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관계에서 발해가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관심을 두었던 곳은 산동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제나라였다. 제나라는 '안사의 난' 이후 당나라에 생겨난 고구려인의 국가다.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이 평정되면서 당나라에 귀순한 많은 외국인들을 자의로 처분할 수 없어 바로 그 자리에 절도사들을 임명하여 실제상 할거를 허용하였다. 이 절도사들은 사실상 하나의 독립국왕으로 행세하였으며 그들의 통치영역은 실제로 당나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자기 영역안에서 일체 조세를 당나라 정부에 바치지 않고 독차지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권한을 자손에게 세습시켰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당나라에 대한 반역을 선언하지 않는 한 당나라의 신하로 인정되고 당나라 임금으로부터 당나라 정부 대신의 관직과 작위등을 받았다.
이러한 절도사들이 통치하는 지역을 당나라에서 '번진'이라고 불렀다. 그때 당나라 하삭 일대에 이러한 번진들이 모두 10여개 있었는데 이 '번진'들은 당나라가 망할 마지막까지 백수십년 동안 계속되다가 이른바 5대를 거쳐 송나라 초에 와서야 없어졌다.
당나라로부터 실제상 독립된 할거세력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고구려사람 군벌 출신 이정기가 차지한 '평로절도사'와 그 자손이 선포한 제나라였다. 이정기는 756년에 부하 장병들의 요구에 의하여 당나라 사람 후희일의 후임으로 평로치청 절도사가 되고 그 후에 당나라 임금의 승인을 받았고, 독립국의 군주로서 오늘의 산동성의 전체 지역과 강소성 일부까지 차지한 강력한 할거세력이었다. 또 평로치청 절도사는 이전 영주평로 절도사의 모든 직권을, 특히 신라·발해의 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모든 사무를 관할하는 직책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래 영주를 통하여 진행하던 발해국가와의 관계를 자연히 맡아보게 되었다.
발해는 이정기의 세력 강화가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여 친선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고, 평로치청의 이정기도 발해와 신라를 자기의 후방안전을 도와주는 원조자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이리하여 발해와 실제상 독립국가인 평로치청은 서로 내왕하여 잦은 무역을 하였다. 두 나라의 교통로는 영주의 육로가 아니라 압록강 어구에서 서해를 건너 산동 등주로 올라간 후 청주 또는 문주를 거쳐 다시 그 서쪽 당나라 장안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이리하여 765년 고구려사람 이정기가 당나라의 평로치청 절도사로 된 이후 실제상 독립국으로 된 제나라는 819년 그 마지막 집권자 이사도가 부하들의 반변으로 망할 때까지 모두 55년 동안 존속하면서 당나라에 대하여는 큰 위협으로, 발해에 대해서는 믿음직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발해와 제나라와의 선린관계의 발전은 두 나라의 이익에 맞았으며 발해의 부강발전에 일정한 도움이 되었다. 그것은 또한 당나라의 동방침략을 막음으로써 동방 여러 종족들의 내부 발전에도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