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골 시편
- 폐가 앞에서
김신용
폐가 앞에 서면, 문득 풀들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떠올릴 말 있으면 풀꽃 한 송이 피워 내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떠나 버려진 것들 데리고, 마치 부처의 고행상처럼
뼈만 앙상해질 때까지 견디고 있는 것 같은 풀들
인적 끊겨 길 잃은 것들, 그래도 못난이 부처들처럼
세월을 견디는 그것들을 껴안고, 가만히 제 집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흙벽 무너지고 덩쿨풀 우거진 폐가,
사람살이 떠난 풍화에 몸 맡긴 집,
그 세월의 무게 못 견뎌 문짝 하나가 떨어져도, 제 팔 하나 뚝 떼어주고
홀로 뒹구는 장독대의 빈 항아리, 마치 소신공양하듯 껴안고 등신불이 되는
풀들, 그렇게 풀들의 집으로 고요히 돌아가고 있는 폐가,
그 폐가 앞에 서면
마치 풀들이, 설산 고행을 하듯 모든 길 잃은 것들 데리고 귀향하는 것 같을 때 있다
풀의 집은 풀이듯 데려와, 제 살의 흰죽 떠먹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 김신용 시집 '도장골 시편'(천년의시작, 2007)에서
첫댓글 우리들도 언젠가는 그대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손에 쥐고 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호주머니를 없애는 연습이 필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