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1월5일(수)■
(로마서 6장)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묵상/롬 6:6-13)
◆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죽었다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이 모든 성도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음을 증거한다.
모든 거듭난 성도는 옛 사람이 못 박혔다.
예외가 없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양극단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 영이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2000년 전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한다.
오늘 본문에서 못 박힌 것은 과거형이지만, 부활은 미래형으로 쓰고 있다(8). 만일 2000년 전에 예수님의 몸 속에 우리 영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부활도 과거형으로 써야 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에 대해 지나친 문자적 해석을 하는 자들은 오히려 십자가의 풍성함을 약화시킨다. 그런 문자적인 해석은 우리는 죽었고(6절-과거형), 죽어있으며(11절 - 현재형), 살아있고(11절 - 현재형), 살 것(8절- 미래형)이라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얼마든지 조화 가능한 영적 풍성함을 놓치게 한다.
또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을 단순한 문학적인 표현으로만 해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내 안에 있다"라고 할 때, 그것을 진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식인종이 그 사람을 잡아먹었을 때나 하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연인들이 이 표현을 쓸 때, 그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다는 것도 이처럼 거듭남에 대한 문학적 표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다.
바울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6:14)라는 말도 했다. 그런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지만, 단순히 문학적 표현으로만 간주해도 곤란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신앙인은 그러한 표현은 영적으로 너무나 적절한 표현임을 공감한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이라고 하셨을 때,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무리는 식인을 떠올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냐고 되물었다(요 6:52). 당연히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런 혼란이 생긴다. 주님께서는 그런 망상을 일축하면서 제자들에게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하셨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단순히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문학적 표현으로만 해석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정말로 우리를 위해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셨고, 우리는 이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영생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은 문학적 표현을 넘어선 영적 실제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로 성찬을 하면서 믿음 안에서 이 영적인 실제를 체험한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도 이와 같다.
모든 제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믿음으로 우리가 살고, 그를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은총이 십자가의 공로에서 비롯됨을 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신앙 생활하는 자는 정말로 자신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표현에 아멘으로 응답할 것이다.
사실 못 박혔다는 표현은 바울이 주로 사용하였다. 다른 제자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제자들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바울의 표현을 단순히 그 만의 독특한 문학적 표현으로 몰아가면 안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벧전 4:1)라고 했다. 이것을 바울이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6절)이라고 표현한 것이 얼마나 적절한가!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은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는 고백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사상적인 전향을 했다거나 혹은 어떤 대단한 결단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실제로 나를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신분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총의 영역임을 의미한다.
내가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며, 내가 나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다. 모두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옛 사람을 못 박았다고 하지 않고, 못 박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영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옛 사람이란, 거듭나기 이전의 사람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 이 세상 풍조와 마귀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던 사람(엡 2:1-2)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으며, 하나님도 없었던 자다(엡 2:12).
이런 자가 변화되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리심을 받았고, 함께 하늘에 앉혀졌다(엡 2:5, 6)
이제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현재형)요, 하나님께 대해 산 자(현재형)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
이것은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죄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성령을 따르는 능동적인 삶이다.
◆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의 유혹이 몰려오는가?
나는 죄에 대해 죽은 자라고 선포하라.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는가?
하나님께 대해 나는 살아있는 자라고 고백하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라.
중풍 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다.
말만 하셨다면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조롱이다.
그러나 고쳐주시고 힘을 주셨다면 그것은 감사며 기쁨이다. 순종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열심히 걷는 연습해서 고쳐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고쳤으니 걸으라고 하신다.
우리는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다. 몸의 사욕을 순종하지 말고 내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자.
마음만 드리지 말고, 지체도 드리자(13).
손과 발도 순종해야 한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이런 승리와 능력을 체험한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이론만으로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참으로 내 속에서 역사하여 삶으로 나타나게 해주십시오.