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멀다
나호열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벌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나호열 시집 『눈물이 시킨 일』(시와시학, 2011)에서
첫댓글 어제 걸었던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흰 꽃의 나무들을 떠올려봅니다.
함박꽃나무, 산딸나무, 쪽동백나무, 때죽나무 그리고 찔레꽃... 그 아득한 꽃향기와 함께...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향기를 떠올립니다. 도심에 앉아서 사그러드는 것 같은 몸과 맘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