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타고와 한니발

↑ 한니발석상 / 프랑스 파리 루브르미술관.
제 1차 포에니 전쟁
제 1차 포에니 전쟁의 발단은 시칠리아 섬의 히에로 왕은 메시나를 지키기 위해 인근 이웃의 마메로트족 청년들을 용병으로 고용했었다. 그러나 마메로트족 청년들은 엉뚱한 생각을 품게 되고 결국 주인인 히에로 왕에게 반기를 들게 된다. 마메로트족은 손쉽게 메시나 성을 점령할수 있었지만 히에로 왕은 곧 자기 영지에서 군사들을 재정비해서 메시나를 탈환하고 반역자들을 처벌하게 위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다. 이로서 수세에 몰린 마메로트족은 로마와 카르타고에 공동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서로 큰 속셈이 있었다. 그들은 일단 지원군으로 도와주러 오는 셈치고 시칠리아 본토에 입성한다음 히에로 왕과 마메로트족을 눌려버리고 시칠리아를 장악해버릴 속셈이었던 것이었다. 시칠리아를 장악하는 자가 지중해 장악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수 있다는것을 깨달은 두 국가의 전략적인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뜻대로 풀리지 못했다. 카르타고는 그리스를 누르고 최강의 해운국이 된 자기들의 힘을 믿으며 로마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유만만함으로 가다가 로마에게 이미 시칠리아의 선두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로마는 카르타고보다 선수를 빨리쳐서 제빨리 마메로트족을 누르고 메시나를 차지해버린 것이었다. 시칠리아 섬에 딱 하니 버티고 있는 로마를 카르타고는 상당히 분개한 상태였었다. 카르타고는 로마군을 시칠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전 메시나 주인 히에로 왕과 연합하여 로마를 몰아내기 위한 전략을 짠다. 이것이 거의 본격적인 1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로마는 제빨리 강력한 육군을 바탕으로 전력이 약한 히에로 왕 군대를 포위해버렸다. 히에로 왕을 굴복시킨 로마와 카르타고는 본격적으로 시칠리아 섬의 재해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카르타고는 그리스를 누른 것을 바탕으로 최강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정작 육지에서는 통솔력이 뛰어난 장수가 부실했다. 바다 위주에서만 활약하던 카르타고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반면 로마는 해군 건설에 주력을 두고 까마귀라는 새로운 전선을 만들어내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육지에서 경험이 부족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게 밀리는듯 했으나 수전에서는 로마의 군대는 이리저리 휘청거리고 침몰되기만 할뿐이었다. 로마는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해전에서의 싸움은 승산이 없을걸 알고 카르타고를 육지로 끌어내려 승부를 볼 생각 이었던 것이다. 로마는 시칠리아 섬 주변에서 싸우게 되면 해전이 약한 로마인만큼 수세에 몰릴수도 있을거란걸 알고 우회해서 카르타고 본토를 침략하기로 한다. 로마군은 필사적으로 카르타고 몰래 함선을 우회해서 카르타고 본토에 상륙하자는 전술이었다. 카르타고는 뜻밖의 본토 침공에 허우적 거리기 시작했다. 로마가 본토로 침공할것을 예상못했던 카르타고는 어느세 수도인 카르타고까지 로마 육군에 의해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지휘장군이었던 레굴루스 장군은 카르타고 왕의 간계를 알아차리고 있었다.협상이라는 명목하에 이리저리 시간을 끌고 결국 용병들이 도착할때까지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카르타고의 속셈은 통하게 되고 결국 스파르타의 명장 크산티푸스에 의해 로마의 군대는 괴멸이 되고 본토 침공은 실패를 하게 된다. 살아남은 로마군은 함선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결국 바다에 거의 모든 함선이 침몰이 되게 된다. 본토 침략 실패로 뼈아픈 타격을 입은 로마는 어느세 해군을 건설하여 카르타고의 해군을 드레파나 해전에서 격파함으로써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결정되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언제든지 살아날 기반은 충분히 존재 했었다. 카르타고는 물론 로마에게 상당한 수의 배상금을 빛지긴 했으나 그동안 이뤄둔 경제적 바탕을 기반으로 슬슬 재기를 성공하게 된다. 그때 해외파로써 에스파냐 지방에서 막대한 부를 쌓고 있던 하밀카르 바르카스라는 장군은 카르타고의 유능한 장군으로 로마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로마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으나 결국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한니발에 의해 2차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 일게되는 것이었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총사령관에 오르고 국력을 키워가면서 때를 노리고 있었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새로운 충돌은 에스파냐 지방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아프리카 북쪽에 위치하던 카르타고는 슬슬 영토를 늘리기 위해서는 아프리카 지역을 넘지 않아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카르타고가 슬슬 에스파냐쪽에 영토를 더 늘려 나가자 초조해진 로마는 카르타고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것이 발단이 되면서 한니발은 결국 로마의 동맹도시인 사군툼을 침략 하면서 본격적인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카르타고는 원래 용병제로 군사력을 유지하던 국가 였으나 2차 포에니 전쟁이 되면서 더욱더 군사력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기병을 중시하여 숟한 전략 전술을 일으켰던 장군이었다. 로마는 사군툼을 함락시키기 위해 수차례나 군대를 퍼부었으나 한니발의 저항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로마는 초조해져 슬슬 카르타고의 본토를 다시 우회해서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로마가 카르타고 본토를 침공하려고 할때 한니발은 짐작대로 로마가 본토를 침공할거란걸 알고 사군툼에서 기어나와 로마의 본토를 역으로 침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니발은 로마에 갈려면 두 험준한 산맥을 넘어야 했다. 바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 로마는 한니발이 지리에 익숙하지 않다는걸 알고 오히려 평야 지대 길목으로 주 병력을 집중하여 카르타고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예상외로 피레네 산맥을 넘는데 성공하게 되고 로마는 그걸 알고 이번엔 알프스 산맥 외에 로마로 갈려면 마실리아(지금의마르세이유) 항구를 거쳐야 한다는걸 알고 주 병력들을 그곳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의 예상과는 달리 기적같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이었다.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고 제빨리 로마 본토를 포위해버렸다.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걸 안 로마는 발칵 뒤집히기 시작했다. 원로원에서 회의는 거의 끈임없이 열리기 시작했고 파비우스 막시우스 장군을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카르타고를 막으려 하였다. 로마는 시간을 끌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로마군을 모으기 시작했고 드디어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맞붙기 시작했다. 카르타고군은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도 로마는 바람앞의 등불과 같았다. 원로원 의원중 위기를 직감하고 한니발과 협상을 하자는 파도 있었으나 원로원 의원 대다수는 한니발은 위험한 존재라는걸 직감한 터였다. 한편 에스파냐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장군 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 본토가 포위되어 있다는걸 알고 오히려 역으로 카르타고 본토를 다시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스키피오는 에스파냐 에 주둔하던 카르타고군을 무찔르고 제빨리 카르타고 본토를 포위했다. 한니발은 본토가 위험한걸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회군을 할수밖에 없었다. 결국 2차 포에니 전쟁의 마무리 전투라 할수 있는 자마 레기아에서의 대전투에서 대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
3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에서 로마에게 패배한 것으로 정말 절망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 피해란 1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패배보다 오히려 더 큰것이었다. 카르타고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아프리카 영토 내에서 다시는 밖으로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와 동맹 조약을 맺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없이 전쟁을 벌여서도 안되고 로마와의 전쟁을 절대 벌여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 인들은 이러한 로마의 속셈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 인들은 배상금을 갚아나가면서 살아나고 있었다. 이러한 것에 초조해진 로마는 카르타고를 확실히 뿌리뽑을 생각을 하게 된다. 로마는 누미디아 왕을 이용하여 카르타고를 괴롭히게 되고 이에 참지못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는 이에 트집을 잡고 카르타고를 코너에 몰았다.카르타고 본토에 로마군이 도착하자 카르타고는 용서를 빌었다. 로마는 용서를 하는대신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카르타고가 술책에 넘어가자 로마군은 카르타고 인들에게 성 밖으로 물러날것을 명령하고 카르타고를 흔적없이 파괴시킬 생각 이었던 것이다. 분노한 카르타고 인들은 성문을 닫고 항전을 시작하였다. 무장 해제된 카르타고는 자그마치 3년정도나 로마군에 저항하였던 것은 정말 대단한 것으로 후세 사람들도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카르타고는 경제력이 풍부 했나라는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3년동안이나 성 안에서 고립된채 버텼다는건 쌓아돈 재력이 어느정도 바탕이 되었었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의 맹공한 저항에 힘을 못쓰고 카르타고인들은 정신력이 창조한 무서운 놈들이다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카르타고의 저항에 로마인들은 주춤했으나 결국 항전끝에 카르타고는 함락이 되었고 화려했던 카르타고의 영화도 끝을 맺었다. 일설에 의하면 카르타고에 입성한 소 스키피오 장군은 살아남은 주민들을 보고 이들이 카르타고를 지켜왔다 말인가 하고 감탄하면 남은 포로들에게 살 땅을 내 주어 남은 포로들은 아프리카 땅 한쪽으로 ?グ? 살게 되었다는 예기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