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4일(화)■
(로마서 6장)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묵상/롬 6:1-6)
◆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복음을 오해하면, 마치 죄를 조장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롬 4:5),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심(롬 3:28). 심지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기까지 한다(롬 5:20)
이쯤 되면 죄에 대해 무뎌지지 않을까?
구원에 인간의 행위나 노력이 무용지물이라면, 무엇 하러 열심히 선을 행하는가?
은혜가 그렇게 풍성하다면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할 필요 있을까?
그냥 죄를 짓고 용서를 감사하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꼭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만큼 복음은 인간의 상식을 거스를 만큼 파격적이다. 그래서 복음을 전한 뒤에 이런 질문이 안 나오면 오히려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의심해보아야 한다.
오늘 사도바울은 왜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거할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
즉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도들이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가 '은혜를 베푼 분에게 어떻게 배은망덕하게 죄를 범하겠느냐'는 도덕의식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한다.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간의 도덕의식에 호소하는 식으로 올바른 삶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처음부터 율법으로 구원받도록 하셨을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를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이다.
죽으려고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고, 매일 죽으라고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객관적 사실을 말한다. 이 객관적 사실이 우리가 죄에 거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매일 죄를 범하는 신자들은 이것이 무슨 헛소리냐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죄의 정욕이 팔팔해서 매일 신경 쓰여 죽겠는데, '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말하면 해결될까?
이것은 이론 차원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지, 실제 생활에서는 거의 쓸모없는 이론처럼 들린다.
그런데, 믿음의 세계로 들어오면 이것이 이해된다.
내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와 연합이 되면, 죄가 불편해진다.
먹고 싶어도 참는 차원이 아니라, 역겨운 음식이 된다. 누가 토한 것을 먹고 싶어 하겠는가?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면 도저히 옮길 수 없는 산이 믿음으로 간단히 옮겨짐을 체험할 수 있다.
각종 중독, 각종 집착 등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강력한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요일 5:4).
성도라고 할지라도 믿음에서 이탈되는 순간 그는 심각한 죄의 노예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된 상태에서만 지속할 수 있다.
◆ 우리에게 일어난 객관적 사실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자신이 믿는지 안 믿는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자신이 믿는지 안 믿는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자도 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진 매우 독특한 경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진리를 설명한다. 그것은 곧 '세례'다.
적어도 자기가 세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헷갈리는 사람은 없다.
바울은 세례라는 분명한 경험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 객관적 사실을 끄집어낸다.
오늘날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소위 '영접 기도'라는 것을 시킨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세례'를 주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길,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막 16:16)라고 하셨다.
세례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벧전 3:21)이며, 예수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와 연합하는 의식이다.
세례 의식 자체가 우리를 구원받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를 받겠다는 그 믿음이 구원의 은총을 받게 한다.
세례가 참된 세례가 되려면 두 가지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과 "믿음"이다. 즉 예수의 이름으로 받을 것과 회개하고 돌이킨 진실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없는 세례는 그냥 물벼락일 뿐이다.
나는 유명한 사람에게 세례받았다고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세례받을 것을 권한다. 그의 세례는 무효다.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베드로 줄에 서서 빵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꼴이다. 주님께서 축복하신 빵이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나누어주는 사람이 베드로든, 가룟 유다든 그게 무에 중요한가,
예수의 이름과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나는 확실하게 예수님과 연합한 존재다.
내가 인정하든 말든 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한 자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한다.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느냐?"(3) 라고 하며 이것이 객관적 사실임을 일깨운다.
믿음의 세계는 독특해서 아무리 객관적 사실이라도 믿지 않으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으라고 했고, 정말 걸었지만, 베드로가 무서워하자 바로 빠졌다. 그게 믿음의 세계다.
객관적 사실이 있지만, 믿지 않으면 현실화되지 않는 세계가 믿음의 세계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망상도, 빈소리도 아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만이 믿음의 역사가 아니다. 내가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도 믿음의 역사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능력이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믿음이 추상적으로 들리는가?
주님을 묵상하라.
혼자 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서 경배해보라.
그것도 어려우면 말씀이라도 암송하면서 주님을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래서 믿음을 하나씩 배워나가라.
주님,
제가 예수님과 연합된 존재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복음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시고, 더 깊은 믿음으로 인도하셔서 믿음의 세계에서 살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