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사(晴岡寺)와 정진사(鄭進士)댁 사람들(하)
정진사의 아들 정방해(鄭邦海)선생은 1898년 고향집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공부하면서 5백석 꾼 부자 살림 경영에 관심을 쏟았다.
당시는 일제치하인지라 신문물의 교류로 인해 물류의 유통이 예와 달라 재화를 잘 이용하면 큰 이문을 얻을 수 있는 분야도 더러 있었다.
선생은 진주, 마산, 부산, 대구 서울에 까지도 활동무대로 하여 재화(財貨)를 움직이니 재산이 크게 불어나 千石꾼 소리가 남들 입으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서울 안국동64번지에 99간 저택과 진주, 마산에는 기거하는 집을 마련해 두고 독립운동가 들이 은밀히 출입하면서 군자금을 받아가곤 했다.
오세창 선생의 대웅전현판 작품을 소장 하게 된 인연도 군자금과 관련된 일이었다.
정방해 선생은 이로 인해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아오다 서울에서 검속을 당한일도 있었다.
평소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정방해 선생은 합천에 고등보통학교 설립을 꿈꾸어 왔으나 이루지 못하고 1922년 진주 일신고보(현 진주여고) 설립준비를 할 때, 돈1천 원(당시 논4천 평 값)을 희사했고.
1923년4월1일 동교 재단법인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평의원수 30명)
1932년 쌍백공립보통학교 설립 시 자신의 논 8백 평을 기증하여 현 위치에 학교터를 정하게 했으며,
1941년 대병 심상소학교 부설 간이학교(삼산국민학교)를 지을 터와 교무실과 교실 1칸을 지어 기증하기도 했다.
정방해 선생은 잠시도 쉴 틈 없이 분주하게 활동하시다 1947년 가을 49세를 일기로 갑자기 운명하시니 아쉬움을 어디다 비하랴···
청강사를 짓기 시작한지 13년 동안 정진사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불교에 심취되어 있었지만 정진사와 그 아들 정방해 선생만 절 운영에 직접 관여했을 뿐, 다른 가족들은 문외한인 지경에서 갑자기 절을 관리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어 답답한 입장이었다.
이에 부득이 정진사의 며느리와 손자며느리가 일을 맡게 되었다.
해방 후 한국 종교의 교단 조직은 신도들의 증가와 함께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그와 아울러 교단 내외적인 원인에 의해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구승과 대처승 간에 주도권 다툼은 장기간 계속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청강사 역시 안정을 유지하기에 힘이 들었다. 정진사의 며느리이자 정방해 선생의 부인인 朴上品月(불교명; 朴山支보살)여사와 손자며느리 노소진(법명;大法華보살)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은 의논 끝에 절을 조계종 비구니 수도원으로 제공하기로 결정하고 조계종 총무원에 제의를 하게 되었다.
이 일이 조계종 내부 사정으로 인하여 지지부진 하다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부흥단계에 들어선 불교계에 큰 자극을 주는 일이라고 동아일보는 1959년 5월25일자 신문 사회면5단 톱기사로 보도됐었다.
현재 청강사는 이렇게 3대에 걸친 진사집안으로서, 선조님이 심혈을 기울려 이룩한 사찰을 몇 년간 방치하듯이 하여 안타까워 정진사의 증손자 혜광스님(속명; 鄭鉉世)이 늦게 불가에 귀의해 주지로 절을 관리하고 있다.
혜광스님은 절의 유지가 힘겨운 가운데도 봄, 가을 산사음악회 등 지역사회 문화활동과 장학활동, 이웃돕기 봉사활동. 사부대중이 행복하고 흥겨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선조님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 盧大法華 여사는 연세가 90이 넘은 지금도 절 걱정을 하며 대웅전 옆에 모셔진 龍塔은 문화재급에 드는 훌륭한 작품이라면서 잘 보존하라고 당부하는 친서를 혜광스님께 보내오고 있었다.
(전 합천군수 강 석 정 010-9335-2528)
첫댓글 청강사 유래를 다시보고 갑니다 소상하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들리겠습니다
스님 가문의 역사가 깃들인 청강사 유래, 잘 읽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