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6(화)■
(사도행전 7장)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묵상/행 7:37-50)
◆ 광야 교회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38)
광야 교회는 구약시대의 교회다. 즉 구약교회다. 광야 교회라는 말은 신약 시대의 교회, 즉 신약교회에 속한 우리로서는 매우 흥미있는 말이다.
구약교회는 신약교회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똑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차이점은 그들은 예표와 그림자인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했고, 우리는 실체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대조를 해보자.
구약교회는 제사장과 백성의 구별이 있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그런 구분 자체가 없다(벧전 2:9).
구약교회는 육체의 할례를 받음으로써 백성이 되고, 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이면적 할례, 곧 거듭남으로써 성도가 된다(롬 2:29).
구약교회는 토요일 안식일을 지켰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안식일은 그림자일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이 곧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골 2:16,17, 롬 14:5, 마 12:5, 요 15:4)
구약교회는 건물이 성전이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성도들이 성전이다(고전 3:16).
성전을 헐라고 선동했다(행 6:14)는 오해를 받은 스데반은 성전을 우상화하는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려고 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48)
신약교회에 속한 우리는 구약교회처럼 건물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안된다. 우리는 관계 중심이다.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는 그곳이 바로 성전이며, 교회다.
주님은 건물에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형제와 형제의 교제 속에 임하신다. 주님께서는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고 하셨다(마 18:20). 그 장소가 아니라, '그들 중'이다. 오늘날 팬데믹은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시는 주님의 교훈일지 모른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구약교회를 실체로 알고 그것을 모방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제사장 옷을 입은 목사와, 일천 번제라는 이름의 헌금과 성전 건축이란 말을 너무나 당연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의 짝퉁일 뿐이다.
구약교회를 모방하면 매우 이해하기가 쉬운 종교가 된다. 반면에 신약교회는 영적이고, 어렵다.
예로부터 인간들은 쉬우며 손으로 만져지는 종교를 좋아했다. 스데반은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41)라고 말하고 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국가의 우상숭배가 훨씬 쉬웠다. 인간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종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고 내 이성에 맞는다고 해서 옳은 것이 아니다. 비록 어렵고 추상적으로 보이더라도, 올바른 영적 실체를 붙잡아야 한다.
◆ 진정한 예배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42)
광야에서 모세의 인도 하에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성실하게 제사를 드리곤 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모스서 5장 25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된 제사를 드린 적이 없었음을 폭로한다.
모세는 탁월하고 신앙도 깊었지만,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마음에 우러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광야 생활은 끊임없는 징계와 회개의 반복이었다.
마음에 없지만, 형식화된 종교 속에 갇혀서 사는 자들이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주 찬양을 하지만,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를 일이다.
"네가 평생에 내게 예배 드린 일이 있었느냐?"
예배 시간에 온갖 세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공연 감상하듯이 예배를 감상하거나, 겸손히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태도로 임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다.
예배 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불성실한 태도로 예배드리는 것이 늘 못마땅하여 한숨을 쉬고 인상을 찌푸리며 예배드리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정작 자신이 가장 불량한 태도로 예배드리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에는 언제나 남을 멸시하고 자신이 남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이나, 돌아온 탕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큰 형과 같은 사람들이 넘쳐난다.
단 한사람이라도 온 마음으로 예배드린다면 그 교회의 예배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 그렇다면 그 한사람이 왜 내가 되면 안되는가? 남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나 혼자만이라도 전심으로 예배하려고 해야 한다.
주님, 우리가 신약교회를 제대로 이루게 해주십시오. 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진정한 예배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 진정으로 그런 예배자가 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