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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2개월을 교도소에서 살고,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많은 의심을 품고, 입대를 했던 나는 증인조직이 가짜라는 결론을 내리고, 징역을 마쳤다. 마음속에서 이미 조직은 멀어졌고, 언젠가는 떠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당장은 그만 둘 수 없으니, 개인연구나 봉사는 뒤로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실용적인 공부를 하고, 이방인친구들을 많이 사귀기로 마음을 먹고, 조직을 떠날 준비를 차근차근하기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는 반대로 너무나 빨리 그 날이 찾아오게 된다. 난 불과 중립 나온 지 넉달 만에 증인을 그만두게 되었다.
중립 직전에 광주 HN회중으로 연합을 했으나, 그 사이에 부모님이 다시 이사를 가셔서, 원래 내가 청소년기를 보냈던 광주 SL회중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성원들이 많이 바뀌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를 아시던 분들이 그래도 여러분 계셨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었다. 중립 전에는 활달하고, 회중 일에 적극적이었던 나는 사실 집회시간마저도 아까웠고, 연설임명을 받아도 예전과는 달리 대충대충 해버리고, 발표도 거의 하지 않고,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집회를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빠져 나갔다. 친구인 JY 그리고 나의 연구사회자였던 JJ형 말고는 회중에서 누구하고도 어울릴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에 바로 학교를 복학하고, 오히려 학교에서 새로운 얘들과 친해지려고 노력을 하고, 학교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학교생활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난 연기파 배우가 아니어서, 나의 이런 태도는 금방 눈에 띄었고, 회중성원들도 나를 보고 너무 많이 변했다는 말들을 했다고 한다.
나의 연구사회자였던 JJ형은 원래 봉사훈련학교를 졸업하고, 영어회중 특파로 임명을 받았으나, 알력다툼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중에서도 거의 특권을 못 받고, 2번연설을 하는 씁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너무나도 변한 나를 보고, 그 형이 그랬다.
“너 요즘 왜 그래? 왜 이렇게 많이 변해버린 거야??”
난 그 형을 인간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하고 내 속마음을 말했다.
“ 형, 솔직히 전 이 조직이 진짜가 아닌 것 같아요. 그동안 전 우물안 개구리였어요. ”
나의 의심을 듣고, 그 형도 처음에는 자기도 나와 같은 의심을 했었다고 솔직히 고백을 했고, 처음부터 이 조직을 다시 조사해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결국 자신이 내린 결론은 다시 조직이 참이라고 확신했다는 말을 했다. 나를 불안하게 본 그 형은 일부러 자주 나와 시간을 보내면서, 나를 설득시키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과 증인의 사상에 대해서 논쟁을 하다가 나는 통치체에 대한 실랄한 비난을 해버렸다. 충격을 받은 그 형이 슬픈 듯이 내게 말했다.
“난 너를 많이 사랑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너가 많이 엇나가 버렸구나.”
얼마 후 내가 많이 변한 것을 이미 눈치 챈 주임감독자 B형제가 JJ형에게 나의 영적인 상태를 물어봤을 때, 비밀을 지켜주지 못하고, 내가 이미 진리에 대해서 전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버렸다. 그리고 그 주임감독자 B형제는 나의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전해버렸다.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가 화가 나신 표정으로 나에게 그랬다.
“너 여호와의 증인이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서...”
그 날 아버지에게 아무런 대꾸도 안하고, 저녁에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했다. 이미 내 마음이 들켜버린 마당에 더 이상 이중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리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이젠 지긋지긋한 가면놀이를 여기에서 끝내기로 결심을 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를 가면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저 당분간 증인 쉴께요.”
설득하려는 부모님께 난 일부로 포기하게 하려고, 거칠게 말씀드렸다.
“ 더 이상 증인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난 사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그 때문에 내게 생활의 중심이 친구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분들은 내가 이미 부모님의 말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고집센 얘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이상 강요하지 못하셨다.
난 인간적으로 믿었던 JJ형이 내 속마음을 주임감독자 B형제에게 말해버린 것에 너무 속상해서, 그 형에게 그날 저녁에 항의하러 갔다. 그 형은 그날 나름대로 나의 영적인 상태를 B형제에게 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협회의 지침을 인용하며 말했지만, 이미 정신적으로 증인에게서 떠나 버린 나에게는 씨도 안 먹히는 설명이었다. 그러면서 그 형이 내게 한 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넌 ‘이탈’이야. 앞으로는 나에게도 오지 말아라. 나도 내 자신을 너에게서 보호해야 하니깐”
물론 나도 내 자신이 내용상 ‘이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종교재판처럼 ‘이탈’이라는 그 저주의 언어를 말하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와 절친했던 나의 연구사회자이자 내가 한 때 역할모델로 삼았던 JJ형이 아닌가??
“형!! 정말 너무 하시네요!! 어떻게 저한테 그러실 수 있죠? 앞으로 형 앞에는 안 나타나죠!! ”
슬펐다. 난 ‘표현과 비판의 자유’가 없는 그 닫힌사회에서는 곰팡이와 같이 전체를 좀먹는 위험한 사상을 가진 이단아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신속히 친했던 얘들을 마지막으로 만나서, 내 심정을 이야기하고 어쩔 수 없이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우리 회중의 주임감독자였던 B형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이탈이 아닌 무활동으로 처리했다. 광주 지역사회는 좁은 동네라, 나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나를 아는 여러 사람들이 자꾸 내 핸드폰으로 전화해서, 공부에 집중을 할 수조차도 없었다. 난 그런 전화에 너무 피곤해서, 핸드폰번호를 바꾸고, 여동생에게만 알려주고, 다른 사람한테 절대로 번호를 말하지 말라고 했다. 주임감독자 B형제는 전화통화를 할 수 없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어느날 밤 늦은 시간에 자매님과 함께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그분은 자신도 젊었을 때, 나와 같은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고, 그것 때문에 한 때 장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도 성경내용을 인용하며, 좀 더 기다려보라는 취지의 말로 나에게 설득하려 했었다. 개인적으로 난 그분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내 속마음을 솔직히 말하지 않고, 당분간 쉬겠다고만 말씀드렸다. 자신의 설득이 먹히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그분은 조직을 떠난 사람들은 인생이 잘 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꼬이고, 불운이 뒤따른다는 말씀을 하셨다. 난 그런류의 이야기를 증인시절에도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증인을 그만둔 사람이 정신장애가 됐다, 사고로 장애자가 됐다, 귀신이 들렸다는 등등의 ‘전설의 고향’같은 이야기를 신물이 나게 들었었다. 되도록이면 난 예의를 갖추려고 했으나, 사람이 가진 공포심을 이용해서, 협박을 하는 그분의 유치한 말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분은 뉴밀레니엄시대에 도대체 신화와 전설이 진실처럼 세상을 지배했을 때나 먹힐법한 그런 논리로 나를 설득하시겠다는 말인가?
“ B형님!! 그런류의 이야기들에 저는 오히려 더 거부감을 느낍니다. 형님이 하시는 말씀은 중세에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서 면죄부를 주고, 천국행티켓을 팔았던 사람들과 뭐가 다릅니까? 그리고, 조직을 빠져 나간 사람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데이터를 형님께서 다 가지고, 비교판단을 해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순간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해버렸다.
광주SL회중 주임감독자 B형제와 내 연구사회자였던 JJ형..
그 둘은 내가 증인시절에 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지적인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그분들이 무지몽매한 분들이였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분명히 자신들도 나에게 인정했듯이, 그분들 조차도 증인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부분들을 의심했던 적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면서 나를 설득하면서 그런 말밖에 할 수가 없었던가?? 나보다도 한참 똑똑하신 그분들은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지금도 증인생활을 하시는 것일까?? 이 카페에서도 인용된 인지부조화 심리처럼 떠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려서 그렇게 사시는 것일까? 아니면 가족들 때문에?? 사람마음을 백퍼센트 읽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나는 감히 그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증인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들은 영원히 속기에는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다. 여전히 증인을 하시는 그 두 분들이 설마 지금도 우매하게 지상낙원이 올 것을 기다리면서, 지금이 말세라고 생각하시고, 유일조직구원론을 믿으면서, 증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아마겟돈 때 멸망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그 생활을 하시고 계실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어설픈 나의 이중생활은 나의 시나리오와는 달리, 출소한 후 4개월을 마지막으로 그 끝을 내렸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갈 준비가 별로 안 되어있던 상황에서 내가 의지할 인맥과 어울릴 친구들도 거의 없었다.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영어도 계속 공부하고, 친구들도 사귈 겸 스파르타식으로 운영하는 한 영어토론동아리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 그 동아리는 가입대상자가 남학생은 군대를 제대한 예비역, 그리고 여학생들은 2,3학년만 뽑고, 학교 내에서도 빡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징역에서 개인연구는 안하고, 열심히 영어만 공부한 덕분에 영어Test 와 영어인터뷰를 쉽게 합격을 했고, 그 동아리의 신입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곳은 자유로운 대학문화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공부에 대한 룰이 엄격하고, 룰을 어기면 학습부장이나 회장이 무자비하게 질책하는 곳이었다. 그에 더해서 신입들은 처음 3개월 동안은 결석이 하루도 허용하지 않고, 아침에는 리스닝수업, 저녁에는 사회적인 이슈를 가지고 2시간씩 영어토론을 하고, 그에 더해서, 인준을 받고 정회원이 될 때, 거의 망가질 정도의 춤과 퍼포먼스를 해야 하는 호된 신입기를 요구하는 곳이다. 여자애들은 처음에 들어오면 울기도 많이 울고, 적응하는데 참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감옥도 다녀온 내 입장에서는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품행방정한 증인으로 살았던 내가 항상 애어른처럼 예의 바른 척 했을지언정, 언제 춤을 춰보고, 자유롭게 망가져 본적이 있던가? 처음에는 그런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난 철저히 세상에 적응하는 쪽으로 내 마음을 이미 정했던 지라, 조금씩 나의 행동이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스물 서너살의 피끓는 청춘에 애어른처럼 행동하며, 집집마다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아마겟돈을 경고하고, 이 세상을 비관주의로 보면서, 세상의 멸망의 소식을 전해야 하나? 아니면 젊은이답게 유쾌하고 자유롭게 살아야하나? 난 그 동아리 생활을 하면서 영어도 연마하고, 지금까지 이어진 친구, 선배, 후배들을 만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동아리의 회장으로 뽑히게 되었다.
영어동아리 생활을 하면서, 직장을 다니는 졸업한 선배들이 MT나 동아리영어수업시간에 오셔서, 사회에 대해 해주는 말들을 통해 사회역시 냉정하고 만만치 않음을 간접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실용적인 지침들을 파수대와 공개강연에서 배운게 아니라, 대학에서 배우기 시작을 했고, 그 때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진정한 인생을 배우기 시작했다. 난 대학과 사회를 통해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중에서 동아리에서 만난 한 친구는 내가 2년전에 영어학원을 오픈할 때 부족했던 비용 중 일부인 천만원이 넘는 돈을 내게 빌려준 얘도 있다. 난 이미 그 돈을 갚았고, 내가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으면, 서울에서 지금 직장생활하는 그 얘를 항상 만나고 온다. 너무 악해서 멸망 받아 마땅한 세상에도 진실한 인간관계는 존재한다.
나중에는 국제교류센터라는 NGO단체에도 가입해서 ‘외국인의 밤’이라는 행사를 기획하고, 통역자원봉사를 했었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학당’ 한국어강사로도 자원봉사를 했고, 광주 5.18 자원봉사도 했다. 난 그렇게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대학을 복학한 후로는 이리저리 사회에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새로운 밀레니엄인 2000년대에는 이 사물의 제도가 멸망하고, 이미 지상낙원이 와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2000년대에 난 낙원이 아닌 대학교의 캠퍼스를 누비면서, 그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대학생이 되어서, 캠퍼스의 낭만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섞일 줄 아는 사회성을 알게 되었고, 현실을 볼 줄 아는 눈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비현실적인 신화와 전설 같은 믿음은 오히려 내 정신세계에서 멸망되어 버렸다.
내가 소속되었던 그 영어동아리...
준비 없이 세상으로 뛰쳐나온 나에게 그 동아리는 외롭지 않을 만큼의 여러 친구들을 나에게 이어주었고, 그 때 배운 영어실력덕분에 나는 지금도 경제적으로 먹고 살 수 있다. 세상경험이 거의 없는 나에게 사회에 대해서 압축적으로 가르쳐주었고, 외로웠던 나를 품어주고, 내게 세상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그 동아리에 대한 추억이 너무 많고, 애정이 몹시도 강하다. 지금도 한번씩 동아리를 찾아가서 후배들과 함께 영어토론도 같이하고, 학창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그 아이들에게는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MT도 한번씩 같이 간다. 그 어린 후배들에게 술 사주며 쓰는 돈들이 별로 아깝지도 않다. 그 동아리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었기에....
대학을 복학하고, 세상을 향해서 처음으로 걸음마를 띄었던 그 시절, 난 아직도 너무나 그립고 가장 애뜻한 추억이 있는 내 인생의 최고의 황금기이자,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2000년대 초반의 그 시절은 지금 생각 만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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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앞으로 다섯은 없나요? 재미 있어요 ㅋ
음~~ 계속 잘 봅니다.. 지금부터 진실로 하느님 을 찾으려고 지성을 사용해야 할 때 가아닌 가 생각됩니다.. 부산모임 에서 뵙고싶군요.. 내일..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그루빠끄로비님의 에세이집. 그후 이야기가 또 기다려지네요.ㅎㅎ
솔직한 이야기들..잘 읽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한번 만나 뵙길.
에...믿던 사람들 다 ... 증인이라도 믿지 마세요.., 다 세놰교욱에 물들어... 우정이고 뭐고 없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