무활동된 애와 함께 여자 들어오는 술집을 지금도 자주 드나든다고 한다.
내가 있던 군산교도소는 초범교도소라 생각만큼 분위기가 살벌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난 나의 중립시절이 군대에 비해서 그렇게 특별히 힘들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갈망하게 되어 있고, 자유롭게 살아야할 인간들이 새장의 새처럼 갇혀서 지내는 것은 몹시도 외롭고, 답답할 뿐이다.
나는 그 외롭고 답답한 시기를 견디기 위해서 출판물과 성경을 많이 읽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나는 증인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부분들을 의심을 품은 채 중립에 들어왔다. 하지만, 출판물을 열심히 읽어도 이미 자의식이 생겨버린 상황에서, 혼란만 가중될 뿐, 의문들이 풀리지가 않았다. 쌓이는 의심을 나는 계속 자기최면을 걸면서, 스스로 마음속으로 불안한 상태로 억누루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시점부터는 출판물을 읽으면 화가 나고,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징역을 들어온 지 1년 정도 흘렀을 때, 파수대의 어떤 기사를 읽다가 한계에 다다라서,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을 흘렸다. 그 기사 내용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내용은 글을 쓴 사람의 지적수준까지 의심할 만큼 얼토당토 않는 과장된 글이었다. 이게 다 가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유치한 이론을 진리라고 믿고, 차디찬 교도소에 까지 들어온 내 자신이 너무나 측은해 보였다. 스스로 억누르던 의심들이 임계치에 이르러 드디어 폭발을 하게 되었고, 지난날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난 단지 우물안 개구리였으며, 신기루에 속아서, 멍청한 삶은 살아왔던 것이다. 그 후로는 다시는 출판물을 보거나 개인연구를 하지 않았다. 아무 쓸데가 없는 무가치한 출판물을 보는 시간조차도 아까 왔고, 차라리 그 시간에 실용적인 영어공부나 했다. 그리고 앞날을 생각했다. 언젠가는 조직을 떠나리라고 마음을 먹고, 출소하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협회의 지침과는 반대로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살기로 맘 먹었다. 학교도 복학하고 봉사나 개인연구가 아닌 실용적으로 학교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이방인 인맥들도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다. 출소 후에 바로 그만두고 싶었으나, 그렇게 할 만한 여건은 못 되니, 이중생활을 하고, 나중에 기회를 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시점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나는 3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2년 2개월만 살고 가석방이 되었으니, 거의 군기간과 비슷한 기간만 징역을 살았다. 어차피 중립을 가지 않았어도, 그보다 더 힘든 군대를 갔을 텐데 징역에서의 생활이나 그 기간자체가 억울하지는 않다. 이방인 친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나의 중립시절이 그 얘들의 군생활보다 더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군대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폭력과 가혹행위와 살인적인 근무여건이 여전히 존재했고, 한 친구는 군대생활을 기억하는 것조차도 괴로워해서, 군대이야기를 꺼내는 것마저도 싫어했다.
중립을 갔다 온 형제들을 무슨 자랑스러운 무공훈장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충성을 지킨 형제로 대단하게 생각해 줄지는 모르나, 내 입장에서는 ‘전과’라는 꼬리표를 남긴 ‘주홍글씨’일 뿐이다. 나에게 이미 오래전에 형기는 소멸했으나, 사회생활의 불이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중립생활의 고생이 억울한 게 아니지만, 하나뿐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이후로도 전과라는 낙인이 찍혀서 평생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그 형기가 진정으로 소멸된 것은 아니고, 이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양심적 병역거부.”...
“그것이 ‘자신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반영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규격화된 타압적인 양심적병역거부였는지..” 그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평화주의 사상’, 그것의 견지에서 바라보았을 때, 난 진정으로 ‘평화주의자’여서 집총을 거부했던가?
구약성경을 보면, 분명히 고대이스라엘 백성들이 칼을 쥐고, 전쟁에 참여했던 처절한 기록들이 무수히 많이 나온다. 그런 기록과 내가 중립을 선택했던 것을 조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고대이스라엘은 ‘신권통치’를 받는 ‘신의 국가’였기 때문에, 신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성이 있었으나, 대한민국은 ‘신권통치’를 받는 국가가 아니었기에, 즉 진정한 ‘우리나라’가 아니라, ‘이방국가’였기 때문에, ‘타국의 군대’를 위해 병역을 치를 수 없었던 것이 진정한 나의 내면의 논리였다.
그렇다면, 21살에 집총을 거부했던 나는 진정 ‘평화주의자’였는가? 아니면, ‘반국가주의자’였는가? 또는 ‘무정부주의자’였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절대로 ‘평화주의자’여서 군대대신 감옥을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을 ‘우리나라’라고 여기는 이 시점에서 집총을 거부했던 내 개인의 역사는 전혀 자랑스럽지 못한 부끄러운 기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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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협회로부터 강요받은 양심...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고생했습니다 손해가 아닙니다 진리를 아는 과정에 거짓을 체함 하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속아 보는 것도 재산입니다 나중에 속는 것보다 이제 열심히 살면 성공합니다 그래서 지금 언론과 정부에서 교리적 병역 거부로 호칭을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생각이 저와 많이 같으시네요. 분명히 평화주의 그러니까 평화때문에 중립을 지키는건 아니에요.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는 평화를 말하지만 이 대한민국이 내 나라가 아니고 여호와의 증인 워치타워가 내 정부요 내 나라라서 이방나라인 대한민국에 충성할 이유가 없는게 더 정확한 그들의 교리죠. 어쨌든 같은 입장에서 우린 완전히 새 된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