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꽃은 만개하는 시절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청춘이라는 시간이 있습니다.
힘은 솟구치고 인생은 아름다우며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시절이지요. 하고 싶은 일도 , 가고 싶은 곳도 많은 호기심 충만한 시절, 우리 모두는 그 시절을 통과해 왔습니다.
저의 청춘도 증인사회에서 꿈과 같이 지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과 조직에 대한 충성으로 귀결시키는 전제적 분위기였지만, 나름의 낭만과 자유가 있었습니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회중 분위기속에서도 자유로운 청춘들만의 놀이코드가 있었고 아슬 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이성교제와 일탈이 있었습니다.
저의 그 시절은 모두가 대학을 터부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비영적인 사람으로 치부되어 온갖 설움을 당해야 했던 한국 증인 역사상 가장 역대급으로 고등교육을 막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제라면 아예 고등학교부터 힘든 시절이 시작되었지요.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교련을 거부하면 제적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어쩌다 다닐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갖은 왕따와 눈치를 무릎써야 했으며 양심에 꺼리면서도 뒷돈 거래를 해야 하기도 했지요. 대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입학하자 마자 학군단 편성이 되었고 그것을 거부하자면 어김 없이 학사경고가 주어져 비싼 입학금만 날리고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어차피 사회적 분위기도 열성 증인이라면 정상적 교육을 받기가 어려웠던 시절,
증인사회도 고등 교육을 포기하고 파이오니아를 하라는 구호에 절박하게 매달렸습니다.
고향과 다름 없던 파주에서 도저히 파이오니아 생활을 할 수 없던 저는,1984년 추운 어느 날, 서울의 북부 갈현동으로 자취방을 얻어 올라왔습니다. 경기도 촌놈의 서울 회중 입성은 당시 회중 사람들에게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갈현동 회중에는 또래 청소년은 별로 없었지만, 동생 청소년들이 다소 있었습니다. 대부분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돈 좀 버는 집안이지만 어머니가 열렬증인으로 반쪽 증인집안의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박해를 받는 이도 있었고 비교적 온건한 집안도 있었습니다. 다들 경기도에서 보던 증인집안보다는 휠씬 잘 사는 집안이었지요.
그들 모두 대부분 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포기하거나 검정고시를 선택했습니다.
작곡가인 아버지의 피를 받아 음악적 재능이 있던 한형호,한태호 형제, 학교에서 일등을 도맡아 하던 수재급의 비상한 두뇌를 가진 김신우, 훗날 고려대를 다니다 중퇴한 듬직한 인상의 김형민,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잘 나가는 아버지를 둔 귀공자 타입의 노영민, 장안동 중고차사업으로 돈을 많이 번 아버지를 둔 장난꾸러기 이상일,이상대, 훗날 벧엘장로와 결혼한 재치만점의 이미순. 당시 저와 함께 청소년기를 보낸 갈현동의 젊은이들입니다.
그 중 이방인 아버지를 둔 친구들은 학업 중단으로 인해 집안내에서 많은 갈등에 시달렸고 그런 시련들이 우리끼리만의 커뮤니티에 더욱 활력을 불어 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저는 가장 형뻘이 되는 상황이어서 제가 경기도 촌놈이긴 했지만, 참 재미있게 어울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서울역 봉사, 당시 서울역은 지금과 달리 앞 광장이 상당히 큰 노변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주간에 직장을 다니는 형제자매들이 야간에 자유롭게 전도봉사를 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사람에 따라 의미있는 전도도 했겠지만 그곳엔 많은 청춘 남녀 형제 자매들이 은근히 많은 비밀 연애를 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역 커플도 많았지요. 우리 회중의 김흥섭 형과 나의 친구 정원규의 누나도 이곳에서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보수적인 회중에서 할 수 없었던 연애를 이곳에서는 비교적 많이 하였고 중고딩 청소년 파이오니아들의 연애도 종종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친한 또래의 형제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지금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배상필, 이현수, 정원규, 임동수, 김용태, 최준호, 장경웅...모두가 너무나 사랑했던 나의 친구들입니다.
모두들 재기발랄하고 똑똑했던 친구들, 만약 그들의 인생에 이 종교가 없었다면 인류?를 위해 뭔가 하나씩은 했음직한 멋진 놈들입니다. 서울역 봉사 시절의 이야기는 훗날 또 몇 페이지의 그림으로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꿈 같은 청년시절을 보내던 중, 저는 늦은 중립을 가게 되었습니다.
22살에 들어가는 군대, 저는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는 중립을 가는 것이 출정을 하는 장군과 같았고 회중은 저를 영웅처럼 배웅했습니다. 훈련소 입소, 그리고 집총거부, 죽음을 넘나들었던 하룻밤을 지내고, 지금 세대는 믿겨지지 않을 살벌한 군대영창으로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저는 방위소집 대상이어서 악명높았던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는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증인 조직내에서도 몇 명 가지 않았을 9사단 군대영창에서 있었던 한달간의 기억들, 끊임없는 협박과 구타, 얼차려...등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제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렇게 육체는 피폐해져 갔지만 정신은 또렷해져 갔습니다. 청춘은 갇혀 있었지만, 저의 신념은 날로 강해지던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어느덧 한달이 지나고 의정부 교도소의 앞문을 통과하여, 저는 그곳에서 100 여명의 아름다운 청춘들을 만나게 됩니다. 나이답지 않게 멋진 기획력과 절제력을 보여주던 서범석, 이의찬, 이상구, 임유광, 박상규, 김대웅 ...의리 하나로도 지구를 구할 수 있는 나의 멋진 친구 이은영, 추진력 하나만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김동암....처절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도 우리는 [여호와께 충성]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말하면서 결국은 허망한 인간조직의 지침 하나하나에 인생을 걸고 있었습니다.
청춘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이건희 회장의 수조원의 재산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라지만, 누구에게나 한번은 스쳐 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이 청춘을 어떻게 보내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곁에 누가 있고, 어떤 책을 보았으며, 어떤 가족들이 있었는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아야 하는 시절,
우리의 추상같은 신권조직?이었던 워치타워와 통치체는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이 희생하는 청춘은 결국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영화 "1987" 영화의 배경시대 중립을 들어갔었지요. 박종철의 고문치사로 인해 영창 안에서의 구타는 선배들에 비해 엄청 줄었썼습니다. 마산, 인천을거쳐 의정부까지 그때의 추억이 그대로 떠오르네요.
네, 지금 돌이켜보는 지난 날의 청춘이 눈물겹도록 그립습니다.
찬란한 청춘을 함께 했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눈물겹도록 그립습니다.
젊은 날의 초상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늙어가지 못하는 것이 시리게 아픕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형제들 이름을 모두 기억하시는 블루님이 놀랍습니다.
저는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가물거리는 사람들이 많네요.
덕분에 청춘을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응답하라 1987
블루님의 이 글이 작년 11월 6일에 올려진 글입니까? 며칠 전만해도 분명히 없었는데......
신자들의 고등교육을 막는 종교라니? 이 부분은 양심적병역거부, 수혈거부 등등보다 제게 정말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신자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 각분야의 유명한 사람들이 되면 여호와증인교의 광고나 교세확장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덜 배울수록 좋은 직업을 갖기 어렵고 빈한한 신자가 될 것은 뻔한 이치인데...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력이 높을수록 배교의 확률이 높아서인가요?
증인에 대해 아직 잘 모르시는것 같습니다. 어느 종교가 대놓고 배교확률이 높으니 고등교육 받지 말라고 말하겠습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다 고상한것이지요.
그리고...배교라는 용어는 종교입장에서 하는 편협된 말이니, 탈퇴라는 용어를 권해 드립니다
배교라는 용어를 사용해 죄송한데요. 그네들의 속셈을 지칭하는 뜻에서 사용한 겁니다. 앞으로는 탈퇴라는 용어를 쓰겠습니다.
네 ^^ 성서에 세상학문을 초등학문으로 표현한 게 있는데. 이걸 차용해서 고등교육을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분별력과 논리력이 좋아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컬트종교는 고등교육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맨위 첫번째 사진은 회중 야유회 모임에서 청소년 장기자랑하는 모습같네요 ...^^
잠시나마 아련한 추억을 가져봅니다 ...
P.S. 목숨까지 바쳐 츙성을 맹세한 그날들에 대해선 그어떤 위로가 통할까 모르겠네요 ...
앗~! 제가 아는 사람 한명 발견. ㅋ 2번째 사진 왼쪽에서 2번째 남00 / 맞나요?
김신우, 김형민 모두 저 보단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1990년대 초, 중반 같은 곳에 있었답니다.(6 번째 분도 장로였지요. 그때 마침 별거,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분)혹시 벧엘 출신 이선석님을 아시고 계시나요? 그의 부인(박정자님)과 연구하여 1984년도에 침례를 받았는데, 미국가셔서 박정자님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고, 이선석님은 탈상 후 수개월만에 열열팬에 의해 재혼하셨다네요. ㅜ
후유~ 불루스카이님의 청춘 그 아름다운 이름속의 추억과 편린이 가슴을 애이게 합니다.
네, 남종성 형 맞습니다. 제가 참 좋아했던 분이고 인품도 머리도 좋은 분인데....아직도 관념의 포로로 살아간다는 소식이 씁쓸... 신우 형민이를 아시는 군요. 제가 아끼던 동생들입니다.
이선석이라는 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잘 모릅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네요.
90년대 초..형민이,신우하고 같은 회중이었다구요???그럼 저와 겹치는데...음..쪽지 한번 주세요.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요.
블루스카이님..혹시라도 문화촌회중 주임 감독이셨던 이병만님을 아시고 계시면 꼭 알려주세요. 전 그분에게 마음의 빚이 있답니다.
저는 잘 모르는 분입니다.
사실 대학도 갈사람만 가는게 맞는거라 공부잘하거나 예체능에 뛰어난 친구들은 막지않는다면
어느정도의 재재까지는 이해갑니다
학습능력이 심각하게 안좋고 가정형편도 많이 안좋은데다가 특별한재능도 없다면 대학을 가게된 순간부터 개인이나 가정에 타격이 크기때문이고 시간낭비인 경우가 많으니깐요.... 근데 이종교의 문제는 뛰어난 사람들도 대학을 못가게하거나 하향지원하게 만든다는건데 요즘은 그런점에선 상당히 나아졌고 오히려 예전세대에 비해 똑똑치못하고 어벙벙한 친구들이 주를 이루더라고요
조금이라도 능력있으신분들은 계속해서 이탈하거나탈증해버리고 정말 구성원들이 하향 평준화 됫더라고요
저는 공부잘한 증인들?? 2010년대 학번들 기준으로 못하는사람은 많이 봣지만 예전세대들 이야기들어보면 무슨 전교 1등도 많았다는 글보면 어안이 벙벙합니다 요즘보면 사교육엄청시켜도 대학 아웃풋 별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서울사는데다가 학력에 재재를 가하는 동네,회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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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합니다..사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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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절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시네 ㅎㅎㅎ 잘 지내시는지요?
아 형님, 어찌 지내시는지. 궁금했습니다
나도 비슷한 사진 많습니다 옛날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