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에게는 물론 그 누구에게도, 관심받거나 사랑받거나 이해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결핍을 채우려는 내 욕구를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나도 사랑받았던 기억을 회복하면 결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수십, 수백생을 윤회했다는데, 그 많은 생(生)중 사랑받았던 생 하나 없을까?
그래서 셀프 전생퇴행을 시도해 보았다.
이제 좀 걷을 수 있게 된 여자아이가 아장아장 뒤뚱대며 큰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밝은 햇살이 문틈으로 쏟아지며 이내 활짝 열렸고, 나가보니 냇가 옆 길죽한 과수원인데 언제부터 방치되었는지 사람하나 없고 어른키를 훌쩍 넘는 마른 억새풀이 과수원을 덤성덤성 채우고 있었다.
내가 사는 시골에선 겨울마다 마주치는 풍경이라 낮설지는 않지만, 사랑받은 기억을 떠 올리기엔 적절치 않아 보였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 보아도 사람 하나 없는데, 아이는 빠져나온 그 문고리를 잡고 매달려서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나를 바라보기만 한다. 이 황량한 풍경에 저 미소는 뭐지...?
쓰러져가는 지하 창고같은 건물이 있어 들어가 보았으나 여기 또한 버려진지 오래, 어수선하게 늘부러져 있는 짚이며 나무조각들이 오랜 세월에 묻혀 오히려 차분하기만 하다.
몇일에 걸쳐 시도해 보았으나 계속 같은 상황만 되풀이 되고, 내 심리세계의 퍽퍽함이 이렇게 나타나나 보다 하고 포기할 즈음.
평생을 쎄빠지게 일만 했던 부모님이 떠 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니 공납금만큼은 제 때 내려고 했는데.." 공납금 기한을 맞추지 못하던 날 엄마는 특유의 담담한 톤으로 말했다. 언젠가부터 방에는 부업꺼리인 낛시바늘로 가득했고, 우리도 때때로 도왔으나 재미삼아였지 도움되지 않았을게다. 방에는 쇳가루 냄새가 가득했다.
어느 날 하교길에 도로공사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보았다. 순간 끼쳐오는 부끄러움, 아버지와 눈이 마추쳤으나 모른체 외면하고 지나쳤다. 죄송했지만 동시에 화도 났다. 집에 온 아버지는 아무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때 우리집 형편이 많이 힘든가보다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공사일까지 해야 하는 가난과 무능한 아버지가 싫기만 했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꿈많고 철없는 사춘기 소녀일 뿐이었다.
초등1학년 첫 소풍 때 뒤늦게 출발해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 헐레벌떡 고개를 넘어 오시던 엄마, 명절때마다 때때 옷 사입히려고 동네 아줌마네 집으로 가시던 엄마, 형편이 안돼 남의 옷 얻어 입힐때 아쉬워 하던 엄마, 멸치 다신물 꺼리 팔려고 라이터로 비닐을 거을려 봉지 만드시던 아버지.
이혼 후 명절때조차도 용돈 한 푼 드리지 못하는데, 어찌어찌 일년간 모은 돈을 내 손에 쥐어 주시던 엄마. 온 동네 구두쇠라고 소문난 아버지가 죽도록 싫었고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순간마다 돈을 마련해 주신것은 아버지셨다.
어떤 부모들처럼 자식들에게 요구하는 것도 없고, 본인들의 문제를 돕겠다고 나서는 것에도 손사래를 치신다. 특히 약간이라도 과하게 돈을 보탤 낌세라도 보이면 온갖 신경질과 욕이 낭자한다.쓸데 없이 우리 걱정말고 니그들이나 잘 살아라는 뜻이다.
부모님 누구로부터도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적이 없다. 니 공납금은 제때에 내려고 했는데.. 라고 했을때 엄마는, 미안함보다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책감으로 느껴졌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자식은 어떠한 순간에도 미안해 해야할 존재가 아니라 책임져야할 존재였고, 부모는 약한 모습이나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 거였다. 그게 부모님이 가진 부모로서의 정체성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 두분은 우리앞에선 언제나 강인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던 시절에는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간절했다. 그건 관심과 사랑을 필요로 했던 나의 관심사였을뿐 하루하루의 생계가 급했던 아버지에겐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뇌과학에서 생존의 뇌는 "파충류뇌"로서 가장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생존과 안전을 관장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 생존위협에 대한 방어와 공격성이 주를 이루며, 감정. 정서적 교감이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감정적 뇌"로의 문을 닫아 버린다고 한다.
부모님이 그러셨을 것이다. 당장 끼니 걱정해야 할 판에 자기감정이나 마음 헤아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분들에게 사랑이란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는 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부모님이 나의 욕구와 감정.정서적 필요를 말살한 것도 사실이고, 지금도 그 내면아이의 고통으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온 생애를 가족을 위해 바친 그 분들의 삶이 사랑이 아니었다고는 말 하지 못하겠다.
지금도 내면에선 상처받은 아이가 울고 있지만 이제 그건 내 몫이다. 부모님이 사랑으로 길러내신 나를, 부족했던 부분 채워가며 다시 길러내는 건 내 책임이다. 부모님을 탓할 것도, 대체부모를 찾아서 될 일도 아니다.
내면아이 치유하면서 성장기 고통이 올라와 부모님이 밉고 힘들었었다. 일정기간까지는 계속되겠지만 그건 그거고, 사랑받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는 건 이제 그만 해야겠다. 아마 사랑받지 못했다고 하면 아버지는 어이없어 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으로 차고 넘치도록 사랑하셨을 것이므로.
전생퇴행에서 보여진 적막한 풍경과 그 환경속에서도 환하게 웃던 아이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 굳이 전생까지 갈 필요도 없었던 모양이다. 비록 내가 필요로 했던 사랑은 아니었으나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던 거였다.
그래 이제 다시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나도 엄마 아버지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딸이었다.
ps :
부모님이 부모님의 방식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안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내면아이 치유를 하려다 보니 일단 그 깨우침은 뒤로 물려 두어야 했고, 누구라도 어떤 시기에는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치유를 하다보면 부모와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강한 경계선을 쳐야 하는 가족들이 상당히 많다. 결혼한 자녀의 가족들까지 컨트롤 하려하거나, 가스라이팅하는 부모나 형제자매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주로 착하고 말 잘듣고 희생하는 자녀들이 타겟이 된다. 미혼 때는 물론 결혼 후에도 원가족을 위해 돈이나, 전자제품, 가사노동, 수발 등 도를 넘는 희생과 봉사를 요구하는데 대부분 벗어나기가 몹시 힘들다. 더 나아가 배우자, 자녀들까지 얽히기도 한다. 이런 가족관계는 반드시 재조정되어야 하고 강력한 경계선으로 정리해야 이후의 관계개선이나 독자적이고 자존적인 삶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그런 가족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이다.
상기했듯이 부모님은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자식에게 알아서 먼저 경계선을 치신다. 돈을 요구하는 일도, 사사건건은 커녕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부모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다 생각할 뿐, 어떤 형태로든 키운 댓가를 요구하는 일도 없다. 우리는 그냥 우리 삶이나 잘 살면 된다.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기 때문에 정서건강이 중요한 이 시대의 중요한 자양분을 공급하지 못했지만, 그분들이 삶을 바쳐 사랑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만약 뭔가를 요구했다면 나는 원수졌을 것이다.
경계선을 쳐야할 부모에게 내가 가지는 생각을 일반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