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을 보았습니다. 한 지인이 제게 자신이 어떤 사람일지 한번 맞춰 보라며, 영화 ‘남한산성’을 한번 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렇찮아도 이전에 소설가 김훈이 쓴 '남한산성' 이라는 장편소설을 읽어본터라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 였습니다.
영화 ‘남한산성’은 불과 몇 백년 전에 (1636년 병자년) 우리가 살고있는 바로 이 땅에서 발생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지금과 다르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이들의 모습에서 저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자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영화이긴 하지만 원작작 김훈씨가 책 서두에서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라고 선을 그음으로 소설가로서의 상상과 생각이 반영된글임을 전제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남한산성’을 뮤지컬로 올리면서 김훈씨는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현실도 견디고 살아나야 하는 비극이라고 생각을 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 소설을 영화화한 황동혁 감독이 여러 배우들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남긴 말들 하나 하나는 제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척화파 예조판서 김상헌을 얼어붙은 강 위의 길을 찾아 강 건너로 인도해 주고 김상헌의 칼에 맞아 죽었던‘뱃사공’
청에게 화친을 하고 투항을 하더라도 죽음이 아니라 삶을 살아나아가자는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
청에 항쟁하는 삶이 올바른 삶의 모습이라고 설파하는 척화파인 예조판서 ‘김상헌’
첨예한 논쟁 속에서 이렇다 할 대책을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인조’
자신의 처한 빈궁한 처지 속에서도 기지와 용기를 발휘하며 자신 만의 삶을 살아내었던 대장장이 ‘날새’
어떤 조건 하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군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충직한 장군 ‘수호사’
자신을 저버린 조선에 복수하겠다며 조선을 압박하고 괴롭히는 데 앞장선 청나라의 통역관 ‘정명수’
어쩔 수 없이 군역에 끌려나가 상관들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의 삶이 휘둘림을 당하면서 살아야 했던 수많은‘군사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아무런 불평 불만 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가야만 했던 ‘백성들’
시류에 따라 그 때 그 때 온갖 나름대로의 충정(?)을 다해 임금에게 간언하던 ‘신하들’
뱃사공의 손녀로 보통 사람들이 쉬이 올 수 없는 얼어붙은 강을 건너 김상헌에게 죽임을 당한 뱃사공인 할아버지를 찾아 남한산성까지찾아와서 할아버지를 죽였던 김상헌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어린 여자아이 ‘나루’
이 영화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들을 담아내었던 것 같습니다.
“항쟁과 투항 사이에서 대립하는 김상헌과 최명길의 관계는 결코 진부한 적대 관계가 아니라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현실의비극적인 상황을 기어코 살아내야 하는 의지의 표현 방식에서 다를 뿐이다. 삶에 대한 의지는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보다 더 고귀한 정신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소설가 김훈씨의 말도 인상적 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관람한 분들의 소감은 다들 별다르시겠지만, 저는 이 영화를통해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의 방식”을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뱃사공이 김상헌에게 말하기를 “어제는 어가를 건네주고, 쌀 한톨도 받지 못했다. 내일은 오랑캐에게 길을 열어주면 쌀 한줌이라도 받을터이다.그래서, 함께 가자던 김상헌의 말에 “살던 자리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돌아서는 뱃사공은 청나라 군에게도 길을 열어줄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김상헌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사 속에도 대비되는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최명길 :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일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분명 삶의 길은 있사옵니다.
김상헌 : 삶과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냐이까?
최명길 : 대의와 명분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먼저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이 있는 것 아닙니까?
예판 김상헌이 대장장이 날새에게 “격서를 전하고돌아오면 왕으로부터 큰 상을 내릴 것이다”라는 말에 대답하기를, “제가 이 일을 하는 것은 상을 받고자 하는것이 아니옵니다. 전하와 사대부들이 청을 섬기든, 명을 섬기든 저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옵니다. 저같은 놈이야 거저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이 배골지 않고 날 수 있는 세상을 꿈꿀 뿐입니다.”
주화파 쪽인지, 척화파 쪽인지를 물어보는 이판 최명길의 질문에 대답하는수호사의 답변은 “저는 적을 잡는 무관일 뿐 이쪽도 저쪽도 아무 쪽도 아닙니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왕의 재가를 기다리는 신하들에게 “나는 살고자한다”라는 말로 자신의 답을 대신한 인조
참으로 다양한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과거의삶이기도 했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현실이기도 합니다.
“삶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영화 속에서 들은 답은 바로 “살아야만 걸을 수 있는 새로운 길” 입니다!
영화 속에서나 오늘의 현실 속에서나 대립된 사고를 가지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각자의 삶의 길이 끝까지 평행선일 수 밖에없습니다. 영화 속에서 감독이 지향했던 것 처럼, “낡은것이 모두 사라진 새로운 세상에서나 열리는 길”은 누구나 바라는 미래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본 후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조직에 속해있든 개개인 모두는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아니 어떤 면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 대입시켜 보자면, 탈관념하고, 탈증인으로살아갈 수 도 있고, 가족이라는 인연이든 그 어떤 이유로든 탈관념하고서도 어쩔 수 없이 여증의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 속에 사시는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여증이든 탈증이든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과연어떤 삶을 살아 나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각자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의 삶에 대한 선택에 대해 어느 누구도 판단할수는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각자의 삶의 모습과 각자가 살아나가야 하는 인생길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줄 수 없고 또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 개개인들은 모두 각기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이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삶의 무게도 각기 다 다릅니다. 그러기에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해 주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이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자하는 우리 탈증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첫댓글 까불다가 오랑캐에게 짓밟힌 이조 시대 역사물이죠.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삶의길.. 살아야만 걸을수 있는 새로운길 ~ 아주 좋은 말이네요.. 저는 이런 임팩트있는 말은 가슴에 새깁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김훈의 글에선 쩐내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죠~ 그의 남한산성을 읽긴 했는데 영화는 아직도 못 봤네요. 이참에 함 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 영화를 보면서 무능한 조직을 보면서 친화파와 개혁파가 있지만 거의 개혁파는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 내부자이든 외부자이든 조직의 진정성을 모두 요구하므로 결국 하늘에서 손을 쓸때가 온것 같아요.
저도 '남한산성' 영화를 보기는 했는데 영화감상평으로 보니 또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